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면산 판박이 경북 산사태, 난 경고했다"…지질학자 분노
“산사태가 난 7곳 중에 최소 5곳 이상이 사람이 건드린 데에서 발생했어요. 우면산 산사태와 판박이여서 현장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어요”
대형 산사태가 발생하는 현장마다 항상 나타나는 이가 있다. 국내 산사태 분야의 권위자로 꼽히는 이수곤(70) 전 서울시립대 토목공학과 교수다. 30년 넘게 산사태를 연구한 그는 지난 21일에도 경북 예천 등 산사태로 인해 인명 피해가 발생한 현장을 찾아 원인을 조사했다. 이 전 교수는 26일 중앙일보와 통화에서 “폭염주의보 속에서 현장을 조사하다 보니 돌아오는 길에 몸이 안 좋아서 응급실에 다녀왔다”면서도 산사태 원인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분노를 쏟아냈다.
이 전 교수는 “벌목과 임도, 태양광 등 사람이 손을 댄 개발 지역에서 규모가 큰 산사태가 집중돼 피해를 키웠다”며 “정작 정부가 지정한 산사태 위험 지역에서는 산사태가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올여름 역대급 장맛비로 인해 사망 47명, 실종 3명 등 많은 인명 피해가 났는데 상당수는 산사태로 매몰되면서 발생했다. 2011년 우면산 산사태부터 올해 경북 산사태까지 해마다 산사태로 인한 인명피해가 끊이질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19일 중앙일보 사옥에서 이 전 교수를 인터뷰했다.
“무리한 개간이 원인…가파른 곳 건드리면 무너져”
Q : 경북 산사태 발생 원인은 무엇이라 보는가
A : “위성 사진을 분석한 결과 이번 산사태가 발생한 곳 모두 개간이 있었다. 경북 지역에서는 7곳 중 5곳에서 벌목이나 태양광 설치 등의 작업이 이뤄졌다. 예천군 백석리를 보면 마을이 원래 밑에만 있었는데 시간에 따라 점차 산 위로 확장됐다. 거기서부터 산사태가 발생했다. 경북 영주시 조와동에서도 태양광을 설치하면서 물길이 바뀌었고, 태양광이 무너져 축사를 덮쳐 가축들이 죽었다.”
Q : 우리나라에서 발생하는 산사태 대부분이 그런가
A : “산사태 피해 지역을 살펴보면 인간이 건드려서 발생한 사례가 80~90%다. 텃밭을 만들거나 논, 과수원 등을 조성하는 무리한 개간이 있었다. 강원도, 경상도 등 특정 지역만의 문제가 아니다. 무리한 인위적 개간이 발생한 곳에 비가 많이 온다면 어디든 똑같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 가파른 곳을 건드리면 산사태가 날 수밖에 없다.”
Q : 산림청의 산사태 위험 지도로는 대응이 어렵나
A : “위험지도가 정확했다면 기후변화로 비가 많이 오더라도 그곳만 무너져야 한다. 그런데 우면산 산사태부터 이번 경북 산사태까지 취약 지역에서 산사태가 발생해 인명피해가 발생한 사례는 적다. 실태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위험 지역을 점수 매겨 관리하는 것은 외국에서도 60~70년대에나 하던 방식이다.”
3대가 지질학자… 주행거리 44만㎞ 기록
영국 임페리얼칼리지런던대에서 박사 학위를 마친 뒤 한국으로 돌아온 이 전 교수는 전국의 산사태 현장을 다니면서 원인을 규명해 자연스럽게 산사태 권위자라는 브랜드를 얻었다. 2019년 정년 퇴임과 함께 44만㎞를 달린 2003년식 쏘렌토 승용차도 폐차했지만, 이후에도 그는 산사태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지난해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인수위원회에 재난관리시스템의 현실을 고발하고 재난 인명피해를 획기적으로 줄이기 위한 134쪽짜리 정책 제안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그의 경고는 결국 무시됐지만 이 전 교수는 “(경고해도 무시 당하는 게) 익숙하다”고 했다.
Q : 지난해 인수위에 제출한 정책 제안서가 무엇인가
A : “산사태 현장에서 36년 동안 몸담으며 목격한 모든 사례를 종합한 보고서다. 산사태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모든 참사에는 공통적인 맥락이 있다. 이를 포착해 재난관리 시스템의 허점을 지적하고 ‘대통령직속 민간 재난예방위원회 구성’을 제안했다. 제안이 채택되면 대다수 재난을 예방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Q : 산사태 등 재난 피해를 줄이기 위해 필요한 것은
A : “우리는 산사태가 발생하면 복구부터 한다. 원인을 찾을 생각은 안 한다. 흙더미가 내려오면 많은 예산을 들여 복구할 뿐 어디서 무너졌는지 보지 않는다. 일종의 관행주의다. 이런 관성을 끊을 방법은 국민 참여밖에 없다. 그래서 현장 종사자들과 주민들의 목소리가 묻히지 않도록 민간 주도의 국민 재난 예방 조직 구성을 제안한 것이다. 정부와 공무원이 재난을 다 책임지겠다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다.”
Q : 이번 오송 지하차도 참사와 경북 산사태를 보며 어떤 생각이 들었나
A : “제안서에서 지적한 문제가 바뀌지 않고 되풀이돼 겁났다. 재난 예방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지 않다. 점쟁이도 아닌데 예상이 들어맞아 안타깝다. 이번 일을 계기로 바뀌지 않으면 똑같은 일이 또다시 반복될 것이다. 모든 부분이 획기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는 “이번 산사태도 그렇고 모든 재난에는 현장에서의 사전 경고음이 있다. 학자면서도 재난 발생 현장을 매일 같이 가는 이유”라며 “재난의 정치화를 멈추고 현장에서의 공익제보를 들으며 재난을 2중, 3중으로 사전에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천권필 기자, 정상원 인턴기자 feeli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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