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이 뭐라고, 내가 관둔 이유’ 박차고 나온 청년들
거창한 이유 아니어도…청년들의 ‘퇴사할 결심’
“연봉보단 내 삶이 먼저”
26살 오모씨는 코로나바이러스로 취업이 힘든 시기에 대기업 입사에 성공했다. 또래보다 빠르게 좋은 직장에 취직한 오씨에게 주변의 축하가 쏟아졌다. 취업이라는 큰 문턱을 넘었다는 생각에 오씨 스스로도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취업의 성취감과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는 입사 1년 만에 다니던 직장을 나왔다.
오씨는 회사에서 직원에게 제공하는 다양한 복지 혜택과 수평적인 분위기에는 만족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다니던 회사의 산업이 미래의 시장 경쟁에서 살아남기 어렵다고 판단한 그는 더 유망한 산업을 고민한 끝에 이직을 결정했다. 이직에 성공할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회사에 다니며 면접을 보러 다니는 일이 막막했지만 도전을 감행했다. 결국 그는 원하던 회사에 합격해 미련 없이 사직서를 냈다.
오씨의 입사 동기 송모(24)씨 역시 최근 회사를 나왔다. 송씨는 공모전과 현장실습 등 대학 때부터 꾸준히 쌓은 역량과 관련 있는 직무를 맡길 원했지만 그와 상관없는 직무를 배치받았다. 송씨는 “맡은 업무가 전공과 관련 없는 단순한 업무였다. 신입인 나뿐만 아니라 연차 있는 선임들도 그 업무를 하는 걸 보며 성장 가능성이 없다고 느꼈다”고 했다.
게다가 원칙적으로 부서 이동이 막혀 있어 후에 직무를 옮길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송씨는 특별한 이유 없이 부서 이동을 막는다는 사실을 알고 크게 실망했다. 그는 “직원 배려가 없는 직무 배치와 부서 이동 제한, 같은 직원임에도 유관부서 간에 존재하는 갑을관계 등 사내 문화에 몇 가지 문제가 있었다”며 당시 느꼈던 답답함을 토로했다.
업무에 대한 불만으로 퇴사한 사례는 또 있다. 지난해 2월 황모(28)씨는 IT업계 대기업을 나왔다. 황씨가 속한 부서는 업무가 명확히 정해져 있지 않았다. 그는 성취감 없이 단순한 작업을 반복해야 했다. 부서 사정으로 중요한 프로젝트를 맡을 기회마저 사라지자 황씨는 퇴사를 결심했다. 그는 1년의 휴식기를 가진 뒤 타 대기업 취업에 성공했다.
황씨는 “가고자 하는 방향이 명확하다면 충분히 퇴사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다만 섣부르게 생각하지 말고 퇴사 이유를 진지하게 고민한 후 앞으로의 계획을 명확히 세워야 한다고 당부했다.
‘대기업을 스스로 그만뒀을 때 주위의 걱정이나 반대는 없었냐’는 물음에 취재원들은 “응원만 있을 뿐 반대는 없었다”고 단호히 말했다.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사라지는 분위기에서 이직은 대수롭지 않아 한다는 답변이 다수였다. 내심 이직에 실패할까 걱정은 했지만, 퇴사 결정을 후회한 적은 없다고 했다.
조모(35)씨는 콘텐츠업계 대기업을 나와 화장품 브랜드 창업을 준비 중이다. 그는 전 직장에서 편성 PD로 일했다. 콘텐츠 제작에 참여할 수 있길 기대했지만 연차가 쌓여도 주어진 업무는 시청률과 편성표 보고의 반복이었다. 제작 업무의 꿈을 놓지 못했던 그는 끝내 창업을 결심했다.
조씨는 퇴사 후 배운 수제 비누 제조에 흥미를 느껴 비누 공방과 비누 브랜드를 열었다. 지역 행사에 참여해 시민들에게 수제비누의 매력을 알리기도 했다.
물론 사업가로서의 삶은 쉽지 않았다. 퇴사와 동시에 안정적인 직장이 주는 안정감과 편리함은 포기해야 했다. 조씨는 “지인들은 계속해서 회사에 다녀 경제적으로 안정된 상태였다. 나도 모르게 위축돼 한동안 지인들을 만나지 않은 적도 있다”고 전했다.
그는 삶의 방향성을 잃을 때마다 스스로 ‘나는 왜 퇴사했는가’라고 묻곤 했다. 답은 늘 같았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상품을 만드는 기획자이자 제작자가 그의 꿈이었다.
조씨는 꾸준히 작은 성취를 쌓아 왔다. 인스타그램과 유튜브로 사람들과 소통하며 예비 고객들을 확보하고 자신을 알렸다. 그는 “비누 제작 경험을 살려 올해 안에 브랜드를 만들어 성장시키고 싶다”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청년들의 과감한 퇴사는 국경을 가리지 않는다. 체코인 A씨는 최근 한 글로벌 대기업을 퇴사했다. 그가 회사의 명성, 국제적 규모, 복지 혜택을 포기한 이유는 여행이었다.
A씨는 대학 졸업 후 여행을 꿈꿨다. 그러나 코로나바이러스 유행으로 인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일을 시작한 후에도 여행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다. 결국 그는 회사를 나왔다. A씨는 “처음 퇴사를 결심했을 때 부모님은 힘들게 공부해 들어간 좋은 직장을 왜 관두냐며 이해하지 못했다”고 했다. 반면 친구들은 용기 있는 선택이라며 그를 응원했다.
A씨는 작년부터 올해까지 6개월간 한국을 여행했다. 여행 기간엔 호스텔 아르바이트와 영어회화 봉사를 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그는 “한국의 분위기, 흥미로운 사람들, 풍부한 문화에 빠져 살았다”며 추억을 떠올렸다.
여행 후 그는 회사에 대해 새로운 정의를 내릴 수 있었다. 그는 더이상 삶의 성취를 업무 성과에서 찾지 않는다. A씨는 “일과 삶의 균형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됐다”며 “사회는 대기업의 명성을 과하게 강조한다. 그러나 개인의 삶은 회사가 직원들에게 제공하는 삶의 질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고 했다.
청년들은 진정한 삶을 꾸리기 위해 회사를 떠난다. 고려대학교 공공사회학과 김근태 교수는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대학진학률이 80%가 넘는 세상이다. 젊은 세대는 교육에 쏟은 노력에 걸맞는 보상을 원한다. 또한 유망 산업과 직업 형태가 빠르게 변하고 있어 청년의 잦은 퇴사와 이직이 더 늘어날 것”이라고 했다.
고해람·정고운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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