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시민' 단어만 바꿔 또...국회 입법왕들의 황당 법안들 [2만건 쏟아진 의원입법]
지난해 4월 19일 국회 14개 상임위원회에 일제히 ‘장애인차별조항 정비 개정안’이 접수됐다. 법안 70건에 들어있는 “심신장애로 인하여 직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된 경우”라는 표현을 모두 “사고 또는 신체적·정신적 질환으로 장기간 직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된 경우”로 고치라는 내용의 이른바 ‘복붙(복사·붙여넣기) 법안’이었다.
이 법안을 발의한 이종성 국민의힘 의원은 “해촉·해임 사유에 ‘심신장애’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심화시킬 우려가 있다”는 이유를 댔다. 그러나 이 의원이 제출한 14개 법안은 1년 넘도록 각 상임위에 계류 중이다.
민형배 민주당 의원은 5·18 민주화운동 관련 법안의 ‘정의(定義)’ 규정을 바꾸는 법안만 9건 냈다. 5·18 민주화운동보상법의 경우 네 차례 발의했는데 ▶강제 해직 언론인 등을 ‘5·18 민주화운동 관련자’에 포함하는 내용 ▶질병을 앓거나 그 후유증으로 사망한 사람 등을 ‘관련자’에 포함하는 내용 ▶5·18 민주화운동의 정의에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회복·신장시킨 활동’ 등을 추가하는 내용을 각기 다른 법안으로 발의했다. 이 가운데 5·18 정의를 추가하는 2020년 12월 1일 법안은 하루 만에 철회했다가, ‘국민’이란 단어만 ‘시민’으로 바꿔 같은 달 8일 다시 발의했다.
이런 법안이 켜켜이 쌓이면서 27일 기준 21대 국회의 의원발의 법안은 2만1127건에 달한다. 법안을 하루에 18건씩 쏟아낸 것이다. 20년 전인 16대 국회(1651건)와 비교하면 12배 이상 발의 건수가 폭증했다. 반대로 입법 품질은 떨어졌다. 16대 국회에서 46.8%에 달했단 법안 가결률은 현재 25.2%로 반토막 수준으로 떨어졌다.
‘복붙 법안’과 함께 법안 폭증의 원인으로 거론되는 건 이른바 '쪼개기 법안'이다. 하나로 발의가 가능한 법안을 나눠서 여러 법안으로 내는 거다. 각종 세제 혜택이 담긴 조세특례제한법(조특법)의 일몰(日沒) 규정은 ‘쪼개기 입법’의 단골 소재다. 서울시 행정부시장 출신인 윤준병 민주당 의원은 올해 3월 6~10일까지 하루에 한 건씩 조특법 개정안 5건을 냈다. 모두 올해 말로 끝나는 농업 분야 간접세·법인세·인지세 등에 대한 감면 기간을 2028년 말까지 5년 연장하는 내용이다. 기획재정부 관료 출신인 류성걸 국민의힘 의원은 올해 5월 3~11일까지 조특법 4건을 발의했다. 이 역시 올해 말로 끝나는 위기지역 창업기업, 고용유지 중소기업에 대한 소득세·법인세 면제를 3년 연장하는 내용이다.
어려운 한자어나 일제 잔재 용어를 다듬는 ‘복붙 법안’은 법안 건수 늘리기의 단골 기법이다. 김성원 국민의힘 의원은 ‘보철구(補綴具)’라는 단어를 ‘보조기구’로 바꾸는 동일한 내용의 법안을 2021년 11월 18일 하루에만 7건 발의했다. 선원법, 공무원재해보상법, 국가유공자예우법 등 소관 상임위는 제각각이었지만, 법안 내용은 모두 같았다.
사회적 논란이 생기면 앞다퉈 비슷한 내용의 법안을 쏟아내는 것도 21대 국회에서 심해졌다. 2020년 11월 29일 롯데마트 잠실점이 훈련 중인 시각장애인 안내견의 입장을 막자, 정청래 민주당 의원은 이틀 만에 장애인 보조견 자원봉사자의 출입을 정당한 사유 없이 거부할 경우 처벌 수위를 1년 이하의 징역(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는 장애인복지법 개정안을 냈다. 해당 법안은 2년 반째 소관 상임위에 계류 중이다.
올해 5월 무소속 김남국 의원의 ‘거액 코인 보유 논란’이 불거진 직후에도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엔 공직자윤리법 개정안이 10건 발의됐다. 문구는 조금씩 달랐지만, 모두 국회의원의 재산신고·공개 대상에 가상자산을 포함시키는 게 골자였다. 이들 법안은 행안위 전체회의에서 병합돼 국회 본회의까지 일사천리로 짧게는 6일, 길게는 2주 만에 통과했다. “이슈에만 잘 올라타면 운(運)으로 실적을 쌓을 수 있는 우리 국회의 현실을 보여준다”(야당 보좌관)는 말이 나온 이유다.
이처럼 국회의원이 입법 실적에 목을 매는 건 공천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대부분 정당은 현역 의원의 공천 여부를 정하기에 앞서 실적 평가를 진행하는데, 이 과정에서 ‘법안 건수’가 실적을 입증하는 자료로 활용되곤 한다. 실제 20대 총선의 민주당 ‘선출직 평가 기준표’를 보면 배점 7%가 할당된 ‘입법 수행실적’은 ▶대표발의법안 ▶입법 완료 법안 ▶당론채택 법안 등으로 구성돼 있었다. 민주당의 한 보좌관은 “예민한 공천 과정에서 부실 입법을 걸러내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며 “엉망진창인 법안일지라도 숫자가 많은 게 공천에 도움된다”고 말했다.
부실 법안은 행정력 낭비로 이어진다. 법안은 발의되는 순간 의무적으로 국회 공무원이 검토보고서를 작성하고, 정부 부처에서도 검토 의견을 제출하기 때문이다. “실적 올리기 법안 발의 때문에 정작 필요한 정책 검토가 부실하게 이뤄질 수 있다”(국회 관계자)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국회 사무처에 따르면 각 의원실이 법안 발의 전 법제실에 입안을 문의하는 건수는 21대 국회 말이면 20대 국회(4만3100건)를 훌쩍 넘어선 5만1500건에 도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 “생산성 높이자” 반성하는 국회…복붙방지법·입법영향평가 거론
「 과잉 입법의 폐해가 커지면서, 21대 국회에선 역으로 국회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아이디어가 쏟아지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복붙(복사·붙여넣기) 방지법’이다. 이성만 무소속 의원은 지난해 12월 법률 조항에 남아있는 일본식 용어와 한자를 순화하는 국회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의원들이 일본식 용어나 한자어만 일부 교체해 법안을 남발하는 행태를 막기 위해서다. 지난해 3월 국회운영개선소위는 심사했으나 “각 상임위원회에서 정비하면 된다”는 의견에 막혀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외국어 표현을 개정하는 소위를 법제사법위원회에 설치하도록 하는 ‘우리 말글 법률 만들기’ 법안(이규민 전 의원 대표발의)도 비슷한 취지로 발의됐다.
국회사무처는 환경영향평가와 유사한 ‘입법 규제 영향평가’를 도입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법안 제출 전후로 입법조사처·전문기관에서 평가를 받게 해 저질 입법 난립을 막겠다는 것이다. 규제 관련 정부 입법이 규제개혁위원회 사전 심사를 거치는 것과 비슷한 방식이다. 현재는 법안 발의 시 비용 추계서만 첨부할 뿐, 법안이 미치는 영향에 대한 과학적·체계적 분석을 강제하지 않고 있다.
이광재 국회 사무총장은 “발의 건수만 따지는 정량평가 외에 각 법안에 대한 ‘임팩트 평가’(정성평가)가 함께 가야 한다”며 “국회가 현재의 갈등을 해소하고 미래의 문을 여는 역할에 나설 때”라고 말했다. 국민의힘(윤재옥·이종배·정경희 의원)과 민주당(김태년·신정훈 의원)에서 관련 법안도 이미 5개나 제출돼 여야가 공감대도 이뤘다는 평가다.
국회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선 결국 국회의원 스스로 태도를 바꿔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매월 3회 이상 법안소위를 개최하도록 하는 ‘일하는 국회법’부터 지키자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오기형 민주당 의원실 자료에 따르면 2021년 ‘일하는 국회법’ 시행 후에도 각 상임위(운영·정보·여가위 제외)는 월평균 전체 회의 1.8회, 법안소위 1.1회만 열고 있다.
의원들이 사이에선 ‘책임 못 질 법안은 발의하지 말자’는 자성의 목소리도 나온다. 오기형 민주당 의원은 “어떤 법이 사회에서 유의미한 변화를 만들어냈는지 질적 평가를 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21대 국회에서 단 10건의 법안을 발의한 김웅 국민의힘 의원은 “말도 안되는 법을 만들어놓고 ‘국회는 일 다했다’고 이야기하는게 더 나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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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문희·강보현·김정재 기자 moonbright@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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