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영웅]⑤"돌아갈 사람" 묻더니 기관총 난사한 北
조국 외면 속 '포로 낙인' 달고 탄광 내몰려
자녀까지 '괴뢰군 포로' 낙인…고통 대물림
박선영 "尹, 보훈 강조하려면 생존자 만나라"
편집자주 -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며 한반도에서 포성이 멈췄다. 그러나 수만 명의 국군포로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북한의 탄광으로 내몰렸고, 전장으로 뛰어든 젊은 용사들은 조국의 외면 속 '잊혀진 영웅'이 됐다. 70년이 흘러 북한에 억류된 생존자는 90세를 웃돌 것으로 추정된다. 윤석열 정부의 임기가 '마지막 기회'로 평가되는 이유다. 정전협정 70주년을 맞아 국군포로의 희생을 외면한 제도를 살펴보고, 개선책을 모색한다.
"왜 포로교환 때 (남으로) 돌아오지 않았느냐고 물어볼 때마다 참으로 아프고 비참했다." 국군포로 생존자 유영복 어르신(93)은 목숨을 걸고 탈북한 자신에게 '왜 진작 돌아오지 않았느냐' 묻는 가벼운 질문마저 깊은 생채기로 남았다고 했다.
1953년 6·25전쟁 휴전회담 당시 유엔군사령부는 국군 실종자를 8만2000여명으로 추산했지만, 북측이 최종 인도한 국군포로는 8343명에 그쳤다. 북한은 전쟁 중 10만명의 포로를 잡았다고 선전했지만, 막상 송환 시점이 되자 숫자를 터무니없이 줄였다. 포로 교환 이후 북한은 "남겨진 포로는 1명도 없다"고 잡아떼고 있다.
'포로가 없다'는 북한의 입장이 틀린 표현은 아니다. 북한은 국군포로를 '해방 전사'라고 칭하면서 포로라는 단어를 쓰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그렇게 포로수용소 대신 탄광으로 수만명의 국군포로를 내몰았다. 악랄한 꼼수였다. 당시 대부분의 포로는 정전협정이 체결됐다는 소식조차 듣지 못했다고 한다. 특히 일부 지역에선 '전쟁이 멈췄으니, 돌아가고 싶은 사람은 나오라'는 공지가 있었지만, 귀환을 희망한 포로들을 모아놓고 기관총을 난사한 참변까지 벌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유영복 어르신은 "데려오진 못하더라도 비참하게 죽어간 국군의 이야기를 정부가 알리지 않으면 누가 알리느냐"며 "김대중 대통령은 평양까지 와놓고 왜 우리 국민을 돌려달라는 말 한마디 없이 돌아간 것인지, 이제라도 알고 싶다"고 울분을 토했다.
실제 남과 북은 1990년대 말부터 대화 분위기를 형성했고 국군포로 사이에도 이런 소식이 퍼졌다.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으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제야 우리도 돌아갈 수 있겠구나' 하는 희망을 가졌다. 노예와 같은 생활 속에서도 없는 돈을 끌어모아 옷을 한 벌씩 맞췄다고 한다. 대통령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갈 때 말끔한 차림으로 가족 앞에 서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소박한 희망은 오래가지 못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방북 당시 국군포로에 대해 일언반구 없이 돌아간 뒤, 남로당·빨치산·인민군 포로들로 이뤄진 '비전향 장기수' 수십명을 북한에 돌려줬다. 우리 국군포로는 성대한 환영식을 치르는 인민군의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유 어르신은 "돌려준 만큼이라도 돌려받았어야 했던 것 아니냐. 아직도 갑갑하다"고 했다.
국군포로들이 두만강을 넘기 시작한 것은 이 시기부터다. 2000년대 초 귀환자가 급격히 늘어난 이유다. '남아서 죽느니, 탈북 시도라도 해보고 죽자'는 절박한 마음이었다고 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붙잡혀 북송된 것으로 전해지며, 2010년을 끝으로 귀환이 끊긴 것은 대체로 여든을 넘겨 더는 자력으로 탈북을 시도하기 어려워진 탓으로 추정된다.
"평생 비참했지만…조국이 부르면 달려나가겠다"
북한에 억류된 국군포로의 하루는 짙고 새카만 검정색이었다. 어두운 탄광에 갇혀 쓰러질 때까지 노예처럼 일했다. 북한에서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릴 순 있었지만, 그들의 후손도 '괴뢰군 포로의 자녀'라는 딱지를 떼어내지 못했다. 국군포로의 아들딸이라는 이유만으로 탄광에 끌려갔고, 비참한 낙인은 오늘날까지 대물림되고 있다.
2001년 6월 탈북한 김성태 어르신(90)은 "1954년 7월 동료 7명과 남으로 넘어오려다가 잡혀 13년을 옥살이했다"며 "강냉이죽에 콩, 그것마저 없는 날은 배가 고파 혼이 났다"고 했다. 이어 "꿈에라도 부모님과 고향 친구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이런 마음으로 수십년을 버텼다"며 "인간쓰레기 놈들에게 너무나도 천대를 받으며 산 세월이 아직도 억울하다"고 토로했다.
김 어르신은 "인간 대접도 못 받고 억압당하면서, 포로라는 딱지가 붙어 아들까지도 그런 삶을 살아야 했다"며 "북한이 어떻게 인권을 유린했는지, 그 만행을 죽는 날까지 세계만방에 알리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는 조국이 부르면 이제라도 달려나갈 준비가 돼 있다"며 "윤석열 대통령도 국군포로의 아픔에 귀 기울여주길 간곡히 바란다"고 당부했다.
박선영 "국군포로 희생과 헌신, 존중하는 軍 되길"
18대 국회의원 시절부터 국군포로에 대한 문제 제기를 이어온 박선영 사단법인 물망초 이사장은 윤석열 정부의 전향적인 태도 변화를 촉구했다. '보훈'을 강조하는 기조가 의미 있으려면 국군포로에 대한 인식부터 고쳐야 한다는 지적이다.
박 이사장은 "국회에 있을 때부터 '국군포로를 위한 훈장을 만들자'고 수도 없이 제안했다"며 "그때마다 국방부는 '북한에서 무슨 짓을 하다 왔을지 아느냐'는 식으로 반응했다. 기가 찰 노릇"이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이어 "미국은 포로가 비밀을 다 털어놔도 살아 돌아오기만 하면 영웅으로 대접한다"며 "살기 위한 협조도 하지 않으면 죽으란 말밖에 더 되나"라고 했다.
그는 "일·이병 시절 참호에 숨어 있으라는 지시를 받고 대기하다 버려진 경우도 상당히 많았다"며 "적에게 잡힐 바엔 죽으라는 인식은 일본 군국주의 외엔 전세계에서 찾아볼 수 없는 잘못된 관념"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국군 창설멤버였던 국군포로 이원삼 어르신 작고 땐 정부에서 단 1명도 조문을 오지 않았다"며 "이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라고 꼬집었다.
박 이사장은 윤 대통령이 국군포로 생존자를 직접 위문하면 '유의미한 메시지'가 될 것이라고 제안했다. 대통령이 나서 예우를 갖춘다면, 국방부를 비롯한 유관 부처에 경각심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프랑스 군대 행사를 보니 이제 막 임관한 신임 장교들이 '베테랑'을 휠체어에 모시고 입장하더라"라며 "우리 군에서도 이런 모습을 볼 수 있길 간절히 바란다"고 당부했다.
장희준 기자 junh@asiae.co.kr
양낙규 군사전문기자 if@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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