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 중 사망한 여성, 서울시장 앞에 나타난 까닭

김종성 2023. 7. 30.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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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SBS 드라마 <악귀>

[김종성 기자]

 SBS 드라마 <악귀>의 한 장면.
ⓒ SBS
 
SBS <악귀>에 나오는 악귀는 주인공 염해상(오정세 분)의 집안을 부유하게 만들었다. 염해상이 교수 봉급으로 감당하기 힘든 씀씀이를 보여주는 것은 그가 추적하는 악귀 덕분이다. 그의 할머니인 나병희(김해숙 분)는 캐피털 업체를 크게 경영하면서 대통령 별장 같은 곳에 산다. 악귀가 이 집안의 재산 증식을 도운 결과다.

이 드라마에서처럼 귀신이 재산 증식을 도와준다면 다행이겠지만, 현실적으로 보면 귀신은 돈을 벌어주기보다는 소비하는 존재였다. '귀신이 있나 없나'는 아직까지 판명되지 않았지만, 확실한 것은 귀신이 있건 없건 귀신을 위해 돈이 소비되고 있다는 점이다.

조상들이 제사를 지내온 까닭

귀신에 대한 제사는 죽은 조상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주기도 한다. 또, 종교적 관념에서 발생하는 두려움을 해소해주기도 한다. 가족이나 친척들의 유대감을 끈끈하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경제력이나 정치적 지위가 있는 가문의 경우에는, 제사가 가문의 영향력을 확장하는 데도 기여할 수 있다.

그래서 귀신이 있건 없건 귀신에 대한 제사는 인간에게 도움이 된다. 하지만, 거기에는 대가가 따른다. 지금보다 제사 횟수가 훨씬 많았던 100여 년 이전까지만 해도, 제사는 경제력이 있는 집안에서 지내는 것이었다. 그만큼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일이었다.

1996년에 미야지마 히로시 도쿄대 교수가 펴낸 <양반>은 조선시대에 양반으로 인정된 가문들의 공통점을 4가지로 정리했다. 양반은 무반과 문반을 합친 개념으로도 사용됐지만, 지배층이라는 의미로 더 많이 쓰였다. 후자의 의미로 쓰이는 양반은 법률에 규정된 개념이 아니었다. 거주하는 지역 내의 역학관계에 따라 상대적으로 규정되는 개념이었다.

미야지마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양반으로 분류된 가문들은 (1)과거 급제자나 저명한 학자가 가문에 있을 것, (2)해당 지방에서 수세대에 걸쳐 집성촌을 형성했을 것, (3) 양반의 요건을 충족하는 가문과 대대로 혼인했을 것과 더불어, (4)양반의 생활 양식을 보존하고 있을 것이라는 조건을 충족했다. 이런 조건을 갖춘 집안들이 지역 사회에서 양반으로 분류됐다.

여기서 (4)의 요건이 제사와 관련됐다. 미야지마 교수는 "양반의 생활 양식이란 조상 제사와 손님에 대한 접대를 정중히 행하는 동시에, 일상적으로는 학문에 힘쓰고 자기 수양을 쌓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양반들은 본인이 지주이거나 문중이 지주인 경우가 많았다. 그런 양반들의 특징 중 하나가 조상 제사였다. 이는 평민들은 제사를 지내기가 쉽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시간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집안들이 귀신을 모시고 젯상을 차렸던 것이다. 귀신은 돈을 쓰게 만드는 존재였던 것이다.

아동용 유학 교재인 <소학> 계고(稽考) 편에 "나라의 큰일은 제사와 전쟁에 있다(國之大事, 在祀與戎)"는 대목이 있다. 전쟁은 돈 먹는 하마다. 그런 전쟁과 나란히 제사가 열거됐다. 옛날 사람들이 볼 때 제사가 얼마나 부담스러운 행사였는지 알 수 있다.

출산으로 사망한 여성들, 제사에 오르기까지
 
 SBS <악귀> 스틸 이미지
ⓒ SBS
 
KBS 드라마 <전설의 고향>에 나온 귀신들은 공포감을 주는 존재들이었다. 실제의 귀신들은 공포감도 줬지만, 그에 못지않게 돈을 쓰게 만드는 존재들이었다. 이런 인식이 어우당 유몽인의 <어우야담>에도 묻어 있다. 한양 바깥의 북교에서 거행된 제사에 관한 이야기가 그런 인식을 전달한다.

<어우야담>은 "북교에서는 제사받지 못하는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준다"라며 "물에 빠져 죽은 자, 불에 타 죽은 자, 굶어죽은 자, 전쟁터에서 죽은 자들은 모두 제사를 지내주는데, 유독 아기를 낳다가 죽은 사람만은 제향에 참여시키지 않았다"고 말한다.

물에 빠지거나 불에 타죽는 등의 재난을 당하거나, 굶어죽거나 전쟁터에서 죽은 사람들은 주로 서민층이었다. 그들은 자손들로부터 제사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들을 방치하는 것은 사회적 긴장감을 증대시킬 수 있었다. 재난이나 기근 혹은 전쟁 등으로 서민들이 많이 죽으면, 그로 인한 원한이 대중의 정서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죽은 사람들이 제사마저 받지 못하면 정치적 긴장감이 조성될 수 있었으므로, 국가가 나서서 선제적으로 위령제를 지내줬으리라 볼 수 있다.

출산 후유증으로 사망한 여성들은 처음에는 위의 제사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나중에는 이들도 포함됐다. 그런 여성의 혼령이 '서울시장'의 꿈에 나타나 불평을 했다는 이야기가 <어우야담>에 실려 있다. 이 귀신은 자기에게는 왜 술과 음식을 주지 않느냐며, 그런 규정 때문에 성황신이 자기의 참석을 가로막았다고 불평했다. 이런 일을 계기로 북교 제사에 이들도 포함시켰다는 것이 유몽인의 이야기다.

유몽인은 임진왜란 때 광해군과 함께 국정을 운영해본 인물이다. 선조 임금의 위임을 받은 광해군을 보좌해 분조(分朝)라는 미니 조정에 참여한 경험이 있다. 그런 그가 생각한 것은 북교 제사에 투입되는 국가 재정이 너무 적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에 주인 없는 혼령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런데 제수에 쓰는 비용은 밥 열 그릇과 술 열 병에 돼지 어깨뼈 두어 개 값에 불과하니, 귀신들이 어찌 고르게 먹을 수 있으랴."

동일한 취지의 제사가 불교 사찰에서도 거행됐다. 임진왜란 33년 전인 1559년에 출생한 유몽인은 어린 시절 산사에서 그런 제사를 본 일이 있다고 회고했다. 승려들이 차린 제삿상은 북교 젯상보다 훨씬 단촐했다고 한다. 밥 두어 사발만 놓여 있었다고 그는 기억했다.

그런 제사가 거행될 때, 어린 유몽인은 승려들이 특이한 행동에 주목했다. 젯상 앞에서 허공에 글자를 쓰는 행동이었다. 그 글자는 '옴'이라는 산스크리트어였고, 한자로는 머금을 암(唵)으로 표기됐다.

승려들이 그 글자를 쓴 것은 두어 사발의 밥으로 수많은 귀신들을 먹이기 위해서였다. "옴이라는 글자를 밥그릇을 향해 쓰면 한 그릇이 백 그릇이 되고 백 그릇이 천 그릇이 되며 천 그릇은 만 그릇이 됩니다"라고 승려들이 알려줬다고 한다. 유몽인은 북교 제사에도 이런 방법을 써야 할 것인가 하고 한탄조로 말했다. 여기에 배정된 예산이 너무 적어 안쓰러웠던 것이다.

조상들이 귀신을 꼭 믿은 것은 아니지만
   
 SBS <악귀> 스틸 이미지
ⓒ SBS
 
옛날 사람들이라고 해서 귀신의 존재를 반드시 믿은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를 이끈 유몽인 같은 유학자들은 귀신의 존재를 논외의 대상으로 제껴놓았다. 인간의 감각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 판단 대상에서 보류했다.

그러나 귀신의 존재를 믿건 안 믿건, 귀신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은 항상 지출됐다. 양반이나 지주 가문, 그리고 국가에서는 귀신 제사에 상당한 비용을 투입했다. 북교 제사에 대한 유몽인의 설명에서 나타나듯이, 국가는 제사받지 못하는 귀신들을 특별히 배려했다. 국가는 살아 있는 대중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귀신에 대한 예우에 정성을 표했다.

드라마 <악귀>의 악귀는 자신과 결탁한 인간을 부유하게 만들어줬지만, 대부분의 귀신들은 돈을 벌어다주기보다는 가져다 쓰는 존재였다. 그들은 돈을 쓰게금 만드는 존재들이었다. 죽은 뒤에도 부양을 필요로 했다는 점에서, 귀신 역시 식구(食口)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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