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아빠'와 '엄마의 엄마'가 되지 않으려면 [변방에서 안방으로 : 일하는 사람책]

최문희 2023. 7. 27.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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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아빠가 됐다> <새파란 돌봄> 에 이은 조기현의 신간 <몫>

일하는 사람의 기록을 담은 책을 소개한다. 송곳이 되어 준 작가의 경험과 필자의 지금을 들여다보아 변방에서 안방으로 자리를 넓혀 먹고사는 오늘의 온도를 1℃ 올리고자 한다. <기자말>

[최문희, 고정미 기자]

효녀가 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입시학원은 고사하고 대학 입학은 사치겠다 싶은 자각은 열다섯 살 무렵에 들었다. 삼 남매의 첫째였던 나는 '자연스럽게' 상고로 진학했고 취업반에서 자소서를 쓰는 연습과 글쓰기를 병행했다.

그 와중에 가세는 더 기울였고 아버지는 사업난에 앓다가 응급실에 실려 가셨다. 어머니는 병원을 들락거리며 집안 경제와 살림을 책임지셨다. 그런 비슷한 사연을 가진 친구들을 고1 교실에서 만났다. 또래보다 철이 더 들었던 친구들 중에는 홀로 아픈 아버지나 동생을 돌보는 '영 케어러'도 있었다.

만성적인 질병이나 장애, 정신 문제나 알코올·약물에 의존하는 가족을 돌보는 어린이 혹은 젊은 사람을 뜻하는 '영 케어러(Young Carer)'. 이들은 갑자기 나타난 신기루가 아니었다. 내 주변에는 많았다. 돌봄과 통학을 동시에 하며 "효자네", "효녀네" 하고 가난에 따른 책임을 전가하는 어른들의 칭찬을 삼키며 친구와 나는 청소년에서 청년들로 자라났다.

수능을 치르고 대학에 가는 사람만을 청년이라고 호명하는 한국 사회의 그늘에, 더 정확히 말하면 그 그늘 아래 친구와 나는 '강제 정주'를 당해 연민의 시선을 받으며 때때로 의문을 품었다. "나는 효녀이고 싶은 적이 없었는데?"

우리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은 "~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단하네"라는 기만적인 격려였다. 때때로 친구들은 컨테이너에 살아도 고택에 사는 정서적 여유를 갖고 살았다. 가방 메는 것보다 휠체어에 아버지를 태우는 것이 익숙했던 친구는 간식 살 돈을 아끼던 내게 방과 후 피카츄 돈가스를 사주곤 했다.

취업(현장실습)이 빈번한 고3 가을이 되자 우리는 각자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그나마 식구가 많아 돌아가며 돌봄의 의무를 나눠 가졌던 나와 달리, 홀로 생계의 책임을 졌던 친구는 몇 달 치에 달하는 부모의 약봉지를 짊어지고 고소득을 낼 수 있는 일자리를 뜬눈으로 찾아다녔다.

나는 차츰 주소지를 옮기며 고향을 떠나 살게 되었고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2019년, 내 이야기이자 친구의 이야기이기도 한 <아빠의 아빠가 됐다>를 만났다.

부모의 부모가 되는 사람들
 
 .
ⓒ 고정미
 
반가움, 먹먹함, 화남, 뿌듯함 등 수많은 감정이 파문을 일으켰다. 반가운 물결이었다. 단숨에 읽었던 조기현 작가의 책은 '부모의 부모'가 될 수밖에 없었던 나와 동생, 친구의 얼굴을 떠올리게 했다. 작가는 "끝 모를 사막 속에 갇힌 듯한 간병 터널"에 어린 자신이 '어느 날 갑자기 들어서게 된' 기막히고도 생생한 삶의 현장을 깊이 비추었다.

아버지가 응급실로 실려 왔다는 전화 한 통에 황급히 뛰쳐나온 스무 살의 어느 날로부터 그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부모의 병증을 치매로 판정받기 위해 수없이 병원과 동사무소를 쏘다닌 청년 간병인의 하루는 전투와도 같았다.

미워하고, 사랑하고, (병증을 완벽히 검증받기 위해 목표로 두었던 행정 절차와 달리) 자꾸만 아버지가 회복하는 모습에 기특해하는 그의 감정은 힘든 그 무언가만은 아니었다. 어느 날은 흐림이었고 어느 날은 맑음이었다. 그것은 고유한 영 케어러 삶의 현장이자, 스무 살 청년이 원하는 삶을 조금씩 개척해가는 운동이었다.

환자로서 남자로서 아버지로서 한 인간을 살피는 동시에 그는 가난한 청년의 현실을 '개천'으로 손쉽게 비유하는 세계의 작위를 고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천에서 용난다'가 아니라, 개천을 잇는 큰물 즉, 우리 사회의 복지 시스템이 과연 유연하게 작동하는지 당사자로서 낱낱이 살폈다. 창작자로 영화를 만들고, 치매에 걸린 아버지와 공생하기 위해 복지기관을 동분서주하며 "효자가 아닌 동등한 시민으로서 정치력을 발휘"해 온 과정을 책으로 정밀하게 알렸다.

이후 작가는 두 번째 책 <새파란 돌봄>(2022)을 통해 한 사람의 희생으로 돌봄이 지탱되는 기형적인 사회 구조를 또다시 파고들었다. 아픈 가족을 돌본 영 케어러 일곱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우리 사회가 어떻게 개개인을 지원하고 안전하게 할 수 있을지" 대안을 모색했다.

뒤늦게 매겨진 비공식 돌봄의 경제적 가치(통계청의 2019년 가계생산 위성계정에 따르면, 무급 가사 노동과 돌봄 노동의 가치는 490조 9000억)를 바탕으로 우리 사회가 어떤 정책을 수립할 수 있을지 해외의 다양한 복지 모델을 탐구했다.

저자는 영 케어러들이 돌봄으로 인해 자신이 세운 생애 과업을 포기하지 않도록, 돌봄이 삶의 결핍이 아니라 어쩌면 '다른 생애 주기를 시작하는 계기'가 될 수 있도록 협력하는 방법을 꾸준히 모색했다.

나아가 우리가 흔히 돌봄에 가하는 편견(중년 여성의 노동이라고 치부되는, 경제적 보상이 따르지 않는 활동이라는 인식) 너머를 선명히 그렸다. 저자 조기현은 현재 돌봄 커뮤니티 공동체 'N인분'을 이끌며 돌봄 청년들의 협력을 활발히 꾀하고 있다.

 <새파란 돌봄> 끄트머리에서 쓰였던 단어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생존자 발견!" 이는 영 케어러 자조 모임에서 한 청년이 되뇌었다고 저자가 구술한 언어인데, 나에게도 깊숙이 닿아 송곳으로 맴돌았다. 하여 그의 책을 읽은 또 다른 청년들, 즉 가족을 둘러싼 고통을 겪었던 또 다른 어린 사람들도 가만히 읖조렸을 감탄사이자 작은 회복의 신호탄이었음을 짐작해본다.

그의 책을 읽을 때마다 한 시절 그리고 앞으로의 시절을 회복하기 위해 고투 끝에 양지에 개업한 약국을 들른 것 같아지는 건 왜일까. 돌보거나 돌봄을 받은 시간을 비로소 존중받는 기분. 그러니까 고통에 가려진 나로서의 쓸모가 살아나는 기분을 그의 이야기로 만끽하곤 한다.

의존 없이 자립은 불가능하다
 
▲ ▲ 책 <몫> ⓒ 이매진
ⓒ 최문희
 
첫 번째 책으로 간병하는 청년의 존재를 복원하고, 그 존재들의 공동체를 세움으로써 가려진 목소리를 알린 조기현은 이제 돌봄이 시혜적인 차원이 아니라 공적인 차원에서 논의되어야 함을 힘주어 말한다.

그는 이번 신작 <몫>에서 곳, 꿈, 끈, 돈, 때, 일 여섯 단어로 '우리 삶을 나누는 주제'들을 선정하여 돌봄이란 서비스가 아니라 행정과 정치로 재구성되는 우리 사회 핵심 안건임을 주장한다.

요양원에서, 혹은 집 안에서, 시설에서 한 사람의 은폐되다시피 했던 노동으로 인식됐던 돌봄의 정의를 그만 내려놓을 것을 제안한다. 돌봄이 여럿으로 나누어 가지는 각 부분을 뜻하는 '몫'으로 해석되어야 하는 당위를 피력한다.
 
"지금 이야기되는 '공정'은 내가 피해자라 여겨지거나 약자가 되면 안 된다고 느끼게 한다. 그런 느낌은 서로 돌보지 않는 심성이 자라나게 하고 어떤 허구를 강화시킨다. 바로 내가 어디에도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허구다. 우리는 의존 없이는 자립할 수 없고 능력을 발휘할 수도 없다. 공정과 짝을 맞추는 능력주의는 우리가 상호 의존적이라는 진실을 은폐한다. 상호 의존성을 바탕으로 한 정치가 필요하다."
 
종종 밑천은 없더라도 '바닥에서부터 출발하여 건실하게 일하고 가족을 건사했다'는 성취감과 능력주의는 노동계급 내에서 극렬한 개인주의를 낳기도 한다. <사라질 수 없는 사람들>(제니퍼 M.실바)는 다음과 같이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 바 있다.
"우리는 자신의 고통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가, 아니면 가차 없이 스스로 화살을 돌리는가? 고통을 학습 기회로 여기는가, 아니면 약물로 사라지게 만드는가? 공감을 우리 옆에서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확장하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고통은 사기라며 일축하는가?"
 
이주민, 장애인, 노인, 그리고 영 케어러와 같이 아픈 가족을 돌보는 소수자들의 노동과 고통을 개인이 알아서 극복해야 할 과제로 일축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득세하는 시대를 우리는 산다. 타인의 고통이 '사기'라고 말하는 능력주의에 기댄 시선도 팽배하다. 소수자의 고통을 왜 분담해야 하냐며 삐딱한 자세로 일관하는 이웃과 가족에게는 나름의 그럴만한 인과관계와 봉착한 사연이 있음을 안다.

하지만 사실상 누군가의 돌봄으로 돌아가는 사회에서 자본은 더욱 교묘하게 소수자의 돌봄 노동을 은폐함과 동시에 효과적으로 착취해내는 꼼수를 번복해왔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한 개인의 고통이 은폐될 때마다 모두의 지속 가능한 생애, 덜 불행한 노년은 갈수록 불투명해진다.

"누군가를 돌보려 노력하던 사람이 돌봄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 닿을 때까지 허상뿐인 능력주의를 언제까지 주창할 수 있을까. 조기현이 책에서 말한 "상호 의존성을 바탕으로 한 정치"는 제니퍼 M.실버가 말한 "고통은 정치적 투쟁이 반복되는 현장"과 다르지 않다.

인간이 한 인간에게서 자신을 발견할 때

그의 말대로 "자립 준비 청년 대상 지원을 확대하고,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를 선별하는 빽빽한 기준을 느슨하게 바꿔야" 자원 불평등은 해소될 수 있다. 한 사람의 자립이 가능할 때 N인분의 건강한 노동은 지속될 수 있으니까.

그것은 시혜적 차원이 아니라 균등하게 몫을 나누는 분배의 과정인 것이다. 따라서 누군가의 희생이 당연해지지 않으려면 다면적인 노력이 뒷받침되는 돌봄 정책이 선행되어야 한다. 단순히 가족이 돌봄을 책임지는 사회는 저물어가고 있다.

팬데믹 시기 와중에 삼 년간 쓴 칼럼을 모은 <몫>에서 저자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돌봄이란 "우리가 서로 의존하며 살아간다는 진실을 바탕으로 세상을 보는 관점"이다.

"아버지를 버리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아버지의 삶을 관리하는 수준에만 머물지 않으면서,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나서는 청년의 질문은 매우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다. 그 틈바구니마다 저자 또한 누군가의 도움으로 오늘을 살아내고 있다는 소소한 발견은 길을 잃어버려 동네를 배회하던 할아버지를 만난 회고담에서 되살아난다.

저자는 어쩌면 자신의 아버지와 닮았을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할아버지, 어디 가세요? 여기가 어딘지 아세요? 집은 가까워요?" 이 질문은 노년이 된 청년, 우리 자신에게 누군가 건네는 돌봄의 질문이 되어 준다.

"인간은 관계적 존재고 인생의 특정 시기에 타인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며 실존하는 내내 상호의존적이기 때문에 사랑, 돌봄, 연대에 접근을 거부당하는 것은 심각한 인간성의 훼손이고 그 자체가 불평등이다"(<정동적 평등>, 캐슬린 린치 외). 인간이 한 인간에게서 자신을 발견할 때 고통의 저녁은 한 뼘 더 줄어들 것이다.
 
"우리는 손잡고 길모퉁이로 가서 계단에 걸터앉았다. 나는 곧바로 112에 신고해서 위치를 알렸다. 할아버지는 한 번 잡은 내 손을 놓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한여름 밤인데도 유난히 차가운 손이었다. 덩달아 나도 그 차가운 손으로 더위를 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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