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항에서 해운항으로 우뚝... 삼천포, 도약 기회 잡다
[뉴스사천 하병주]
▲ 1928년의 삼천포항 모습이다. 지금의 삼천포수협 앞 방파제 방향에서 삼천포용궁수산시장 쪽으로 바라본 모습이다. 사진 출처=삼천포지명지(사천문화원 발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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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사천=하병주 기자] 삼천포는 항구다. 행정에서는 삼천리, 삼천리면, 삼천포면, 삼천포읍, 삼천포시 등으로 시대에 따라 달리 불렸으나, 바닷가 포구를 중심으로 성장해 왔음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삼천포항이 지척에 마주하고 있는 늑도가 2천여 년 전 국제 무역항으로 이름을 날렸음은 각종 유적과 유물 발굴로 이미 잘 드러나 있다.
그러나 삼천포는 그 이후로 오랫동안 군사적 요충지 성격이 더 강했다. 고려 성종 11년(992년)에 조창의 하나로 세워진 통양창(용현면), 조선 시대의 구해창과 가산창 등이 사천만의 안쪽에 있었으므로 세곡(稅穀) 운송을 호위했다. 통양창의 외창이 동금동(지금의 통창) 지역에 설치되기도 했다.
또 삼천포는 남해안에 자주 출몰했던 왜구에 대응하는 역할도 컸다. 각산 봉수대 관리와 운영도 그중 하나다. 조선 성종 9년(1478년)에 '사천현 남면 삼천리(三千里)에 삼천진(三千鎭)을 쌓는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 말기에는 대방진 굴항(大芳鎭掘港)을 설치해 군사 300명이 상주하기도 했다.
삼천포가 항구로서 더 주목받기 시작한 건 근대에 이르러서다. 1876년에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이른바 강화도조약이 체결되면서 부산항을 시작으로 전국의 여러 항구가 개항을 맞았다.
▲ 오늘날 삼천포항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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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의 국내 이주가 많아진 건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내정 장악을 위해 통감부를 설치한다는 내용을 담은 을사늑약(1905년 11월 17일)이 맺어지면서다. 마침 러일전쟁에서도 승리한 일본의 콧대가 하늘을 찌를 때다. 삼천포항의 개항도, 일본인의 삼천포 진출도 이 무렵부터 시작한다.
일본인의 삼천포 진출에 상징적 인물은 오노 이쿠지(대야육이·大野育二)이다. 그는 '경남의 자동차왕'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교통·운수 업계에서 큰 힘을 발휘한 재력가였다. 그가 삼천포에 들어와 정착한 게 1906년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사천시사>에선 1906년을 삼천포항의 개항 시점으로 일관되게 언급하고 있다. 관련 내용 중 한 대목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삼천포항은 1906년 일본인들에 의해 개항되고 일본인들이 수산업과 농업 등 각종 산업에 손을 뻗어나가면서, 해운업에까지 참여하면서 오노 이쿠지가 회조부(回漕部)를 설치하게 되고, 1908년에는 다시 합동기선회사가 설립되면서, 삼진(三晉) 회조부까지 개설하게 되어 해상운송업을 장악하면서 개발이 시작되었다."
여기 등장하는 회조부나 기선회사는 모두 배로 여객이나 화물을 실어나르는 운송 업체를 말한다. <사천시사>에선 일본인이 삼천포지역에 처음 이주해 온 시기를 1906년 10월경이라고 특정하면서 "이주해 온 사람은 4호에 13명에 불과했다"고 적었다.
▲ 일제강점기에 촬영된 선진항 모습. 사진 출처=국립중앙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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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선이 여객과 화물을 싣고 삼천포항을 드나들기 시작한 정확한 시점을 찾는 데는 좀 더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하지만 이를 기점으로 삼천포가 근대화의 길로 성큼 더 걸어 들어가게 됨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근대화 시기에 삼천포항이 크게 주목받은 이유 중 하나는 당시 경남의 도청소재지였던 진주의 관문이어서다. 처음엔 옛 장암진(구해창, 축동면 구호마을 소재)이 그 역할을 했으나, 수심이 너무 낮아 큰 배가 닿기 어렵다는 약점이 있었다. 그래서 차선으로 떠오른 게 삼천포항이었다.
다만 삼천포항 역시 큰 약점이 있었으니, 진주의 관문이 되기엔 거리가 너무 멀었다. 이에 진주와 삼천포를 잇는 신작로 개설이 추진돼 1909년 12월에 준공을 봤다. 하지만 운송 수단으로서 자동차 이용에는 여전히 한계가 있었다.
▲ 대한제국 4년(1910년) 2월 1일로 삼천포에 세관감시서를 설치한다는 내용이 담긴 관보의 일부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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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삼천포항의 개항 시점에서 '세관감시서의 설치'에 주목하는 시각도 있다. 사천시에서 해양수산과장을 지낸 문정호 씨는 지난해 사천문화원이 펴낸 2022 사천문화 제24호에 '삼천포항 개항사(開港史)에 대한 소고(小考)'란 글을 실은 바 있다.
그는 이 글에서 삼천포항의 개항일을 대한제국 말기인 1910년 2월 1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근거로는 융희(隆熙) 4년(1910년) 1월 26일에 발행한 <관보 제4586>을 들었다.
이 관보에는 "탁지부대신(度支部大臣) 고영희(高永喜)는 부령(部令)으로 경상남도 사천군 삼천포, 경기도 개성군 벽란도, 경상북도 연일군(영일군) 포항, 전라남도 제주군 제주에 세관감시서(稅關監視署)를 설치하고 융희 4년 2월 1일부터 시행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 1928년에 촬영된 삼천포항 방파제 공사 모습이다. 사진 출처=삼천포지명지(사천문화원 발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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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관감시서의 설치로 삼천포항에는 더 많은 배가 드나들기 시작한다. 그중 하나가 부산기선회사가 운영하는 여객선이었다. 1910년에 운행 인가를 받은 이 여객선의 노선은 부산-장승포-마산-통영-욕지도-삼천포-여수-나로도-거문도-조천-산지-목포였다. 삼천포에서 부산까지는 하루가 꼬박 걸렸다고 한다.
남해안의 중심에 있는 삼천포항은 지정학적으로 아주 중요했다. 그래서 여객 노선이 새롭게 생길 때마다 중요 기항지에 늘 들었다. 이를 바탕으로 삼천포항은 '수산업 더하기 해운업'의 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다.
▲ 1928년에 작성된 삼천포항 잔교 건설 설계도. 사진 출처=국가기록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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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항 선정으로 삼천포항은 날개를 단다. 항만 인프라를 다듬는 기회가 생긴 셈이다. 그러나 다른 항과 달리 국비 투입 계획이 늦어졌다. 이에 경남도는 순수 지방비로 1926~1927년에 방파제와 하양장을, 1928년에 잔교와 부잔교를 설치했다. 들어간 비용은 1만 3879엔과 2만 1437엔이었다. 이 같은 내용은 조선총독부 조선토목사업지에 나타나 있다.
항만 인프라 조성으로 1928년에는 삼천포와 일본 오사카를 잇는 개척 항로가 생겼다. 일종의 시범 운항이었다. 그러다 1935년 무렵에 이르러 부산-시모노세키 사이에 물류 포화 문제가 생기자 그 대안으로 삼천포-하카다를 연결하는 항로가 대안으로 떠올랐다.
이는 나중에 삼천포-모지 항로로 바뀌어 최종 결정에 이르렀으나, 잇따라 터진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등으로 미뤄지면서 차질을 빚었다. 해방 직전인 1943년부터 삼천포항 확장 공사가 대대적으로 시작되었으나, 1945년 일제의 패망으로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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