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플로깅’으로 얻는 부수적 이익 효과
자연에 보탬되고 경각심 줘
각자 방식으로 지구를 위해!
대학 동기 서너 명과 제주도에 놀러간 적이 있다. 현지에 집을 짓고 사는 친구가 가이드를 자청했다. 새로 생긴 한라산 둘레길을 추천한다며 우리를 안내했다. 널리 알려지지 않아선지 과연 한적하고 아름다운 숲길이 내내 펼쳐졌다. 중간에 쉼터가 나와 다들 자리를 잡고 아픈 다리를 쉬었다. 친구는 커다란 배낭에서 소풍 때나 보던 3층 찬합을 꺼냈다. 막걸리 한 통과 조각낸 치즈며 여러 과일이 가지런히 담겨 있었다. 비닐봉지에 대충 싸와도 고마울 텐데 이런 융숭한 대접이라니 황송할 따름이었다.
“이렇게 신세를 져서 어쩐다?” 우리는 맛있게 간식을 나눠 먹으며 고마움을 표했다.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친구는 주섬주섬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고맙지? 그럼 신세를 갚아야지. 자, 다들 근처에 있는 쓰레기 열 개씩만 줍자.”
뜻밖의 제안에 어리둥절했지만 우리는 금세 그 뜻을 알아차렸다. 이 숲길을 자주 산책한다는 친구에게는 “고맙다”는 말 백 번보다 쓰레기 줍는 행위 한 번이 더 낫단다. 농담처럼 가벼운 청소였지만 우리가 만끽한 제주도 자연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된 것 같아 뿌듯했다.
우리 아파트 건너편에도 자그마한 산이 하나 있다. 해발 400m도 안 되지만 내겐 일상의 산소통 역할을 한다. 옷장을 통과하면 겨울나라로 진입하는 동화처럼 계단만 올라서면 곧장 깊은 산길로 통한다. 글을 쓰다가 답답해지면 그냥 입던 채로 운동화만 신고 올라가곤 한다.
평소엔 물병만 달랑 들고 가는데 제주도를 다녀온 뒤부터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오르내릴 때마다 곳곳에 보이는 쓰레기들. 사탕껍질, 커피봉지, 종이컵, 마스크, 물휴지, 비닐 등이 삐죽삐죽 눈에 띄었다. 입으로는 욕하면서도 맨손으로 줍기 어려우니 나도 모르는 척 외면할 수밖에.
찝찝해하지만 말고 본격적으로 ‘플로깅’을 해보자고 마음먹었다. 플로깅(plogging)은 2016년 스웨덴에서부터 시작됐다. ‘이삭을 줍다’라는 ‘플로카 업(plocka upp)’과 ‘조깅(jogging)’을 합친 말이란다. 왜 하필 조깅인지는 잘 모르겠다. 내 경험으로, 뛰면서는 쓰레기가 잘 보이지 않을뿐더러 멈춰서 줍기도 어려운데.
나는 동네를 산책하거나 앞산을 오를 때마다 실천해 보기로 했다. 가벼운 배낭에다 비닐봉지와 1000원 주고 산 집게 하나만 챙기면 끝. 시작한 지 겨우 한 달쯤 됐고, 한 여섯 번쯤 했나. 생각보다 쉽고 여러 가지 부수적 이익 효과까지 보고 있으니 놀랍다.
첫째, 내 몸을 위해 운동하는 김에 그저 시간과 에너지를 조금 더 투여할 뿐이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산을 깨끗이 하는 데도 도움이 되니 그야말로 생선 먹으면서 뱃속에 꽉 찬 알까지 덤으로 먹는 격 아닌가.
둘째, 내가 쓰레기봉투와 집게를 들고 산을 오르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줄 수 있다. 저렇게 쓰레기를 줍는 사람이 있으니 함부로 버리면 안 되겠구나 하는 마음가짐이랄까. 또한 내 SNS에 자랑할 때마다 본인도 실천해 보겠다는 분들이 부쩍 늘어난다.
셋째, 여성 혼자 산을 오르다 보면 종종 느끼게 마련인 음험한 시선이 싹 사라졌다. ‘와, 나는 산을 오르는 것만도 힘들어 죽겠는데, 저 여성은 쓰레기까지 주워 가며 올라가네?’ 이런 존경 엇비슷한 눈빛을 보낸다. 먼저 가라고 얼른 길을 비켜 주는 아저씨들도 있다.
넷째, “좋은 일 하시네요” 하면서 인사를 보내는 분이 꽤 많다. 부끄러워서 대충 고개만 끄덕하고 말지만 결국은 내가 덕을 쌓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별것 아닌 일로 이리 칭찬을 받으니 어쩌면 천국에 가지 않을까 슬쩍 기대된다.
‘나는 풍요로웠고 지구는 달라졌다’를 쓴 여성 과학자 호프 자런은 경고한다. “게으른 허무주의에 유혹당해서는 안 된다”고. 희망이 없다고 포기하지 말고, 지금 선 자리에서 각자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지구를 위하면 된다. 현재는 대중교통 이용과 플로깅이 나의 실천 방안이다.
마녀체력(‘걷기의 말들’ 작가·생활체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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