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멤피스’와 더 1975 [친절한 쿡기자]
* 뮤지컬 ‘멤피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유색인종 전용. 백인 출입 금지’. 이런 팻말이 붙은 지하 클럽으로 한 남자가 걸어 들어간다. 이름은 휴이 칼훈. 백인이다. 그는 블루스와 로큰롤을 사랑한다. 문제는 그것이 흑인들의 음악이라는 점이다. 당시는 인종 분리정책이 시행되던 1950년대였다. 휴이가 사는 테네시주 멤피스에선 인종 차별이 극심했다. 그래서일까. 규칙을 어기고 클럽에 들어간 건 휴이인데, 정작 클럽에 있던 흑인들이 더 난리다. “이러다 경찰이라도 들이닥치면 우리만 곤란해진다”며 성을 낸다. 지난 20일 서울 충무아트센터에서 개막한 뮤지컬 ‘멤피스’ 이야기다.
휴이는 클럽 가수 펠리샤를 보자마자 마음을 빼앗긴다. 펠리샤도 자길 스타로 만들어주겠다는 휴이가 싫지 않다. 둘은 연인이 된다. 이 사랑은 불법이다. 남몰래 거리에서 입을 맞추던 어느 날, 자경단이 두 사람을 습격한다. 무장한 이들이 노리는 상대는 휴이가 아닌 펠리샤. 그가 죽을 지경으로 나타나자 오빠 델레이는 격분한 채 휴이에게 달려든다. 분위기가 험악해진 그때, 실어증을 앓던 바텐더 게이터가 입을 열고 노래한다. “기도해/ 너무 아플 때/ 기도해/ 눈물이 흐를 때….”
“너희 기분을 상하게 한다면 미안해. 하지만 너희 정부는 망할 머저리 천지야.” 영국 밴드 1975 보컬 매티 힐리는 지난 22일(현지시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에서 열린 음악 축제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동성애를 법으로 금지한 말레이시아 정부에 화를 내던 참이었다. 말로는 모자랐는지, 노래를 부르던 중 동성 멤버와 입을 맞추는 퍼포먼스까지 벌였다. 사흘간 이어질 예정이었던 축제는 힐리의 돌발 행동 때문에 급히 막을 내렸다. 더 1975는 이후 인도네시아와 대만 공연을 취소했다.
다시, ‘멤피스’. 펠리샤는 뉴욕 활동을 제안받고 꿈에 부풀었다. 뉴욕은 대도시인 데다 남부지방만큼 인종 탄압이 극심하지 않아서다. 휴이는 못마땅하다. 당시 그는 스타 DJ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백인 전용 라디오 채널에서 흑인 음악을 틀어 젊은이들로부터 엄청난 지지를 받았다. 휴이는 음악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펠리샤를 설득한다. 우리가 곧 멤피스이지 않으냐고도 묻는다. 펠리샤는 강경하다. 그는 말한다. “넌 네가 원할 때 언제든 백인일 수 있잖아. (중략) 넌 영웅이고 난 바보인 것처럼 말하지 마. 이건 생존이 걸린 문제니까.”
말레이시아에도 수많은 펠리샤가 있다. 그곳에 사는 성 소수자들이다. 더 1975의 공연 이후 현지 성 소수자 사회는 들끓었다. 말레이시아의 드래그 아티스트 카르멘 로즈는 BBC와 인터뷰에서 “힐리가 성 소수자를 위해 그런 퍼포먼스를 벌인 것이라면, 그로 인해 우리가 겪어야 하는 일도 알았어야 했다”고 꼬집었다. 자신을 퀴어 말레이시아인이라고 밝힌 누리꾼은 SNS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힐리와 동료들은 부유한 백인들이다. 그 퍼포먼스로 잃을 게 없다. 기껏해야 말레이시아에서 돈을 덜 벌게 되는 정도다. (중략) 이제 보수주의자들은 우리(성 소수자들)에 관한 법을 강화하고 더 많은 혐오가 우리를 향할 것이다.”
‘멤피스’는 미국 라디오 DJ 듀이 필립스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1950년대 흑인 음악을 백인 사회에 전파한 인물이다. 그러니 휴이를 주인공으로 둘 수밖에. 하지만 내가 궁금한 건 펠리샤의 이야기다. 자경단에 린치를 당한 후 그는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혹시 그 일로 트라우마가 남진 않았는지. 휴이가 멤피스를 사랑하듯 그 또한 멤피스를 사랑하는지. 아니, 사랑할 수 있었는지. 백인과 흑인은 같이 식사조차 할 수 없었던 그곳을, 수많은 친구를 죽게 한 그곳을, 자신조차 죽을 위기에 빠뜨렸던, 그러나 누구도 처벌하지 않은 그곳을….
안전망 안에 서서 이리 와 함께 싸우자고 말하기는 쉽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 안전망으로 들어갈 수 없다. 싸우기 위해선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이들에게, 너희는 무엇이 두려워 망설이느냐 묻는다면 기만이다. ‘멤피스’ 마지막 장면. 백인 방송국에서 퇴출당한 휴이는 흑인 전용 방송국에서 라디오를 진행한다. 어떤 흑인 DJ는 휴이에게 밀려 자리를 잃었겠지. 더 1975 때문에 축제가 취소돼 무대를 잃은 말레이시아 가수들처럼. 나의 기도는 그 사람들의 평화와 안녕을 향한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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