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착같이 살았어, 그렇지 않으면 애들 굶겨 죽었을 거야"

완도신문 유영인 2023. 7. 28.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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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소멸대응프로젝트 해녀 이야기] 정천심 해녀

[완도신문 유영인]

ⓒ 완도신문
 
전남 완도와 제주의 중간에 홀로 떨어진 완도군의 대표적인 오지이자 자연이 그대로 보전되어 전라남도 선정 '가고 싶은 섬 여서도'

이곳에서 여서도의 마지막 해녀로 살고 있는 정천심 해녀는 "인생을 사는 동안의 고생을 어떻게 말로 다 할 수 있느냐"며 몇 날 며칠을 해도 다 할 수 없을 만큼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고 했다.  

여호산(여서도의 진산, 352m)의 푸르름이 절정에 달한 7월의 어느 날 정천심 해녀를 만났다.

"여기는 뱃길이 멀고 너무 사나워 옛날부터 들어오면 애 배서 나간다는 데여, 우스갯소리지만 그렇고롬 교통이 안 좋았어."

여서도에서 태어난 정 해녀는 22살 때 같은 마을의 청년 이해웅씨와 결혼하여 슬하에 2남 3녀를 두었다. 그러나 목선을 만드는 알아주는 목수였던 남편은 34세에 사고로 한쪽 다리를 잃었다. 그때부터 정 해녀는 어린 자녀들의 양육을 책임져야 했다.

"정말 악착같이 살 수밖에 없었어. 그렇지 않으면 애들을 굶겨 죽일 판인디 어떻게 편히 살겠어. 남편은 경제적인 활동을 거의 할 수 없지, 애들은 다섯이나 되지, 손에 돈이 남아있는 날이 없었어. 물질을 해서 번 돈으로 남편 약값하고 아이들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고."
 
ⓒ 완도신문
정 해녀는 19살에 해녀에 입문했다. 

″우리 어릴 때는 여기에 사람이 겁나 많이 살았어. 여기 앞 선창이 짝지(자갈로 이루어진 해안)였어. 우리는 거기서 헤엄(수영)을 치고 조금 크면 친구들이랑 섬 밖으로 다니는데, 그때가 되면 물개같이 수영을 잘하게 돼. 짝지를 벗어나면 물살이 아주 세. 그러면 안 떠내려 가라고 죽자 살자 헤엄을 치제."

물질은 다른 사람들처럼 자연스럽게 배웠다고 한다.

″내가 물질을 시작할 때는 우리 동네에 해녀들이 50명쯤 됐어. 제주에서 오기도 하고 마을에도 여러 명 있었고, 그때는 바닷속에 들어가면 전복, 소라랑 맛있는 생선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어. 또 봄이 먼 돌믹(돌미역)이나 쎄미(세모가사리), 불팅이(불등가사리), 천초(우뭇가사리)가 섬을 삥 둘러서 널려 있어. 그것들을 채취해서 수협에 주면 모두 돈이었어."

당시에는 그런 어패류를 잡거나 해조류를 채취해서 돈을 벌었다. 그러나 정 해녀는 올해 물질을 거의 안 했다. 

"물질을 같이 할 동무도 없고, 올해는 마을에서 불팅이도 안 뜯고 미역도 안 비었어. 또 방파제를 공사하고 있어 혼자 물에 댕기기는 쪼간 그래. 그래서 지금까지는 안 했는데 가을부터는 힘에 부친께 갓물질을 해보려고 하구만."

섬 전체 해안에서 화강암이 크게 발달한 여서도는 수심이 깊고 물(조류)의 힘이 매우 센 곳으로 해조류로 유명하고 어·패류의 천국이다.

"동바다(마을의 동쪽바다)는 미역과 소라, 물고기가 많아, 그런데 들어가면 바로 절벽이여 수심도 겁나게 짚어 여러 가지 산호초도 정말 많아. 물속도 육지와 똑같이 생겼어. 육지에 풀하고 나무가 있데끼 바닷속에는 별의별 해초가 숲을 이루고 있어. 서바다(마을의 서쪽바다)는 바위가 많고 수심이 완만함서 얕아. 그래서 전복이나 문어, 해삼, 보말이 많아. 또 (섬의) 남쪽은 미역이 정말 많아"
 
ⓒ 완도신문
 
물질은 한 달에 보통 20여 일을 했다고 한다.

″지금은 못하지만 10년 전만 하더라도 한 달에 보통 20일을 했어. 다른데 같으면 뻘물 때문에 못 하는데 여서도는 물이 워낙에 맑잖아. 그러니 살 때(조석의 간만의 차가 큰 6물~9물 사이로 물심이 쎄서 사람이 떠내려 감)만 안 하고 날이 좋으면 무조건 물질을 했어."

봄철 주민들의 주요 소득원인 돌미역을 베는 것은 마을 전체의 일이라고 한다.

″보통 양력 4월이면 돌미역을 베기 시작해. 나는 해녀라서 내 몫을 제하고도 두 몫을 더 받아. 그것은 미역을 베는 것이 힘든 일이여. 딱 시기가 정해져 있거든. 물때에 맞춰서 아침밥을 먹고서 바다로 나가면 하루 종일 일을 한다고 보면 돼.

점심밥도 배에서 먹는 경우가 허다해. 미역을 베어서 그물망에 담아주면 배에서 건져 올려 한배가 되먼 마을로 돌아와서 내려놓고 배가 또 와, 그러면 또 한 배를 베는 것이여.

쎄미(세모가사리)나 불팅이(붕등가사리)는 물질을 안 하고 바위에서 채취한 깨 특별히 더 받는 것이 없어. 쎄미는 바로 몰려서 수협에 위판하먼 전량 수매를 해가.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그랬는데 지금은 채취를 안 해. 불팅이는 민물에 세척해서 몰리거든, 그것이 마르면 색이 빨갛게 돼 이뻐."
 
ⓒ 완도신문
 
정 해녀의 소망은 건강한 것이다.

"지금도 (완도)읍에 사는 딸이 나오라고 하는데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여. 내가 여기서 80평생을 살았는데 고향을 쉽게 뜰 수 있겠어? 몸이 아퍼서 움직이지 못하면 딸한테 의지할지 모르지만 그러기 전에는 살라고 해."

처녀 때 사용하다 결혼하고서도 가져와서 사용했다는 신주로 만든 물안경을 써 보이던 정 해녀는 ″옛날 것은 다 땡게부렀는디 이것 하나만은 정이 있어 같고 지금까지 가지고 있구만″이라고 웃어보였다. 비록 보잘것없지만 자식들 누군가에게 이것만은 엄마의 유품으로 주고 싶다며 말이다.

멀리서 뱃고동이 울리자 정 여사는 "배 놓치면 또 한밤 자야 해, 얼른 달려가"라고 서두르듯 말한다. 집에서 쫒아내듯이 뱃길을 서두르라고 해 인터뷰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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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글쓴이는 다도해해양문화연구원 원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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