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을 일깨우는 책, 세상 때를 씻어내는 말
여름휴가에 ‘독서의 시간’을 끼워넣으려는 사람들을 위해 지역 출판사들에 책 추천을 부탁했다. 지역에 터를 잡고 지역 작가들과 협력하며 좋은 책들을 만드는 출판사들이다. 여름휴가는 도시 사람들이 오랜만에 지방을 만나는 ‘로컬의 시간’이기도 하다. 지역 출판사 대표들이 쓰는 ‘여름의 책, 그리고 로컬’ 이야기를 전 주에 이어 싣는다.
“이 풍경만으로 충분해요.” 나를 만나러 온 지인이 순한 바람에 한들거리는 동천(순천의 동서를 가로지르는 천)의 버드나무를 보며 말했다. 대도시에 사는 친구들이 순천에 방문할 때면 어딜 보여줘야 근사한 추억으로 남을까 조바심이 난다. 이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벗들은 순천의 나무와 새를 만날 수 있는 나의 산책길을 더할 나위 없는 장소로 꼽는다.
‘산책의 언어’(목수책방) 우숙영 작가도 산책을 아끼는 이다. 자연 속을 걸으며 오감으로 느낀 풍경들을 촘촘하게 풀어내고 그곳에서 발견한 자연의 이름을 사전식으로 정리했다. 멋진 풍경을 보면서 ‘초록색’이라거나 ‘아름답다’는 단어에 그치고 마는 어휘력이 아쉬웠던 사람이라면, ‘물비늘’(잔잔한 물결이 햇살 따위에 비치는 모양)과 ‘다보록다보록’(풀이나 작은 나무가 여럿이 다 탐스럽게 소복한 모양) 같은 풍성한 표현에 감탄할 것이다. 몇 번이고 소리 내어 읽고 싶은 이 책을 탐독하니 눈 닿는 곳 어디든 각별해진다.
‘사계절 기억책’(블랙피쉬)의 최원형 작가 역시 세심한 자연 관찰자이다. 저자가 따뜻한 시선으로 기록한 사라지는 사계 속 생명은 쉽게 볼 수 없는 멸종위기종뿐만 아니라 참새, 다람쥐, 벚나무, 감나무처럼 늘 가까이에 있다고 여겼던 존재들이다. 우리가 언제든 그 이름을 부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생명들이 기후위기와 환경 파괴로 점차 사라지고 있음을 일깨워준다. 이 책에는 흑두루미들의 안식처가 된 순천만도 등장한다. 동천과 연결된 순천만 습지는 다양한 생물종이 살아가는 생태서식지이다. 저자는 이곳에서 붉은 노을과 철새 군무를 보았던 날을 두고 생애 가장 멋진 선물을 받은 날이라 말한다.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기 위해 낯설고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계절. 하지만 빛나는 언어로 우리의 감각을 새롭게 일깨우는 책과 함께라면 익숙한 곳에서도 기분 좋은 휴가를 보낼 수 있다.
이맘때면 어김없이 내가 사는 바닷가 동네로 많은 사람이 몰려든다. 그러면 나는 또 어디로 도망가야 하나 고민한다. 뾰족한 수는 없어서 대개는 집이나 사무실에 틀어박혀 책을 읽는다. 마음이 어지럽게 날아다닐 때,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데 사정이 허락하지 않을 때, 책은 가장 간편하게 다른 세계로 떠날 수 있는 수단이 된다. 머리가 복잡한 요즘은 책의 내용보다 오히려 살아 펄떡이는 말의 형식과 그 자체의 물성을 실컷 느껴보고 싶을 때가 잦다. 세속의 때를 지역의 건강한 입말과 생활의 언어로 씻어내고 싶을 때 나는 제주와 여수, 속초와 칠곡, 또 이북과 하동의 말 등을 찾아 떠나곤 한다.
백석 시집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다산책방)는 고향 평안도 사투리를 통해 오히려 더욱 세련된 멋을 드러내고 이 세계의 아름다운 일부를 노래해 준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저 유명한 시는 오늘처럼 습하고 무더운 여름에 오히려 더 자주 떠오르니 재밌다.
얼마 전 읽은 제주 출신의 화가 강요배의 산문집 ‘풍경의 깊이’(돌베개)는 언어 이전의 풍경과 시각적 체험으로 제주를 느끼게 해준다. 제주가 아름다운 것은 단지 그 이국적 풍경 때문만은 아니다. 그곳의 역사와 이야기는 제주라는 땅과 그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에게 아름다움을 넘어 존경심과 경외심을 품게 한다. 강요배의 2007년 작품 ‘생이여’를 보고 있으면 나도 지금보다 더 단단하고 근사한 사람이 되고 싶어진다.
다들 워낙 정신없이 살아가는 시대다. 남쪽 바닷가에서 종이책을 만들며 지내는 삶도 그렇게 한가롭지만은 않지만 그래도 뭔가 시대를 못 따라가고 있는 건 아닌지 불안해질 때도 있다. 하지만 겉돌면서 살아온 날들도 돌아보면 그런대로 나쁘지 않아서 앞으로도 크게 달라질 것 같진 않다. 지금처럼 여름이 오면 겨울을 생각하고 겨울이 오면 한여름 바닷가를 떠올리면서, 사람 많은 곳을 불편해하면서도 혼자 있으면 또 사람들이 그리워 무언가를 끄적대면서, 영어를 비롯한 온갖 외래어가 판치는 시대지만 그럴수록 더욱 모어를 사랑하면서, 그렇게 올 여름도 잘 지내볼 생각이다.
내가 처음 제주에 왔을 때, 그러니까 한 10여 년 전, 어디에서 살 것인가를 고민하며 참 많이도 돌아다녔다. “제주시는 런던이고, 서귀포시는 몰디브야!”라는 누군가의 한마디에 주저 없이 서귀포의 작은 바닷가 마을 대평리에 자리 잡았다. 늦은 봄부터 한참이나 계속되는 우기를 견딜 수만 있다면 뭐, 서귀포는 틀림없이 몰디브다. 올해도 그렇다. 7월이 다 가도록 맑은 날보단 흐리고 비 오는 날이 많은 것 같단 말이지. 우기를 피할 뾰족한 수가 있겠는가. 집에 가는 길, 화순 읍내 작은 식당에 들러 여름날 한철인 한치 한 접시에 하이볼 한 잔 들이키며 책을 꺼내 든다.
요즘 한창 읽고 있는 책은 ‘커뮤니티 자본론’(클라우드나인). 로컬 전성시대를 향해 달려가는 지금, 지역의 창업생태계에 있어 경제적 자본 보다 커뮤니티 자본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저자(전정환)가 7년간 몸담았던 제주창조경제혁신센터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설명한다. 천혜의 자연을 품은 신비로운 섬 제주가 다양한 사람들의 협업을 통해 창조의 섬으로, 창의적 연결의 섬으로 거듭나면서 그 가운데 새로운 가치가 생성되고 더 나은 로컬로 나아가는 과정은 그야말로 한 편의 한국 로컬 연대기라 할 수 있겠다.
‘놀 수 있을 때 놀고 볼 수 있을 때 보고 갈 수 있을 때 가고’(몽스북)는 언제 어디서나, 무슨 일이든 최선을 다하는 윤영미 아나운서의 에세이집이다. 제주 구좌에 ‘무모한 집’을 짓고, 오픈 30분 만에 늘 마감되는 ‘영미투어’를 운영하며 좋아하는 상품을 골라 ‘영미상회’를 여는, 그야말로 열정! 열정! 열정!을 외치며 현재를 가치 있게 살아가는 방법을 말하는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시들해지는 내 삶에 화들짝 기운이 솟아나는 기분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동안 갑자기 산방산 너머로 파란 하늘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매미 울어재끼는 소리도 와글와글 흘러든다. 덥다.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려나 보다. 오늘 퇴근길엔 사계리 우리 동네 다정한 책방 ‘어떤 바람’에 들러 신간 구경이나 실컷 해야겠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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