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의 결혼식 축사를 읽다 울어버렸습니다

안영춘 2023. 7. 27.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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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뉴스] "결혼하는 내 딸, 아빠를 오래 돌봐줘서 고맙다"

일상의 이야기가 주목 받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린 글, 공감을 불러일으킨 글, 그래서 오마이뉴스 독자와 함께 읽어보고 싶은 글을 콕 집어 '공감뉴스'라는 이름으로 소개합니다. 읽으며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는 글들을 엄선해 전달하겠습니다. <편집자말>

[안영춘 기자]

이달 초 한 아버지가 딸을 시집보내며 식장에서 축사로 읽은 편지가 주변에 은은한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딸의 결혼을 마음 다해 축하한다는 내용의 개인적인 글입니다만, 딸의 일에 대한 사려 깊은 이해, 아버지의 고유한 교육 철학,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평등한 관계를 지향하는 모습 등에 많은 이들의 공감을 표하고 있는데요.

'지난 7월 8일 제가 딸 결혼식에서 읽은 편지입니다. 실제로 읽었을 때는 슬랩스틱 신파 장르가 되고 말았습니다. 내 생애에 다시는 그런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자신의 SNS에 편지글을 올려둔 이는 안영춘 한겨레 기자였습니다. 안 기자의 동의를 얻어 전문을 싣습니다. 함께 읽어보시죠.
 
 딸 결혼식에서 축사를 읽다가 눈물을 흘렸습니다. (사진 제공 장철규)
ⓒ 장철규
 
신비의 소녀 1호, 줄여서 신소1에게.

너한테서 결혼할 결심을 처음 들었을 때, 뛸 듯이 기쁘기만 한 건 아니었다. 네가 그 선택으로 인해 지금 행복하고 또 앞으로 행복해질 수 있으면 족하다고 여기려 했다. 아빠의 마음은 잔잔한 호수 같아야 할 터였다.

그렇지 못했다. 컴컴한 심연 속으로 가라앉는 느낌에 빠져들고는 했다. 이 편지는 네 결혼을 앞두고 아빠의 몸과 마음에서 벌어진 기이한 사태를 해석하려고 안간힘을 쓴 흔적이다. 뙤약볕에 오래 졸인 바닷물이 허공으로 흩어진 뒤 시나브로 소금이 오듯이, 아빠는 이제야 겨우 쓰기 시작할 수 있게 됐다. 네 결혼식 전날 밤이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게 제 자식 사랑하는 거라 여겨왔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 털을 보드랍다 한다지 않더냐. 정작 어려운 건 핏줄의 끌림을 조화롭게 다스리는 일일 터였다. 아빠의 그런 신념은 꽤 단단했던지, 이런 일까지 있었다. 어느 후배가 달뜬 목소리로 제 아이가 태어난 소식을 알려왔다. 아빠가 축하 인사를 건넸다. "제 자식 너무 사랑하는 것도 죄악이다." 

얼마 전 그 후배를 만났더니 15년 전 했던 말을 여태 기억하고 있더구나. 표현이 고약했다는 건 인정한다. 다만 그 말은 아빠가 너와 동생인 신소2를 대할 때도 늘 마음속 필터로 장착한 것이었다. 자식 사랑이 지나쳐서 생기는 사회 문제가 모자라서 생기는 사회 문제보다 훨씬 크고 고질적이라는 사실은 예나 지금이나 엄연하다. 유명짜한 인사들이 제 자식 위하느라 숱하게 죄를 짓는다.

'사이를 한 칸 띄운 나란히'의 관계
 
 아빠와 딸(자료사진).
ⓒ pixabay
 
아빠는 서로 '곁'이 되어주는 게 바람직한 부모-자식 관계라고 믿는다. 곁이란 '거리 없는 위아래'가 아니라 '사이를 한 칸 띄운 나란히'다. 아빠는 너희에게 쿨하면서도 살가운 벗이고자 했다. 네가 다섯 살 때, 자전거 뒤에 태우고 들판을 달리며 외쳤다. "우리 평생 친구로 지내자." 너도 흔쾌히 그러자 했다. 갓 태어난 네 앞에서 아빠는 주문처럼 '입시지옥 해방'을 떠올렸다. 

'자유방임'이 아빠의 교육관이 된 건 순리였다. 중학생이던 네가 학교 가기 싫은 날 "선생님한테 아프다고 전화 좀 해줘" 부탁하면 아빠는 가장 공손한 말투로 기꺼이 공범이 되었다. "고마워" 하고 놀러 나가는 뒷모습에 웃음 짓다 말고, 아빠가 네 롤 모델로 사는 게 곧 교육이겠거니 생각했다. 롤모델이 되고자 한 덕분에 아빠는 조금쯤 더 노력하는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러나 네 삶이 훌륭한 건 아빠의 롤모델이 훌륭했던 덕분은 아니다. 아빠의 교육관은 너희가 아빠의 울타리 안에 머물 때만 유효했다. 울타리 바깥에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무간지옥에서는 아무런 힘도 돼줄 수 없었다. 네가 동시대 젊은이들에 견줘 얼마나 훌륭한 삶을 일궜는지는 알지 못한다. 네 삶의 훌륭함은 네가 스스로 일궈온 데서 비롯되는 훌륭함일 터이다. 그게 얼마나 두렵고 막막한 길이었는지, 아빠는 감히 안다 할 수 없다. 네 곁에서 느낀 공명으로 겨우 짐작할 따름이다.

네가 헤어디자이너 인턴으로 첫발을 내딛기 전날 밤, '오래 서 있어야 하는데 발이라도 편하라'며 운동화 한 켤레를 사주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광역버스 안에서 너와 신소2가 나란히 앉고, 아빠는 복도를 사이에 두고 앉았다. 밝지 않은 조명 아래인데도 네 뺨이 불그스레 상기돼 있는 걸, 왜 상기돼 있는지를 모를 수 없었다. 그럼에도 아빠는 너와 한 칸 사이를 띄운 나란함으로, 너 자신도 불안할 수밖에 없는 결정과 실행을 바라보며, 아빠의 불안감을 애써 다스려 왔다.

네 인턴 생활은 아빠의 예상보다 훨씬 가혹했다. 드물게 네가 먼저 귀가해 있던 날, 식탁에 앉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네 손이 아빠 눈에 들어왔다. 양쪽 손등부터 열 손가락 끝까지 벌겋게 부르터 있었다. 20대 여성의 것이라고는 차마 믿기지 않았다. 하루 12시간도 넘게 서서 누군가의 머리를 감겨온 노동이 고스란했다. 네가 방으로 들어간 뒤 아빠는 담근 술 한 병을 눈물 꾹꾹 삼켜가며 바닥까지 보고 말았다. 방법만 있다면 네 아빠가 된 이후의 삶을 통째로 '새로고침'하고 싶었다. 

그러나 네 또래 건장한 남성들이 군 현역으로 복무하는 기간보다 두 배 긴 인턴 생활을 마치고, 넌 헤어디자이너가 되었다. 그 사이 머리카락이 박혀 가시처럼 발을 찔러대는 운동화도 수없이 바뀌었다. 아빠는 안도했고, 자랑스러웠고, 무엇보다 고마웠다.

'아빠' 대신 이름으로 불러주렴 

2016년 일이다. 아빠는 너와 신소2에게 '아빠' 대신 '영춘'으로 불러달라고 요청했었다. 진정한 곁은 호칭마저 나란해야 한다 싶어서였다. 처음에는 둘 다 신나라 했는데, 머잖아 너는 '아빠'로 되돌아갔고 신소2는 여전히 '영춘'이라 부른다. 지난 주말 폭염 속에서 두어 시간 집안 청소를 한 뒤 땀을 쏟으며 네게 머리를 깎으러 갔다. 너는 보자마자 찬물로 아빠 머리부터 헹구고는 이렇게 물었다.

"아빠, 청소하면서 에어컨 안 켰지? 전기요금 아끼려는 것도 아니잖아?" 아빠는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 "지구를 지키려고." 곧바로 네 예쁜 미간이 찌푸려지는 걸 보았다. 머리를 깎는 내내 떨떠름한 표정을 유지했던 아빠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25년 된 에어컨을 켜고 인증샷을 찍어 보냈다. 네게 답이 왔다. "그으래!! 제발!! 아빠를 위해 살아, 지구 말고." 

밤하늘 별처럼 총총한 우리 에피소드에서는 조금씩 서로의 거리를 늘리며 독자성을 확보해 온 경로가 보인다. 너와 신소2가 제가끔 성숙을 위한 분리의 과정을 또박또박 걸어간 것은 맞다. 하지만 아빠는 분기점에 붙박여 있었거나 오히려 나이가 들면서 역주행한 듯하다. 너의 결혼을 앞두고 아빠의 몸과 마음에서 나타난 퇴행적인 반응은 그 혐의에 대한 유력한 단서다. 

지난 30년 동안 말로는 사이를 띄운 나란한 관계라면서도 실상 아빠가 네게 많이 기대왔다는 방증이다. 부끄럽지만, 아빠가 네 결혼을 앞두고 '분리불안'을 겪었다는 것이 이 편지를 쓰기 직전 내린 결론이다. 결론을 내리고 나니 잔잔한 호수처럼 마음이 고요해진 걸 봐도 틀리지 않은 진단이다. 덕분에 이 편지는 네게 고마움을 전하는 편지가 되었다.
 
 결혼식 모습.
ⓒ Sinitta Leunen, Unsplash
 
아빠를 오래 잘 돌봐줘서 고맙다. 그리하여 이 편지는 다시 네 결혼을 뜨겁게 환대하는 축하 편지가 되었다.

너는 철부지 아빠를 돌보면서 성장했지만, 너 홀로 오롯이 성장한 건 결코 아니다. 뻔뻔하게 말하자면, 아빠가 네 삶에 일으킨 비바람과 눈보라도 어찌 됐든 너를 단련시켰다. 누구보다 하늘과 해와 달과 별들과 더불어 너를 우주적 차원의 존재로 키우고 돌봐 오신 친할머니와 외할머니, 할아버지, 고모, 이모들이 계신다. 아빠가 곡진한 표현으로 고마워하더라고 그분들께 전해다오. 

너와 결혼하는 걸 보면 전생에서 우주를 구한 게 틀림없는 사위 정훈에게도 전해다오. 이번 생은 소박하게 배우자에게 열과 성을 다하면 우주를 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정훈을 낳고 키워 아빠의 사위로 내어주신 사돈분들께는 아빠가 직접 감사 말씀을 드리겠다는 얘기도 빠뜨리지 말기 바란다.

가난한 아비는 이 편지 한 통이 그 어떤 물질적 지원보다 너희 부부의 앞날에 값어치가 있기를, 염치없이 바라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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