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 vs. 12살 작은 인간
Q : 〈비밀의 언덕〉은 90년대, 거주지와 부모의 학력, 직업 등을 적어내야 했던 가정환경조사서를 소재로 한다
A : 종이 한 장으로 사회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달까. 물론 지금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출신과 환경에 연연하고 편견을 드러내는, 보이지 않는 가정환경조사서가 존재하는 것 같다. 시대를 막론하고 보편성을 얻을 수 있는 지점이었다.
Q : 명은은 부모의 직업이 부끄러워 거짓말을 시작한다. 하지만 영화는 거짓과 솔직함 사이 그 어느 쪽에도 힘을 싣지 않는데
A : 가장 극단의 솔직한 인물과 그렇지 않은 인물 모두를 진중하게 담았고, 어느 쪽이 정답인지 스스로도 몰랐다. 이게 영화를 끝까지 만드는 동력이 되었다. 관객 또한 답을 고민할 수 있길.
Q : 명은의 성장통은 자신을 드러내는 데 거리낌 없는 ‘혜진’으로 인해 시작된다
A : 혜진은 한마디로 ‘명은이를 망치러 온 구원자’가 아닐까. 자신이 쌓아온 모든 걸 무너뜨리는 게 처음은 싫었겠지만, 멀리 보면 혜진으로 인해 몰랐던 세상을 알게 된다. 우리 인생에도 혜진 같은 사람이 한 번은 찾아오는 것 같다.
Q : 두 소녀의 세계는 ‘글쓰기 대회’로 마주본다. 글쓰기가 매개인 이유는
A : 명은은 반장이 되면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혼자 해결할 수 없는 거대한 벽과 마주한다. 하지만 글쓰기만큼은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 집과 학교라는 좁은 세상이 전부인 명은에게 글쓰기는 ‘환경’을 알아가고 ‘평화’를 탐구하며, 세계관을 넓히는 도구다. 가족을 세상의 잣대에 비교하고, 그로 인한 갈등도 커지지만 결국 돌아오게 만드는 힘이기도 하다. 명은이 글로 멀리 가보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길 바랐다. 그런 뒤에야 비로소 진정한 성찰을 할 수 있으니까.
Q : 명은을 그간 미디어에서 전형적으로 다룬 10대의 모습에서 탈피한 ‘주체적이고 개성 강한, 어쩌면 발칙한’ 인간으로 묘사했다
A : ‘아이’라는 프레임을 지운 한 여성으로, 미화되지 않은 복잡한 내면을 가진 작은 인간의 개념으로 그리고 싶었다.
Q : 명은 역의 배우 문승아와의 호흡은
A : 승아를 캐스팅하고 자주 만났다. 목적도 없고 두서도 없는 대화를 많이 나눴다. 아마 작품과 캐릭터보다 문승아와 이지은이라는 사람을 더 잘 알게 됐을지도. 이때 촘촘히 쌓은 신뢰와 교감 덕분에 단단해진 채 촬영에 들어갈 수 있었고, 그때 알게 된 승아의 취향과 습관, 매력이 명은의 디테일을 완성해 줬다.
Q : 어른이 된 우리에게 10대 소녀의 이야기가 필요한 이유는
A : 명은이 부모의 직업을 부끄러워한 건 객관적으로 그것이 부끄러워서가 아니다. 당시 교과서와 매스컴이 제시한 엄마아빠의 모습과 거리감이 느껴져서 일 것. 10대 여성 캐릭터도 마찬가지다. 관객이 볼 수 있는 10대 여성의 선택지가 더 다양해져야 한다.
Q : 또 다뤄보고 싶은 여성의 얼굴이 있다면
A : 이 영화에 등장하는 근사한 여성들, 명은과 혜진은 아이, 애란은 선생님, 경희는 엄마로 불릴 가능성이 크지만 나는 앞으로 어떤 여성을 다루든 결코 아이나 선생님, 엄마로 부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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