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병식 연설 안한 김정은, 중·러 대표 옆에 있어 부담스러웠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7일 열린 소위 '전승절'(한국의 6·25전쟁 정전협정 기념일) 70주년 기념 열병식에 참석했으나, 연설 등을 통한 메시지 발신은 하지 않았다. 핵보유국인 중국과 러시아의 대표단을 옆에 세워 놓고 자신의 입으로 핵보유국 지위를 주장하기엔 외교적으로 부담스러웠던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신냉전 틈새 파고든 김정은
북한이 이번 전승절 기념을 중·러 대표단과 친선 행사 위주의 정치 행사로 진행했다는 평가도 그래서 나온다.
정대진 원주 한라대 교수는 "북한은 유엔 안보리의 대북 제재가 작동하지 않는 신냉전 구도의 틈새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전략무기를 개발하고,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주도권을 확보해 미국과의 핵 담판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려는 의도"라고 말했다.
실제 김정은은 주석단에서 왼쪽에 리훙중(李鴻忠)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상무위원회 부위원장(국회부의장 격)을, 오른쪽에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 세운 채 열병대열의 사열을 함께 받아 예우를 갖췄다.
그러나 연설은 한국의 국방장관 격에 해당하는 강순남 국방상이 맡았다. 지난 2월 열병식 연설도 건너뛴 김정은이 이번에는 직접 마이크를 잡을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서다.
강순남은 연설에서 "우리의 무력행사가 미국과 '대한민국'에 한해서는 방위권 범위를 초월하게 될 것"이라며 "핵전쟁이 일어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누가 언제 어떻게 일으키는가 하는 것이 문제"라고 밝혔다. 높은 수위의 발언이었지만, 김정은 육성 연설보다 상대적으로 무게감이 떨어진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평가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기본적으로 군 관련 행사라는 점에서 군부 책임자인 국방상이 연설하도록 했지만, 대외 메시지를 많이 절제한 느낌"이라며 "전날 무기전시회에서 전략무기를 대거 공개하며 위협 수위를 충분히 끌어올린 만큼 열병식은 차분하게 진행하면서 상황을 관리하려는 의도로 보인다"고 말했다.
절제된 행사…중·러 의식했나
이처럼 김정은이 육성 메시지 발신을 자제한 것도 중·러를 고려한 것일 수 있다. 북·중·러 연대가 강하다지만, 지구상에 5개국밖에 되지 않는 합법적 핵 보유국인 중·러 대표단을 바로 옆에 앉혀 놓고 자신들이 불법적으로 개발해온 핵무기의 정당성을 대놓고 강조하기에는 부담스러웠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 중·러가 아무리 국제사회에서 북한의 뒷배를 자처한다고 해도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를 존중하는 이상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는 것은 넘을 수 없는 레드라인이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은 최근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나섰고,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승기를 잡지 못한 러시아 역시 전황에 따라 언제든 미국과의 관계 재설정에 나설 수 있는 상황이다.
녹록잖은 北 현실 반영 가능성
일각에선 김정은의 침묵은 대내외적으로 과시할 수 있는 경제·군사적 성과나 향후 청사진을 제시하기 어려운 현상황을 방증하는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북한은 최근 올해 중점 경제 과업으로 제시한 '12개 고지' 주요 부문에서 상반기 계획을 초과 달성했다고 주장하지만, 전문가들 사이에선 북한이 대북제재와 코로나19로 인한 북·중 교역 중단의 여파로 극심한 경제난을 겪고 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오경섭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북한 체제의 특성상 김정은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면 주변 환경에 대한 고려 없이 연설에 나섰을 텐데, 그만큼 상황이 어렵고 성과도 없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김정은이 향후 이번 열병식을 주요 성과로 내세우며 열병식 참가자들을 격려하는 자리를 마련해 대미·대남 메시지를 발신할 가능성도 있다. 실제 김정은은 지난 2월 8일 열린 북한군 창건 75주년 열병식에서도 연설하지 않았지만, 이튿날 열병식에 참가한 각급 부대의 지휘관과 병사들을 만나 '힘에 의한 제압'을 강조하며 미국을 노렸다.
이번에도 '말폭탄' 대신 전략무기 공개와 열병식을 통해 대내외의 주목도를 끌어올린 뒤 강경 발언으로 위협을 끌어올리는 극적 효과를 노릴 수 있다는 얘기다.
한편 김정은은 26일 쇼이구 장관과 '무장장비전시회-2023'을 둘러본 데 이어 27일에도 당 중앙위원회 본부청사에서 오찬을 함께 하며 북·러 간 '안보협력' 등을 논의했다. 오찬 이후에도 환영 연회를 직접 주관했다.
이와 관련, 통일부는 "러시아 군사대표단을 초청해 국제사회가 우려하는 러·북 군사협력 강화를 노골적으로 과시했다"며 "중국 대표단과는 공연장에서의 김정은 약식 접견 외에는 동반 일정·보도 비중 등의 측면에서 확연한 온도 차를 보였다"고 평가했다.
양국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북한이 쇼이구를 국방장관이 아니라 푸틴의 군사사절로 국빈급 예우를 한 듯 하다"며 "쇼이구의 방북 의도는 무기 제공 의사를 타진하기 위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단순한 외빈이 아닌 '무기 세일즈'를 위한 '바이어'로 대접한 것일 수 있다는 뜻이다.
정영교 기자 chung.yeonggy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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