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 ‘책임자 처벌’만으론 참사 반복 막기 어렵다

남도영 2023. 7. 28. 04:03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남도영 논설위원

이상민 장관 탄핵 기각은 특정인에만 책임 묻기 어렵다는 의미
강도높은 진상규명 방법 담은 이태원 특별법 전망도 불투명
참사 되풀이되는 구조적 원인 규명에 국가적 에너지 투입해야
정부도 유가족과 대화 재개해야 언제까지 거리에 내버려둘 건가

사회적 참사가 발생하면 논의는 네 가지 정도의 단계를 거친다. 첫째는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를 따지는 진상 규명 단계다. 다음 단계는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묻게 된다. 세 번째는 재발을 막기 위한 대책을 논의하고, 마지막은 보상·배상의 단계다. 세월호 참사도, 이태원 참사도 이 과정을 거쳤거나 거치고 있다. 얼마 전 발생한 충북 오송 지하차도 참사도 이 과정을 시작했다. 세월호 참사의 경우 지난 1월 유가족들이 국가와 청해진해운을 상대로 낸 국가배상·손해배상 청구 소송이 마무리되면서 사실상 네 단계를 모두 거쳤다.

헌법재판소는 25일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에 대한 국회의 탄핵심판 청구안을 기각했다. 헌법재판관 9명 전원일치 의견이었다. 이태원 참사는 특정인의 잘못이거나 하나의 원인 때문에 발생한 게 아니라 정부 기관의 대응 역량 부실 등이 총체적으로 작용한 결과이기 때문에 이 장관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게 헌재 결정의 요지였다. 이 장관 탄핵이 기각된 뒤 더불어민주당과 이태원 참사 유가족 협의회와 시민대책회의는 분노를 쏟아냈다. “법이 왜 이따위냐”는 말까지 나왔다.

정부는 국민의 안전에 대한 무한책임을 지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책임을 어디까지 물어야 할지는 다른 문제다. 유가족과 피해자의 답답함을 완벽하게 해소할 수 있는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쉽지 않은 이유다. 참사가 벌어지면 정부 차원의 조사위원회, 감사원의 감사, 국회의 국정조사, 검경의 수사가 진행되지만, 편파 부실 은폐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2014년 세월호 참사가 벌어진 뒤 검찰, 감사원, 국회 등의 조사와 수사를 거쳐 특검까지 진행됐으나, 원래 조사와 수사 결과를 넘어서는 새로운 진상 규명은 쉽지 않았다. 책임자 처벌도 유가족의 ‘한’을 풀어주기에는 미약한 수준이다. 세월호 사건과 관련해 정부 인사 중 유죄(징역 3년)가 확정된 사람은 사건 당일 현장에 출동했던 목포해경 123정장뿐이었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도, 해양경찰청장도 무죄가 선고됐다.

이제 이태원 참사는 ‘이태원 참사 특별법’ 제정으로 전선이 이동했다. 이태원 참사 특별법은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해 감사 요구권과 특검 수사 요청권 등으로 진상 규명 조사를 벌이고, 피해자 의료비와 생활비를 지원하며, 복합시설과 추모공원 및 재단을 설립하는 내용이다. 강도 높은 진상 규명 활동과 책임자 처벌, 유족 지원에 초점을 맞춘 법안이다. 특별법의 전망은 밝지 않다. 국회 다수당인 민주당이 무리하게 특별법을 통과시키더라도 윤석열 대통령이 거부할 가능성이 크다. 지금 이런 상태라면 이태원 참사는 정쟁의 소재로 활용되거나 조금씩 잊힐 것이다. 누구도 바라지 않는 슬픈 결말이다.

참사가 벌어질 때마다 재발 방지 대책이 논의됐고, 법과 제도가 보완됐다. 1994년 성수대교가 붕괴하자 1995년 ‘시설물의 안전관리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했다. 삼풍백화점이 붕괴한 뒤에는 ‘재난관리법’을 만들었다. 2003년 대구 지하철 방화 사건이 벌어지자 2004년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재난안전법)을 만들었고, 2014년 세월호 사건이 벌어지자 재난안전법을 개정해 재난대응체계를 대대적으로 정비했다. 매뉴얼도 많다. 정부 중앙부처에는 자연재난, 사회재난, 해외재난 등에 대한 매뉴얼이 40여개가 있다. 현장 매뉴얼, 실무 매뉴얼 등을 모두 합치면 8000개가 넘는다고 한다. 조사·수사 기관도 많고, 법안도 많고, 매뉴얼도 넘칠 만큼 있는데, 참사가 끊이지 않는다.

이쯤 되면 왜 어이없는 참사가 되풀이되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법과 제도는 명확한지, 매뉴얼들이 왜 작동하지 않는지 구조적 원인을 따지는 것에 국가적 에너지를 투입해야 한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해야 할 일이다. 더 강한 진상 규명과 더 확실한 책임자 처벌에만 매달린 해법에서 벗어나야 한다. 정치적 이익이 없는 일이겠지만, 법과 제도를 점검하고 개선하는 일은 정치의 가장 중요한 임무다.

정부도 이태원 유가족과의 대화를 재개해야 한다. 정부와 유가족이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려 한다면 타협이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이태원 참사가 벌어진 지 9개월이 지났다. 아직도 유가족들이 거리를 헤매는 상황은 정상적이지 않다. 누군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면, 그건 정부여야 하지 않을까.

남도영 논설위원 dynam@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