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승완의 20년 관록이 빚어낸 쾌감

하성태 2023. 7. 28.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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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작가의 이야기 따라잡기 시즌2] 류승완 감독의 <밀수>

[하성태 기자]

<밀수>는 '류승완이 류승완했다'는 하나의 문장으로 정의 가능하다. 그건 두 가지다. 흥행사로서의 면모와 데뷔 20년이 넘은 작가로서의 관록.

먼저 흥행 감독으로서의 약사부터. <베테랑>(2015)은 1341만을 동원했다. 전체 영화 흥행 역대 8위, 한국 영화 역대 흥행 5위다. 류승완 감독이 이때부터 여름 텐트폴 시장에 진입했다. 다음은 <군함도>(2017)다. 영화 안팎의 외우내환을 겪으며 695만을 동원했다. 이어 제작자로 이름을 올린 <엑시트>(2019)의 942만 흥행도 여름이었다.

그리고 <모가디슈>(2021)다. 코로나19 팬데믹의 한가운데서 개봉을 고집, 마스크 쓴 관객 361만을 극장으로 불러 모았다. 한국영화 흥행 1위였고, 그해 12월 개봉해 556만을 끌어 모은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이전까지 전체 흥행 1위를 고수 중이었다. <모가디슈> 외에 박스오피스 톱10 중 한국영화는 219만을 동원한 <싱크홀>이 전부이었다.

펜데믹이 아니었다면 단연 '천만'각이란 탄식이 자자했다. 전문가와 대중 공히 재미와 의미 두 측면에서 모두 만족을 표했다. 저 멀리 동아프리카 대륙에서 벌어지는 분단이란 비극의 축소판이나 소말리아 내전을 뚫고 가족과 동료를 구출하고자 하는 이들의 분투,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감탄할 만한 액션 설계까지.

류승완 감독은 <모다디슈>로 2000년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로 데뷔해 20년이 넘도록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장르와 액션영화의 장인으로 인정받는 류승완표 활극의 정점을 찍었다. 그럼에도 극장가에 불어 닥친 팬데믹 여파가 <모가디슈>에 허락한 숫자는 딱 거기까지였다.

그리고 <밀수>가 왔다. 류승완 감독이 여름시장 빅4의 포문을 열게 됐다. 순제작비는 175억~180억, 손익분기점은 350만 명으로 알려졌다. 영화계는 류승완이란 이름값에 더해 <범죄도시3>에 이은 <밀수>의 흥행 성공이 팬데믹 이후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국영화를 구원할 신호탄이 되길 기대하는 눈치다. 

그 가운데 지난 26일 개봉한 <밀수>의 첫날 스코어는 32만 명. 지난해 같은 기간 개봉, 726만을 동원한 <한산: 용의 출현>의 첫날 성적인 38만에 살짝 못 미친다. 최근 시사회에서 류승완 감독이 한 말마따나, 한국영화가 언제 어렵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그럼에도 침체된 극장가 분위기를 살리기엔 부족함이 없을 기분 좋은 출발인 건 맞다.

확실히 관객들 분위기가 달라졌다. 최근 <엘리멘탈>과 같이 비슷한 눈높이를 가진 관객들의 평을 살피고 안심하는 분위기 속에서 흥행의 뒷심을 발휘하는 경우들이 늘고 있다. <밀수>도 <베테랑>부터 <모가디슈>까지 류승완의 이름값을 기억하는 관객들을 만족시켜야 한다. 여기서 두 번째 정의. 결론적으로 <밀수>는 긍정적인 의미로, 문자 그대로 '류승완이 류승완'한 작품이다. 

후반부 액션의 연쇄가 주는 궁극의 쾌감
 
 영화 <밀수>의 한 장면.
ⓒ NEW
 
감독이 본인도 보고 싶은 단 한 시퀀스로 출발해 영화 전체를 끌어가는 작품들이 있다. 독창적이고 영화적인 동시에 단편적인 상상력을 발전시키는 경우. 개인적으론 김지운 감독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 속 정우성이 장총을 쏘아대며 만주 벌판을 달리는 장면을 꼽곤 한다. 사실 대부분의 영화들이 한 줄의 로그라인(한 문장으로 요약된 줄거리)에서 시작되곤 하지만 말이다.

그 반대도 있다. 보면서도 황홀한 단 하나의 한 장면, 하나의 시퀀스가 영화 전체를 살리는 경우. 수많은 액션영화를 포함해 명장면이, 배우가 작품을 실리는 경우들은 부지기수라 딱히 예를 들지 않아도 될 것이다. 거장의 범작이라도 이런 장면은 반드시 인장처럼 반짝이기 마련이다.

<밀수>는 이 두 가지 경우를 모두 충족시키는 좋은 예다. '70년대 해녀들이 밀수를 하다 사건에 휘말린다'라는 매력적이고 신선한 <밀수>의 한 줄 요약은 류승완 감독에 대한 신뢰가 더해져 기대감을 키운다. 거기에 후반부 쉬지 않고 달리는 액션과 사건의 연쇄는 류승완 감독만이 줄 수 있는 쾌감의 결정체다.

특히 권 상사(조인성)이 장도리(박정민) 패거리와 맞붙는 호텔 액션신은 '성룡 키드'(심지어 밀수선의 이름도 맹룡이다)를 자임해왔던 류 감독이 <베테랑> 이후 선보인 최고의 액션이라 자부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다. 후술하겠지만 류 감독은 다소 '쎈' 이 액션 시퀀스 하나에 단순히 치고받는 오락으로서의 기능을 넘어 캐릭터의 성격과 관계, 서사의 향후 전개를 응축하는 경지를 보여준다.

여기에 이어지는 해녀들의 목숨을 건 분투 장면은 성룡이 <폴리스 스토리 4>에서 시도했던 수족관 수중 액션을 뛰어넘는다. 어느 컷 하나 허투루 하지 않으면서 긴장감과 액션의 쾌감, 드라마적 이음매를 온전히 결합시킨다. 단언컨대, <밀수>의 후반부 수중 액션은 한국영화 사상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몰입감과 완성도를 선사한다. 앞서 언급한대로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속 만주벌판을 <밀수>는 바닷 속으로 옮겨놨다고 보면 틀리지 않을 것 같다.

류 감독이 작정하고 도전한 수중 장면을 포함한 후반부 액션과 사건의 연쇄는 스크린으로 볼 때 더 증폭되는 영화만이 줄 수 있는 짜릿함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 말로 '시간 순삭'은 기본이다. 후반부 강탈극 특유의 전개와 액션은 스크린의 화면 비가 달라지는 것도 모를 만큼 빼어난 몰입도를 선서한다.

이를 감안하더라도 <밀수>는 앞서 소개한 류승완표 텐트폴 영화들과는 조금은 다른 길을 간다. 갈수록 예산을 높여갔던 근작들보다는 초창기나 중반기에 가깝다고 할까. 훨씬 더 장르적이고 조금은 키치적인 류승완 특유의 근원적인 리듬과 감성이 이를 표현하는 고전적인 형식과 섞여 있다. 하지만 그게 또 근작에서 확인시켜준 텐트폴 영화다운 서사적 안정감을 크게 훼손하는 정도는 아니다. 일종의 균형의 미학이랄까.

후반 액션만큼이나 신경 쓴 부분은 아마도 종잡을 수 없는 캐릭터들의 성격 변화일 것이다. <밀수>는 후반으로 갈수록 강탈영화의 형식을 맛깔나게 전시하는 동시에 인물의 감정과 액션의 쾌감을 부담 없이 적절하게 버무리며 가지고 놀 줄 알 만큼 영민하다.

더 크게는 70년대란 시대 자체를 캐릭터화한 드라마인데, 그래서인지 액션을 최소화하고 캐릭터의 정서를 쌓아올리는 데 치중한다. 서사에 얽혀 잊을 만하면 등장하는 액션 장면들을 기대했다면 얼마간 실망할 수 있을 터다. 김혜수와 염정아가, 조인성과 박정민이, 그리고 고민시가 연기하는 캐릭터들의 하이 톤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류승완의 20년 관록
 
 영화 <밀수>의 한 장면.
ⓒ NEW
 
조춘자(김혜수)는 식모살이를 전전하던 어릴 적 상대방의 폭력 때문에 사람을 칼로 찌른 전력의 소유자다. 갈등의 순간에 조춘자의 입으로 설명되는 이 캐릭터의 전사가 <밀수> 속 사건이나 관계에 많은 부분 영향을 미친다. 조춘자는 그만큼 생존 본능도, 생활력도 강한 존재다. 그 조춘자를 한 눈에 알아보는 고옥분(고민시)은 해녀들과는 다른 물로 먹고사는 어린 조춘자이자 미래의 조춘자이고.

<타짜> 속 정마담을 연상시킨다는 관객들의 평이 나올 만큼 특정 장면들에서 김혜수의 연기는 과장돼 있다. 의상과 화장을 포함한 조춘자의 하이 톤은 흔히 '억척' 같은 표현의 김혜수식 해석이자 <밀수>의 전체 톤과 밀접히 연결된다. 70년대 해녀들에 대한 일종의 캐리커처이자 강탈영화 주인공으로서의 특징화인 동시에 단편과 장편, 두 편에 걸쳐 '다찌마와 리'를 만들었던 류 감독 특유의 취향이랄까.

반면 염정아가 연기하는 엄진숙은 조춘자가 존재해야 완성되는 짝패이자 정서적인 동시에 서사적 기능을 담당하는 인물이다. 아버지와 동생의 복수라는 감정이 바탕에 깔린 엄진숙은 튀지 않을지언정 조춘자가 가상의 도시 군천으로 끌고 들어온 강탈극의 동반자이자 조력자다. 엄진숙이 감정의 빌드 업을 맡았다면 조춘자는 사건의 전개를 끌고 가는 식이다.

이 둘로 인해 <밀수>는 일종의 여성 버디물로 보이기도 하는데, 조춘자아 엄진숙이 고옥분의 다방에서 해묵은 오해를 푸는 장면은 후반부 액션을 제외한 <밀수>의 백미라 할 만하다. 주인공이 여성이 아니더라도 가능한 서사로 보이지만 해녀라서 꼭 여성이여야만 하는 <밀수>의 선택이 왜 김혜수였는지를, 염정아였는지를 증명하는.

조인성이 연기하는 권 상사는 전국구 밀수 오야붕이다. 박정민이 연기하는 장도리는 군천을 주름잡는다. 둘 다 순박한 듯 비열하고, 냉혈한 인 듯 달달한 성격의 반전을 공통적으로 부여한 것도 흥미롭다. 둘은 규모만 다를 뿐 밀수가 지닌 근원적 속성을 상징하는 같은 원형 다른 판본의 캐릭터들이다.

그러니까 한국 전쟁 당시 부산처럼 사회 불안과 경제난이 닥친 시기를 틈타 성행하는 밀수는 애초 불법과 부패, 일상의 경계를 아슬하게 넘나드는 제도의 틈입과도 같다. 이를 70년대로 이식한 <밀수>(와 김종수가 연기하는 세관 계장 이장춘)는 그 자체로 박정희 독재 시대의 알레고리이자 조망이라 할 수 있다. 애초부터 정해져 있는 강탈극의 승자가 누구인지 중요하지 않으면서도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야심차다. 류 감독은 6분이 넘는 대곡이자 한국 최초로 사이키델릭 사운드를 도입한 산울림의 <내 마음의 주단을 깔고>를 배경으로 권 상사와 장도리, 두 밀수꾼들이 본격적으로 칼부림을 하는 호텔 방에서의 액션을 리얼하고 소름 돕게 설계했다.

영화의 전체 톤을 살짝 비켜가면서도 그런 정서를 고수한 건 밀수란 속성 때문일 터다. 다시 말해, 액션 시퀀스 하나로 대규모로 행해지는 밀수의 위험함과 복잡성을, 그런 시대의 단면을, 조춘자를 구하려는 권 상사의 낭만성과 패거리를 몰고 온 장도리의 비열함을 탁월하고 종합적으로 상징하고 있다고 할까.

아울러 장기하 음악 감독과 류승완 감독은 <내 마음의 주단을 깔고>와 최헌의 <앵두> 등 70년대 유행곡 다수를 전면에 배치했다. 극의 낭만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인물의 감정에 부합하거나 음악을 통해 시대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부여하려는 시도다.

류승완 감독은 텐트폴 시장에 진입한 전작들에서 좀 더 주제나 서사에 집중해왔다. 천만을 돌파한 <베테랑>에서도 그랬다. 그에 비해 <밀수>는 조금은 투박해 보일 수 있지만 관객들의 기대를 크게 저버리지 않는 선에서 액션과 장르에 천착하고 영화 자체의 쾌감에 집중하던 시절로 회귀한 듯한 영화다.

거기에 더해 김혜수와 염정아의 투 숏을 마주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다. <베테랑>을, <군함도>를, <모가디슈>를 거친 류승완 감독은 들숨과 날숨을 조절하는 해녀들처럼 완급을 조절하는 관록을 영화에 투영하게 됐다. 그렇게 20년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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