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승완 감독이 1970년대를 '밀수' 배경으로 삼은 이유
[조영준 기자]
▲ 영화 <밀수> 스틸컷 |
ⓒ (주)NEW |
01.
1970년대 중반, 바닷가 마을 군천에 화학 공장이 들어서며 물질로 살아가던 해녀들이 생계에 어려움을 겪는다. 폐수로 인해 근해가 오염되면서 해산물이 죽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바다에 던져둔 물건을 건져 올리는 일을 제안하며 이들 해녀에게 밀수 브로커(김원해 분)가 접근해 온 것도 그때다. 누군가 바다에 던져놓은 물건을 건져 오기만 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고 한다. 나라에서는 금지하고 있는 일이고 단속도 하고 있다. 물론 혹하는 제안이기도 하다. 특별한 것 없이 원래의 기술로 할 수 있는 일이고 당장 먹고는 살아야 하기도 하니까. 진숙(염정아 분)과 춘자(김혜수 분)를 앞세운 해녀 집단은 제안을 수락한다.
한 번으로 끝났으면 좋았겠지만 손에 쥐어지는 돈의 액수가 늘어갈수록 욕심도 함께 커지기 시작한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했었나. 여느 날과 똑같이 밀수품을 건져내던 해녀들을 세관 계장인 이장춘(김종수 분)이 급습하면서 비극이 시작된다. 선장이던 진숙의 아버지와 동생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고, 작업하던 해녀들은 모두 교도소로 끌려가고. 춘자만이 혼란을 틈 타 탈출에 성공하지만 이후 군천에는 그녀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다. 오래 함께 지내며 친자매와도 같았던 진숙과 춘자 사이에 커다란 유격이 생기며 갈등이 싹을 틔우는 지점이다. 이후 영화는 돌아서게 된 두 사람이 다시 밀수판에서 함께하며 나아가는 이야기를 그린다.
▲ 영화 <밀수> 스틸컷 |
ⓒ (주)NEW |
바로 직전에서 이 영화가 크게 세 번의 변주가 이루어진다고 설명했지만, 더 간단하게 보면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전반부는 진숙과 해녀들이 밀수에 손을 대기 시작한 이후 몰락하고 군천을 떠났던 춘자가 다시 돌아오기까지의 이야기가 해당된다. 이 지점을 이끌어 가는 것은 역시 두 인물이 어떻게 갈등을 일으키고 다시 손을 잡게 되는가 하는 문제다(진정한 의미의 화해는 영화의 종반부에서나 이루어진다). 영화는 후반부 이야기의 뼈대이기도 한 이 지점에 꽤 많은 공을 들인다.
"더 이상 키우지 마. 감당도 못할 거 이고 지다 전부 빠져 죽어."
사실 밀수라는 행위는 해녀 집단의 입장에서 보자면 전복이라는 명확한 대상에서 밀수품이라는 불명확한 대상으로 바뀌는 일에 불과하다. 물질이라는 동일한 행위의 목적이 바뀔 뿐이지만 그로 인해 획득 가능한 부의 차이는 상상 이상으로 크다. 갈등의 중심이 되는 진숙과 춘자의 입장이 서로 다른 것처럼 여겨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가족의 목숨은 물론 재산인 어선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이 행위의 전환에 투자해야 하는 진숙과 달리 춘자는 그저 제 몸 하나만 들이밀 뿐이다. 불편한 마음을 버리기 위해 진숙의 아버지가 밀수를 그만두겠다고 선언했을 때 춘자가 욕심을 부릴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그 때문인지 모른다. 결과적으로 사고로 인해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것은 어느 쪽이었나.
▲ 영화 <밀수> 스틸컷 |
ⓒ (주)NEW |
극의 전반부가 두 사람의 관계에 의해 진행된다면, 후반부에서는 대립하는 주체에 따라 극의 흐름이 바뀌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먼저 대립하는 것은 새로운 밀수 루트를 확보하기 위해 서울에서 내려온 권 상사(조인성 분)와 군천의 새로운 권력이 된 장도리(박정민 분) 일당, 그리고 진숙을 필두로 한 해녀 집단이다.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라 손을 잡기도 하고 배신을 하기도 하는 세 집단의 모습이 후반부의 시작과 함께 놓인다. 군천이라는 공간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두고자 하는 자와 기존에 갖고 있던 자신의 영향력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자, 그 틈 사이에서 어떻게든 다시 살아남고자 하는 이들의 싸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문제는 삼자 대립의 구도 중심에 있는 것이 불법 행위인 밀수라는 것이다. 이 행위의 성격 때문에 다른 집단이 끼어들 여지가 발생하고 영화는 이 자리에 이 계장과 세관 직원들을 밀어 넣는다. 후반부를 이끌어오던 권력관계의 재편이다.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와 함께 등장하는 호텔 액션 시퀀스는 그래서 중요하다. 이 작품의 마지막 대립 구도라고 할 수 있는 공권력과 해녀 집단 사이의 대결을 앞두고 기존에 존재했던 세력 다툼을 깔끔하게 정리해 내는 장면과도 같기 때문이다. 외부의 도움을 받기는 했으나 원주민에 해당하는 장도리 일당이 권 상사 일당에 맞서 싸워 이겨내는 것에 작은 의미가 있긴 하겠으나 누가 이기는지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미 영화는 밀수꾼 사이의 대결이 아닌 공권력과 해녀 집단 사이의 대결로 넘어간 후다. 정확히 말하면, 공권력의 강력한 힘과 욕심 아래에 숨은 밀수꾼과 이들에게 이용당하는 해녀 집단 사이의 대립.
▲ 영화 <밀수> 스틸컷 |
ⓒ (주)NEW |
영화는 많은 부분에서 70년대 중후반의 환기를 구현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배경으로 깔리는 음악들을 선별하는 과정은 물론, 의상이나 분장, 디자인 세트까지 모든 지점에서 작중 배경을 시청각적으로 완성해내고자 하는 의지가 보인다. 이는 작중 플롯 속에서도 엿보인다. 같은 자리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복수를 눈앞에 둔 진숙과 자신에게 씌워져 있던 모함과 거짓의 원흉을 직접 처단할 수 있게 된 춘자의 모습이 그렇다. 이 장면은 영화의 초반부에서 진숙의 아버지와 동생이 사고를 당하던 장면과 거의 동일하게 이루어져 있다. 단순 플롯의 반복이자 동일 사건의 재현. 고전의 많은 영화들이 따르던 문법 구조다.
물론 영화는 두 사람이 자신의 손을 직접 더럽히지 않는 방향을 통해 다소간의 변주와 반복되지 않는 시간의 의미를 그려낸다. 가수 김추자의 '무인도'를 배경으로 해녀 집단이 다시 뭍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는 이유다. 이 곡의 가사에 따르면 오늘의 태양은 어제의 어둠을 헤치고서야 비로소 솟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를 조금 넓은 관점에서 본다면, 화해를 향해 나아가는 이야기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오해가 놓여 있던 타인과의 화해, 그리고 오래 묶어두었던 과거의 자신과의 화해. 깊은 어창 아래에 감춰진 밀수품이 아니라 갑판 위에 쏟아냈던 전복 바구니처럼 환하고 행복하게.
지난 작품이었던 <모가디슈>(2021)에 이어 이번 영화 <밀수>까지. 이제 류승완 감독의 영화는 시대와 장르, 배경을 가리지 않고 나아가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액션 하나로 승부를 보는 감독이 아니라 완성된 영화 위에 액션이라는 자신만의 강점을 놓을 수 있는 감독이 되었다는 뜻이다. 류승완 감독은 이번 작품을 연출하는 동안 배우들의 연기를 보느라 내내 행복했다고 말하고, 촬영 마지막 날에는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했다고 말한다. 이 영화가 바로 그 결과의 산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배우들이 그런 연기를 해낼 수 있었던 배경과 기저에는 감독의 역량과 재능이 있었을 것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교실 문 잠그고 욕... 순식간에 그 일이 생각났습니다
- "여기가 할렘? 강남엔 안 그러잖나"... 살인사건 이후 신림동은 지금
- 정부 "고강도 감찰" 자신했지만...충북지사·청주시장 빠졌다
- 방통위원장 지명된 이동관 "가짜뉴스와 전쟁, 공정한 미디어 생태계 복원"
- "지식인이 벌인 철없는 짓" 몰매... 과연 누구의 죄인가
- 먹방하는 대통령... '당신 원통함 내가 아오' 연대하는 유족
- 전 육군참모총장 애창곡은 금지된 군가
- 이주호, S초 사건 사과하면서도 "학생인권조례 때문"
- 당정, 재난지원금은 늘려도 추경은 절대 안 된다?
- "새마을금고 왜곡된 조직 구조" 한국경제 보도 따져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