[박경렬의 미래를 묻다] “국제협력 확대” 대통령 지시에 혼란 빠진 과학기술 현장
“오래전 만난 외국 학자에게 국제협력을 할 여지가 있는지 급히 문의했다.” “작년 뉴욕에서의 ‘디지털 자유선언’, 지난달 ‘파리 이니셔티브’와 같은 대통령의 ‘말씀 내용’을 참고해 예산 수정안을 하루 만에 제출해야 했다.”
연구현장이 혼란스럽다. 지난달 28일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직접 ‘R&D 이권 카르텔 타파’와 함께 ‘과학기술 국제협력의 대폭 확대’를 지시한 이후 시작된 일이다. 대통령이 국제 공동연구와 글로벌 과학기술 협력, 엄정한 연구개발을 직접 지시한 것은 큰 의미가 있다. 그동안 정부는 과학기술 국제협력을 겉으로는 강조했지만 정작 국제공동연구는 해마다 감소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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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D 카르텔 타파”와 함께 지적
방향 맞지만 방식·시점이 문제
예산삭감, 졸속집행 등 우려돼
연구현장 자율성 훼손 말아야
」
전혀 과학적이지 않은 과기정책
정부 R&D 예산 중 국제공동연구의 비율은 현재 1~2%대. 우리의 변화된 과학기술 위상을 고려하면 주요 선진국보다 매우 낮은 수준이다. 과학기술혁신 체계의 질적인 전환을 위해 보다 적극적인 과학기술 국제협력이 필요하다는 점에 공감한다.
그러나 방식과 시점이 문제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당장 내년 R&D 예산안이 전면 재검토에 들어갔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25개 출연연구기관의 주요 사업 예산이 20% 가까이 삭감되고, 국제협력은 증액에 대한 압력을 받고 있다. 불과 몇 주밖에 남지 않은 예산기간 동안 R&D 예산은 졸속으로 기획될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 문제일까. 우선 과학기술정책의 수립과정이 전혀 과학적이지 않다. R&D 예산을 전면 재검토하고 성과를 높이려면 데이터에 근거해 원칙과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응용연구는 투자 대비 효과성을 높이고, 기초연구는 인내를 가지고 장기적으로 도전할 수 있도록 정교한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카르텔이 있다면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구조적인 개혁을 해야 할 것이다.
과학기술계 전체를 통틀어 문제 삼는다고 될 일이 아니다. 국제협력을 대폭 확대한다면 어느 분야에서 기술주권을 지킬 것이고 협력은 누구와 어떻게 할 것인지 명확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R&D 예산의 급격한 삭감, 준비되지 않은 예산 편성은 부메랑이 되어 필요한 기초연구를 위축시키고 현장의 연구 자율성을 해칠 수 있다.
급격한 양적 성장이 반드시 질적 변화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과학기술 국제협력의 핵심은 상호성과 신뢰 구축이다. 1대1 매칭펀드를 통한 협력기관의 책임과 기여가 우리의 의지만큼 중요하다. 서로 관심 있는 연구 아젠다를 발굴하고 공동연구를 수행하는 것은 숙성의 시간이 필요하다. 양해각서(MOU)를 쓰고 사진을 찍는다고 국제협력이 되지 않는다.
명확한 원칙, 구체적 전략 없어
더군다나 우리가 지금 급히 예산을 늘려도 대부분의 협력국 예산 프로세스에서는 반영될 수 없다. 영국, 일본 (4월), 미국(10월) 등 국가별로 회계연도가 다른 점은 사전 조율이 매우 중요한 국제협력의 특수성을 보여준다. 미국도 국립과학재단이 이미 국회에 2024년 예산안을 제출했다.
누구와 어떠한 협력을 하겠다는 것인가? 우수한 국내 연구자들이 해외 연구자들에게 협력을 목매는 상황이 되어서도 시간에 쫓겨 예산을 만드느라 후순위 파트너를 찾는 해프닝이 연출되어서도 안 된다. ‘연구를 위한 협력’이 아닌 ‘협력을 위한 연구’로 주객이 전도된 상황을 맞이해, 내년 말 정작 필요한 곳에서는 예산이 부족하고 ‘불용’ 예산이 많이 늘어날 수 있다. 소중한 혈세가 내실 있게 사용되려면 명확한 원칙과 세부적인 전략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분야별, 협력국의 기술 발전 단계별, 요소별 기술성숙도(TRL·Technology Readiness Level)를 철저히 분석해야 한다.
세 가지가 중요하다. 먼저 해외 최우수 연구진과의 협력은 국가전략기술을 대상으로 하되 기술주권과 지적재산권을 강화하는 대원칙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 기술사업화와 실용화를 위한 협력은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을 포괄하는 범위 설정과 시장과의 연계가 필요하다. 기술 표준에 대한 전략도 함께 수반돼야 한다. 마지막으로 글로벌 난제에 대한 양자협력은 현재 정부의 중점협력국과 연계하고,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 등 기술이전의 무대에서 국가의 위상을 높이는 다자협력도 중요하다.
과학기술 국제협력의 또 다른 목표는 인재유치다. 궁극적으로는 해외 우수 연구자들에게 국내 연구기관과 대학이 매력적인 근무와 협력의 공간이 되고 우리의 혁신역량이 지속해서 강화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내야 한다.
과학기술 컨트롤타워 있나
이를 위해서는 긴 호흡으로 국가 차원의 통합적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연구현장에 혼란을 일으키는 과학기술 컨트롤타워가 어디인가. 현재 정부 내에서는 과학기술 국제협력, 더 큰 틀에서는 과학기술외교를 추진하는 범부처 체계가 없어 통합적 거버넌스 구축이 절실하다는 목소리가 크다. 현장과의 소통을 통해 제도 정비도 선행되어야 한다.
그동안 주요 규정은 법적 근거가 취약한 채 일회성, 단일 부처 중심으로 수립됐다. 국제과학기술협력규정과 출연연의 내부규정 등에 파편화돼 있다. 더구나 2021년 시행된 국가연구개발혁신법은 연구과제 수행 주체를 국내기관으로 한정하고 있다. 국제공동연구의 확대를 위해서는 혁신법부터 수정이 필요하다.
과학기술은 국가 간 경쟁의 핵심이자 국제협력에도 중요한 매개다. 국가 과학기술전략의 본질은 이런 과학기술의 복합성을 관리하며 통합적인 비전과 철학을 제시하는 데에 있다. 우리는 큰 전환점에 서 있다. 안으로는 과학기술혁신 생태계를 발전시키고 기술주권을 확보하는 동시에 밖으로는 국제협력을 통해 우리의 위상을 강화하는 노력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박경렬 KAIST 과학기술 정책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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