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쏟아지는 규제 폭탄에…K배터리 비명
공급망 실사 등 거쳐야 판매
10월부터는 역외보조금 신고
CRMA·NZIA 등 규제 첩첩
북미 등 다른 지역 뒤따를 수도
유럽연합(EU)이 이르면 이달 말 배터리법을 관보에 게재하고 본격적으로 배터리 규제를 시작한다. 10월부터는 역외 보조금 규제(FSR)를 통해 글로벌 기업들에 대한 보조금 지급 통제에 나설 예정이다. 앞서 지난 3월 초안이 공개된 핵심원자재법(CRMA) 등과 더불어 국내 배터리 산업의 위기 요인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유럽에서 시작된 배터리 산업에 대한 광범위한 규제가 북미 등 다른 나라로 확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크리스토퍼 베스 주한 EU 대표부 무역부문 대표는 지난 26일 한국배터리산업협회와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코트라)가 공동 주최한 ‘EU배터리 정책기업활용세미나’에 참석해 “EU 의회가 지난 10일 채택한 새로운 배터리 규제가 이달말 혹은 8월초에 유럽연합관보(OJEU)에 공식 게재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 법안은 관보 게재 후 20일부터 발효되며 실제 적용은 6개월후다.
◆”폐배터리 회수, 제조사 책임”
2020년 처음 제안된 EU배터리규제는 전기차 보급 확대와 함께 최근 논의 속도가 빨라졌다. 이 법안은 생산부터 재활용까지 배터리의 전주기를 규제하고 있어 전세계 관련 기업들이 예의주시하고 있다. 법무법인 광장의 박정현 변호사는 “법 위반시 EU내 배터리에서 배터리 판매가 금지되는 것은 물론이며 각국이 따로 정한 규정에 따라 처벌을 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법안은 배터리 기업들이 ▲탄소발자국 신고 ▲폐휴대폰 배터리 수거▲배터리 분리/교체 가능성▲재생원료 사용 최소 기준 설정▲공급망 실사▲QR코드 표시▲배터리 여권 작성 등의 의무를 지도록 하고 있다.
예를 들어 배터리를 최초 판매하는 생산자에게는 폐배터리를 수거하고 구성물질을 회수해야 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 휴대용배터리의 경우 2023년엔 45%, 2027년엔 63%의 구체적 수거 목표를 줬다. 2027년까지 배터리에 들어가는 핵심 원자재중 코발트는 90%, 리튬은 50%를 회수해야 한다.
배터리에 재생 원료를 의무적으로 사용하는 최소 기준도 마련했다. 발효후 96개월(8년) 후부터 구성 물질별로 코발트(16%), 납(85%), 리튬(6%), 니켈(6%) 등 일정 비율로 재생 원료를 사용해야 한다. 이 비중은 점차 늘어날 예정인데, 폐배터리에서 추출된 것만 인정한다.
배터리 제조사 및 수입?유통업체, 폐배터리 처리 및 재활용업체 등은 코발트, 흑연, 리튬, 니켈 등 주요 원자재에 대한 공급망 실사를 받아야 한다. 공급망 실사는 환경뿐 아니라 노동, 인권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다뤄질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아동 노동력을 이용해 채굴한 코발트의 경우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를 위해 EU는 별도의 인증기관을 둘 예정이다.
배터리 제조사들은 QR코드를 통해 구성, 용량, 내구성 등 주요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특히 2킬로와트시(kWh) 용량을 초과하는 배터리의 경우에는 기술적 세부사항 뿐 아니라 재생원료 사용 비율, 탄소발자국 등을 기록한 ‘배터리 여권(battery passport)을 도입해야 한다.
EU 배터리 규제는 겉으로는 배터리 생산 과정에서 나오는 폐기물을 줄여 환경을 보호하겠다는 취지지만 실질적으로는 비관세 장벽으로 작용할 공산이 크다. 한국?중국?일본 3개국이 전기차에 들어가는 리튬이온 배터리 산업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규제는 시장 확대의 걸림돌이 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中 겨냥 보조금규제, 韓 기업 된서리
EU가 지난 12일 선보인 역외보조금규정(FSR)은 대표적으로 중국을 타깃으로 한 규제로 평가된다.
이 법안은 글로벌 기업들이 EU 이외의 지역에서 받은 정부 보조금을 신고하도록 함으로써 EU 회원국 기업들이 역차별 받지 않고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겠다는 취지로 마련됐다.
이미 자국 정부로부터 막대한 보조금을 받고 있는 중국 기업들이 EU에서 추가로 보조금을 받아 시장이 왜곡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 주목적이다. 하지만 법안이 특정 국가만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한국 등 다른 나라들 역시 직접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이 법안에 따라 EU내에서 인수합병(M&A)하거나 공공조달 시장에 참여하려는 글로벌 기업들은 최근 3년간 EU 밖에서 받은 보조금을 사전에 신고해야 한다. 예를 들어 EU 매출액이 5억 유로 이상인 기업이 M&A를 할 경우 최근 3년간 역외 보조금이 5000만 유로 이상이라면 사전 신고해야 한다. 신고 의무는 오는 10월12일부터 적용된다.
보조금을 지급받은 글로벌 기업이 EU 시장의 경쟁을 왜곡하고 있다고 의심되는 경우에는 사후에라도 직권 조사 대상이 될 수 있다.
문제는 역외 보조금 신고의 대상이 해당 기업뿐 아니라 그 기업이 속한 그룹사 전체라는 점이다. 이를테면 삼성SDI가 유럽 자동차 업체와 합작해 현지에 신규 공장을 설립하려는 경우에는 삼성전자가 미국 텍사스주에서 반도체 공장을 지으면서 받은 보조금 내역까지 신고해야 한다.
신고해야 할 보조금의 방식도 광범위하다. 중앙 및 지방정부가 지급하는 보조금뿐 아니라 공공기관 성격의 단체가 지급하는 것도 보조금으로 간주될 수 있다. 산업은행, 수출입은행 등 국책은행과 한국무역보험공사가 이에 해당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이 법안이 최근 유럽 투자를 확대하고 있는 국내 배터리 기업들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법무법인 태평양의 김현아 변호사는 “역외보조금규제는 당초 중국의 겨냥해 발의한 것이지만 적용 대상이 중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어서 우리나라 기업에도 적용될 예정”이라며 “반도체, 에너지, 철강, 조선, 항공 등이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EU는 이밖에 지난 3월 16일 유럽판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이라고 불리는 핵심원자재법(CRMA) 초안을 공개했다. 이 법은 중국 등 특정국가에 대한 전략?핵심 원자재 의존을 줄이기 위해 마련됐다.
EU는 2030년까지 전략 원자재 수요량 대비 채굴의 10%, 가공 40%, 재활용 15%까지 역내에서 생산할 수 있도록 역량을 확대한다는 목표다. 같은 기간 특정 국가에 대한 개별 원자재 수입 의존도를 연간 65%를 넘지 않도록 수입처를 다변화할 계획이다.
CRMA 초안은 미국의 IRA와는 달리 자국산 사용?조달 요건이나 외국산에 대한 명시적 차별을 담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향후 하위 법령에 따라 얼마든지 한국기업들에 타격을 줄 수 있는 내용이 들어있다.
EU가 지난 3월 공개한 탄소중립산업법(NZIA)은 2030년까지 배터리를 포함한 8대 탄소중립전략산업 수요의 40% 이상을 EU 역내에서 생산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10월부터는 탄소국경조정제도(CBAM)에 의해 한국 기업들은 유럽에 제품을 수출할 때 탄소배출량을 의무보고해야 한다.
이와 별개로 유럽화학물질청(ECHA)은 반도체, 리튬이온배터리 등에 사용되는 과불화화합물(PFAS)에 대한 규제를 추진하고 있다. 과불화화합물은 탄소와 불소가 결합한 매우 안정적인 유기화합물로 물이나 기름이 스며드는 것을 방지하는 특성이 있어 산업계 전반에 활용된다. ECHA는 지난 3월 과불화화합물 제한보고서를 제안했으며 오는 9월까지 이해관계자 의견을 접수하고 있다.
◆”韓기업 기회 될 수도”
전문가들은 EU가 동시다발적으로 선보이고 있는 각종 환경 규제를 다른 국가들이 뒤따라 도입할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반면 EU의 전방위 규제를 기회로 활용해야 한다는 지적도 없지 않다. EU의 규제가 주로 중국을 겨냥하고 있다 보니 한국 기업에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각국이 배터리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보조금 경쟁을 벌이고 있는 것도 한국 기업들에는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폐배터리 재활용 기술 기업에는 EU의 환경 규제가 오히려 기회요인이기도 하다.
EU가 선보인 핵심 원자재 법의 경우 ‘전략 프로젝트’로 지정되면 전폭적인 지원을 받을 수도 있다. 법무법인 화우의 이성범 변호사는 “전략 프로젝트로 지정되면 환경영향평가 절차를 간소화할 수 있으며 자금조달, 선구매(Off-take) 등에서 혜택을 받을 수 있다”며 “한국 기업들이 이를 잘 활용하면 위기를 기회로 삼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강희종 기자 mindl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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