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보통의 사람들'의 '사소한' 기억이 주는 울림

정경윤 2023. 7. 2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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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복 같은 소리 : 투명한 노동자들의 노필터 일 이야기> 편집자의 소회

[정경윤]

"일반 파스는 냄새도 나거니와 오늘처럼 탕수육을 하는 날엔 화끈거리는 파스가 튀김 열기를 몇 배로 되돌려주기 때문이다."

불에 덴 듯한 파스의 느낌. 신문을 들추다 우연히 읽게 된, 급식실에서는 허 리 아플 때 왜 동전 파스만 붙이는지에 관한 급식실 노동자 권윤숙 님의 숨 막히는 문장이 내게는 이 책의 시작이었다. 부랴부랴 글의 출처를 찾다가 비정규 노동 수기 공모전이 매년 열리고 있었고, 10년 넘게 이어져 왔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몇 년째 사그라들 줄 모르는 '업세이' 열풍을 보면서, 굼뜬 편집자인 주제에 "이제 더 나올 직업도 없을 거 같다"고 괜히 너스레를 떨곤 했다(물론 내 말은 틀렸다). '업세이'란 '직업'과 '에세이'를 합친 말이다. 독자들의 사랑을 받은 '업세이'들을 보면, 직업적으로 뛰어난 성취를 이루었거나 세련된 글솜씨를 갖춘 작가들의 책만 있진 않다.

청소부, 도배사, 경찰, 소방관, 경비원 등 성실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투박하고 생생한 이야기 자체가 많은 독자를 매혹한 것이다. 여러 1인 미디어가 발달하고 글쓰기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전반적 흐름도 한몫했을 것이다.

새로운 책이 나올 때마다 '아니 이 편집자(출판사)는 어떻게 이런 작가를(글을) 찾은 거지(나는 못 찾았는데)?' 하는 놀라움과 부러움, '이렇게 재미있고 훌륭한 책들이 이미 넘치는데 내가 더 보탤 게 있을까?' 하는 게으른 생각을 오가던 무렵, 비정규 노동 수기를 만났다.

권윤숙 님의 글을 읽고 또 다른 수기들을 몇 편 읽은 뒤, 그때까지 당연하고 완벽해 보이던 업세이 열풍에 뭔가 빠져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업세이'가 각광받는 이유가 '보통 사람들이 들려주는 보통의 이야기'라는 점에 있다면, 이때 '보통'은 누구를, 어떤 이야기를 가리키는가? '보통'은 각자가 편한 대로 갖다 붙일 수 있는 단어가 아닐까? 그렇다면 누구나 동의할 만한 '보통'의 기준을 하나 정해볼까?

좀 일차원적이지만, '다수'를 기준으로 하면 비정규 노동의 이야기야말로 가장 '보통'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지 않나? 그런데도 "왜 곡기를 끊어야 했는지, 굴뚝에 올라가기 전엔 어떻게 살고 있었는지"에 관한 이야기는 놀라울 정도로 적었다. '보통'과 가장 멀리 떨어진 듯한, 굴 뚝에 오른 이후의 이야기만 있을 뿐.

여전히 진행형인 이야기를 마주하다

<일복 같은 소리> 편집을 시작하면서 처음 염두에 둔 형식은 '직업 사전'이었다. 책이 단순한 수기 모음집으로 비치지 않도록 하고 싶었다. 나는 다양한 비정규 노동의 이야기를 날것 그대로 전달한다는 이 책의 콘셉트가 장점인 동시에 단점이 될 수 있다고 봤는데, 수십 편의 글을 한 권으로 묶으면 책으로서는 자칫 산만해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아무리 "이 책은 여러분들 모두의 보통 이야기니 읽으시죠" 하고 소개해도, 독자들이 내심 '슬픈 책'으로 여기고 집어 들기 망설일까 봐 걱정이 됐다. 억지로 밝게 포장할 필요도 없지만, '보통 사람들의 일 이야기'가 슬퍼 보일 이유도 없다. 그럴 바엔 차라리 신랄해 보였으면 했다. 그래서 다소 엉뚱한 느낌을 무릅쓰고 사전 형식을 빌려 '보편'의 느낌을 담고 싶었다.

또 내용을 티저처럼 보여주는 소제목을 붙이는 대신, 사전의 표제처럼 '장소'를 붙여 독자들의 궁금증을 유발하고자 했다. 비정규 노동은 카페, 도서관, 학교 등 익숙한 일상 공간에서 펼쳐지는 경우가 많아서 장소로만 구성된 건조한 목차도 그 자체로 하나의 메시지가 될 수 있다고 봤다.

'사전'이 되려면 직업이 겹치지 않아야 했다. 그래서 글이 아무리 수려해도 동일한 직업일 경우 한 편만 골라야 해 무척 난감했다. 더 큰 문제는 시간차였다. 최대한 다양한 비정규직을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추다 보니 오래된 글들을 상당수 포함하게 되었는데, 시간차가 클수록 글 속에 묘사된 현실과 오늘날의 현실이 다를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최저임금이 얼마라는 식으로 언급되거나 당시 진행 중이던 투쟁 상황이 설명된 경우, 2023년의 이야기가 아님을 독자들에게 알릴 필요가 있었다. 고민 끝에 글이 발표(작성)된 연도를 저자명과 함께 표기했고, 언론에 보도된 사건들은 이후 기사들을 통해 상황을 확인해서 각주로 부연하거나, 저자께 간단한 내용 추가를 요청드렸다. 그런데 막상 확인해보니 이런 걱정이 무색할 만큼 여전히 진행형인 이야기도 많았고, 그럴 때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멍해졌다. 이런 과정을 몇 번 반복하다 보니 책이 나왔다. 여기까지가 이 책을 어떻게 만들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몸에 새겨진 노동의 기억

책의 시작에 관해 말하면서 숨긴 것이 하나 있다. 실은 작업 내내 나는 누구보다 나에 대해 생각했다. 스무 살 때부터 쭉 이어졌던 노동의 기억들이 계속 떠올랐기 때문이다. '카페' 이야기를 읽을 땐 화장실 한 번 가기가 쉽지 않았고 빨간 립스틱이 필수였던 패밀리 레스토랑 아르바이트가 생각났다.

'대학교'와 '학교 도서관' 편에서는 내가 근로장학생으로 불렸던 대학 도서관이 눈앞에 펼쳐졌다. 나를 포함한 아르바이트생들과 비슷한 또래라 친하게 지냈던 한 비정규직 사서 선생님을 두고, (학교 관행상) 절대 정규직이 될 수 없을 거라고 내게 몰래 귀띔하던 정규직 사서 선생님의 말에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콜센터' 이야기에서는 졸업 후 취업을 준비하며 다녔던 곳이 떠올랐다. 글에서 묘사된 꼭 그대로였다. 화장실을 가거나 뭔가를 먹기도 어려웠고, 하루 5시간이었지만 워낙 고강도여서 퇴근 뒤 멍해진 채로 몇 시간을 날렸다. 그런데도 나는 왜 일을 빨리 못하는지, 끝나고 왜 곧장 공부 모드로 전환하지 못하는지 자책하기 바빴다.

"멀게만 느껴지는 비정규 노동의 '문제'를 가까운 '이야기'로 전달하겠다.".

편집을 시작하면서 내세웠던 이 거창한 포부는 나와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원고를 읽으며 예전 기억들이 떠오를 때면 그 정도는 별것도 아니지, 너무 오래된 일이니까 하면서 계속 손사래 쳤던 것 같다. 그러나 노동은 몸에 새겨진 기억이기 때문인지 내 의지와 상관없이 계속 생각이 났다. 그렇게 애초 이 원고에 마음을 주게 만든 것이 분명한 그 시간들을 대면했고,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위로받았다. 그러니 앞으로도 '가장 보통의 사람들'이 각자의 '사소한' 기억들을 꺼내주었으면 좋겠다. 그 기억들이 모여 가장 보통의 이야기가 되고, 가장 강력한 이야기가 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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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정경윤 <일복 같은 소리> 편집자가 쓴 글이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에서 발행하는 격월간 <비정규노동> 7,8월호 특집 꼭지에도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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