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기영 기자의 안녕, 나사로] 공감의 출발점은 역지사지
나는 초등학생 남매를 키우는 학부모다. 아내는 현직 초등학교 교사이고 형수와 처형이 고등학교 교사이며 누나는 교직원으로 근무 중이다. 이 외에도 유치원부터 초중고 교육 현장에 몸담고 있는 지인들을 열 손가락으로 꼽으면 셀 수 없을 정도다. 부모님은 퇴임 전까지 40년 가까이 교편을 잡으셨다. 삶을 반추해보면 나는 날 때부터 교육계 종사자의 손에 양육을 받으며 학창 시절을 보냈고 교사와 가정을 꾸린 뒤 초등 자녀를 양육하고 있는 셈이다.
스스로 개인 신상을 털어가면서까지 글 문을 연 배경은 학부모로서 그 어느 시기보다 복잡다단한 심경으로 나날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교육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은 가히 충격적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충격적인 건 부모들의 반응이다. 서울 서초구 서이초 등굣길에 줄지어 놓인 추모 화환을 두고 ‘어른들의 급한 슬픔으로 아이들의 생활 공간을 덮지 말라’는 학부모 글은 논란 끝에 삭제됐다. 안타까운 죽음을 애도하는 이미지를 카카오톡 프로필로 띄워둔 교사는 학부모로부터 ‘아이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며 당혹감을 호소했다. 도덕적 감수성의 결여가 낳은 연쇄 참사다.
애덤 스미스(1723~1790)는 역작 ‘국부론’(1776)을 쓰기 전 ‘도덕 감정론’(1759)에서 “도덕적 감수성은 고통받는 자와 처지를 바꿔볼 수 있는 정신 능력에서 나온다”고 했다. 안으로 들어가서 느끼는 것을 뜻하는 공감(共感)은 처지를 바꿔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다른 이의 처지를 헤아리기보다 내가 처한 상황과 득실을 따지는 게 우선하는 순간, 공감은 도달하기에 너무 먼 목적지가 될 수밖에 없다.
초등학생 시절, 방과 후 놀이터에서 흙먼지 투성으로 놀다 해 질 무렵 집에 들어오면 거실에 교복 입은 ‘형아’들이 싹싹 비워진 짜장면 그릇을 옆에 둔 채 수학 문제를 풀고 있었다. 엄마한테 ‘끌려온’ 학생들이었다.
하교 시간을 훌쩍 넘긴 시각에 학생들이 자기 집도, 학원도 아닌 담임 선생님 집에서 문제집과 씨름하고 있게 된 연유는 무엇일까. 단골처럼 우리 집을 찾았던 형아와 같이 짜장면을 먹으며 얘길 나누다 궁금증이 풀렸다.
수학 교사였던 엄마 반 학생들에겐 시간표에는 없는 수업이 있었다. 수업은 종례 시간, 학습 목표는 영어 교과서 본문 암송하기와 수학 단원 문제 풀기였다. ‘수학 선생님이 영어는 왜’라는 의문도 쉽게 풀렸다. ‘to 부정사’ ‘have+pp’만 들어도 머리에 쥐가 났던 학생에게도 담임으로서 희망을 주고 싶었던 거였다. 물론 교과서 본문만 달달 외워도 기말고사 고득점을 노려볼 수 있었던 시절 얘기다.
누군가에겐 종례와 함께 5~10분 만에 끝나는 수업이었지만 몇몇에겐 그렇지 못했다. 암송과 문제 풀이를 통과하지 못한 학생들은 친구들과 짧은 이별을 고한 채 교실 청소에 나섰다. 청소 후 이어지는 2차 테스트, 여기서도 관문을 넘지 못한 학생들은 3차 테스트를 위해 학교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선생님 집으로 향했다. 교사이자 5남매를 키우는 엄마로서는 제자 교육과 자식들 끼니 준비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고육책이었을 것이다.
이 장면을 그대로 2023년으로 옮겨놓는다면 어떨까. 반인권적 교육 행태를 일삼는 교사로 낙인찍히고, ‘내 아이 기를 죽여 정서적으로 학대했다’는 학부모 민원에 몸살을 앓게 될지 모른다. 다시 시간을 돌려보자. 3차 테스트를 마치고 짜장면을 먹던 형아들 옆에서 엄마는 자주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상대는 형아들의 엄마들이다. 수화기 너머 들리는 희미한 목소리도,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에도 따뜻함이 느껴졌다. “미안하다”와 “감사하다”를 서로 주고받는 대화가 이어지다 보면 결국 두 화자는 교사와 학부모가 아니라 엄마와 엄마로 만났다. 서로의 처지가 공감이란 다리로 만나는 순간이다.
지난 25일 강남서초교육지원청에 마련된 추모 공간을 찾았다. 따가운 햇살 아래 가지런히 도열한 조화와 국화꽃 향기가 추모객들을 맞았다. 추모객들이 손글씨로 남긴 형형색색의 메모지에는 저마다의 처지에서 한 계단 내려와 고인의 처지를 애도하는 사연들이 더운 바람에 나부꼈다.
성경은 말한다.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빌 2:3~5)이라고 말이다. 진실을 밝히고 제도를 정비하며 보편적 정의를 구현하는 일은 사회를 바르게 구축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인간의 불완전성이 초래하는 수많은 사각지대를 메울 수 있는 건 처지에 대한 공감이다.
글·사진=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아시아發 부흥 전 세계로… 향후 10년간 大부흥기 올 것” - 더미션
- 6·25 와중에도 지켰는데… 여가·취미에 발목 잡혀 멀어지는 주일 성수 - 더미션
- 성 니콜라스·성공회 성당 거닐며 ‘도심속 영성’을 만나다 - 더미션
- 죽음 앞둔 선교사의 ‘고별예배’… 축복과 감사가 넘쳤다 - 더미션
- 셔우드 홀 결핵 퇴치 첫발 뗀 곳은… 화진포 김일성 별장이었다 - 더미션
- “이단 몰리는 과천 못 참아” 지역 4곳 기독교연합회가 나섰다 - 더미션
- 셀린 송 감독 “‘기생충’ 덕분에 한국적 영화 전세계에 받아들여져”
- “태아 살리는 일은 모두의 몫, 생명 존중 문화부터”
- ‘2024 설 가정예배’ 키워드는 ‘믿음의 가정과 감사’
- 내년 의대 정원 2천명 늘린다…27년 만에 이뤄진 증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