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춘부였던 엄마, 이 글은 불행한 개인사가 아니다

윤일희 2023. 7. 28. 21:09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서평] 그레이스 M. 조 지음 <전쟁 같은 맛>

[윤일희 기자]

비가 무섭게 때리던 지난 토요일 부고를 받았다. 파주 기지촌 생존자였던 한 분이 임종했다는 소식이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빈소를 찾았다. 장례식장 로비에 들어서자 고인의 영정사진과 빈소를 안내하는 알림판이 보였다. 알림판엔 한국 이름 대신 기지촌에서 불렸던 영어 이름이 쓰여 있었다. 이른 조문이었는지 조문객은 없었다.

한때 고인도 '전쟁신부(War Bride)'를 꿈꾸었을지 모르겠다. 다른 삶을 갈구하는 많은 기지촌 여성들의 희망이었으니까. 이런 여성들의 꿈과 달리 '전쟁신부'와 'GI베이비'는 "양부인과 혼혈아동의 존재를 사회적 위기로 여긴" 당시 정부가 단일민족국가 신화를 지키려는 기획으로 진행되었다.

도미한 기지촌 여성들의 삶을 기록한 <기지촌의 그늘을 넘어>에 따르면, 1950년부터 미국에 도착한 신부들은 약 십만 명에 이른다. 이들은 한국의 고난을 피해 미국에 도착했지만, 곧 "새로운 곤경들, 가난, 성차별, 인종 차별, 이혼, 심한 외로움"등을 직면하게 된다.

군자씨에게 김치는
 
 그레이스 M. 조 지음 <전쟁 같은 맛> 겉표지.
ⓒ 글항아리
 
<전쟁 같은 맛>을 쓴 뉴욕 시립 스태튼아일랜드대학 교수인 그레이스 M. 조의 엄마인 군자씨도 이 행렬에 선 신부 중 한 사람이었다. 조 교수가 엄마의 과거를 알게 된 것은 성인이 되고 한참 지나서다. 어릴 때 학교에서 한 아이가 "너희 엄마 전쟁 신부였어?"라는 물음을 듣고 부모에게 묻자 얼버무리는 게 께름했지만, 엄마의 역사를 파고들기엔 어렸다.

엄마는 당시 이민자나 아시아인이 단 한 명도 없던 마을에 정착하면서부터 백인 주류 문화에 압도당했다. 마을의 유일한 이민자이자 한인이었던 이들 가족의 삶 자체가 '마을의 스캔들'일 정도로 만인의 눈초리를 받았기 때문이다. 미국 사회는 이민자의 고유한 정체성 따위는 무시했고, 당연한 듯 동화를 강요하며 제대로 된 미국인이 되는지 감시했다.

억압이 부당했지만 군자씨는 드러내지 않았다. 백인 문화에 적극적으로 동화되는 척 위장했는데, 이는 대부분의 '전쟁신부'들이 취한 '저자세 저항' 전략이었다(출처 <기지촌의 그늘을 넘어>). 남편이나 미국 주류 문화에 순응하는 자세를 보여 안심시키는 한편, 한국인의 문화와 정체성을 집요하게 유지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주로 음식으로 표출되었다. 군자씨도 그랬다. 빠르게 익힌 요리로 솜씨 좋게 미국식 식탁을 푸짐하게 차려내면서도, 한국 음식 특히 김치를 빼놓지 않고 식탁에 두었다. 군자씨 스타일 퓨전 메뉴와 한국인의 음식 정서인 "원 스푼 노 러브"(한번 주면 정 없다)로 식구들을 먹였다. 그에게 음식은 존재 증명이었고 희망이었다.

군자씨는 고군분투했다. 자신의 과거를 상쇄하는 일은 아이들을 성공시키는 일이라 믿었다. 야간 근무하는 직장(좋은 직장에 한국 이민 여성이 취업하기는 불가능했다)을 11년간 다녔다. 고된 노동 후에도 들로 나가 블랙베리와 버섯 등을 채취해 이를 팔아 수입을 올렸다.

하루에 고작 서너 시간 자면서도 아이들의 끼니엔 언제나 정성이었다. 바삐 살면서도 동네에 나타난 한국인 입양아에게 김치를 먹여 영혼을 달래주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조현병에 걸린 군자씨

열심이던 군자씨에게 위기가 닥쳤다. 조 교수가 열다섯, 군자 씨가 마흔다섯이던 1986년, 군자씨가 이상해졌다. 어느 날부터 그렇게 열심이던 채집을 그만두고 집안에 틀어박혔고, "이 동네 사람들이 다 나를 노리고 있어"라며 편집증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미쳐가고 있었다. 혼잣말을 끊임없이 했다. 그에게만 말을 거는 '오키(옥희)'와 나누는 대화였다. 그의 삶에 지속적으로 개입하며 끊임없이 말을 거는 '오키'는 누구이고 왜 나타나기 시작한 걸까.

총명했던 조 교수는 심리학 책을 몇 권 독파한 후 그의 증상을 조현병으로 확신하게 된다. 하지만 조현병에 관한 책은 그의 병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다. 주류 정신의학이 주장하는 조현병 청소년기 유전학적 발병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조현병 발발이 가족력 때문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고, 이 기준으로는 당시 45세였던 군자씨에게 조현병이라는 진단을 붙일 수 없었다.

또한 조현병의 원인이 단지 유전학적이라면 사회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뜻인데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는 엄마의 광기를 이해하고 싶었다. 엄마의 병증에 호전이 없던 어느 날 그는 올케로부터 "어머님이 매춘을 하셨었어요"라는 말을 전해 듣는다. 충격이었다.

엄마가 매춘부였다는 과거는 그를 분열시켰다. 그러다 과거의 기억 속에 호명되었던 '전쟁신부'가 떠올랐다. 젊고 아름다운 엄마에 비해 터무니없이 늙은 아버지와의 결혼 그리고 기억 한 편에 묻어두었던 아버지의 아내 폭력도 끄집어 올려졌다. 아버지와의 결혼에서 낳은 아이가 아닌 혼혈이었던 오빠의 존재와 어릴 적 동네의 수군거림과 엄마의 조바심, 이 모든 과거가 엄마의 조현병과 무관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엄마의 역사와 조현병과의 연관성을 좇던 조 교수는 군자씨의 생애가 그저 불행한 한 개인사가 아님을 자각하게 된다. 군자씨는 식민지 시기 일본에 징용으로 끌려갔던 부모의 딸로 일본에서 태어나 해방 후 네 살에 귀국했다. 이은 전쟁으로 오빠와 아버지를 잃었다. 전쟁 통에 가족과 헤어지게 된 그는 어린 난민이 되어 혼자 집에 돌아왔다.

그때 그를 살게 한 건 그의 엄마가 마당에 묻어 둔 김치와 찬장에 조금 남겨진 쌀이었다. "김치 덕에 계절이 세 번 지나도록 살아 있었어. 김치 없었으면 죽었을지도 몰라." 군자씨가 미국에서 끊임없이 김치를 담가먹었던 건 김치가 그의 몸과 영혼 모두를 살린 음식이었기 때문이었다.

전쟁 후 돈이 도는 곳은 기지촌이었다. 아버지와 오빠를 잃고 남은 가족은 먹고 살 길이 막막했으리라. 엄마는 그렇게 부산 기지촌에 발을 들였을 것이다. 그곳에서 당시 선원이었던 나이 많은 아버지를 만나 미국에 도착하며 아메리칸드림을 이루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희망의 땅에서 그는 광인이 되고 말았다.

조 교수는 엄마의 조현병의 한 발원지로 셔헤일리스 그린힐 소년원을 주목하게 된다. 그가 조현병을 얻기 전 11년간 밤에 일했던 그곳에서 무수한 (성)폭력이 일어났다는 충격적인 보도가 잇따랐기 때문이다. 그가 종종 혼잣말로 했던 "그린힐에 있는 나쁜 사람들"의 정체가 드러난 것이다.

무수한 범죄의 현장을 목격했을지도, 범죄 가담이나 침묵을 강요당했을지도, 혹은 성폭력을 당했을 지도 모르는 경험은 "기지촌에서의 과거, 그리고 일본 식민주의 및 군사화된 성노예제와 얽힌 흐릿한 과거와 엉켜" 조현병 발발에 영향을 미쳤을 거라 추측하게 했다.

정의 회복을 위해 딸이 쓴 글

조현병은 군자씨를 은둔시켰다. '오키'와 대화하며 종일 방 밖을 나서지 않았다. 그에게 밖은 위험한 곳이기 때문이다. 김치와 밥으로 굶어죽지 않을 만큼만 먹던 식사마저 거부하기에 이르자 조 교수는 엄마를 위해 요리를 시작한다. 엄마를 살려야 했기 때문이다.

생전 처음 해보는 한국 요리를 엄마의 지시대로 만들어 엄마와 함께 먹으며 모녀는 서서히 뭔가를 회복하고 있었다. 백미는 생태찌개였다. 할머니 식으로 끓인 생태찌개는 할머니와 고향에 대한 기억을 불러오기도 놓아주기도 하는 치료제였다. 그렇게 조금씩 회복하던 엄마가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한줌의 재로 남은 엄마의 죽음을 인정하기는 어려웠다. 애도와 위로를 얻기 위해 조 교수는 김치를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엄마에 관해 쓰기 시작했다. 엄마는 미국에 와 버려져 광인이나 홈리스가 되어 도시를 떠돈 '전쟁신부'들에 비하면 극단적으로 불행한 경우는 아니었지만, 그는 "어머니와 닮은 사람들을 기리고 애도하는데 실패한 한미 사회에 대한 정의 회복 프로젝트"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 책은 그 결과물이다. 엄마와 같은 삶의 인정투쟁으로, 목소리를 잃은 사람의 언어를 회복시키는 일환으로, 마침내 개인사를 거시사로 조망해내 사회적 기억으로 각인하기 위해 쓰고 또 썼다. '전쟁 같은 맛'이라는 이 책의 제목은 어떤 맛은 '통각'임을 깨닫게 한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 게시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