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여기에 있지?'... 스스로에게 되묻는다
[이향림 기자]
깊은 잠에 빠져들다
철썩철썩, 요나스 웨일을 사정없이 때리는 바다의 소리, 갑판 위에서 크루들의 아우성이 들린다. 후쿠오카-나가사키-가고시마-다네가시마에서 만난 사람들과 장소들이 뒤섞여 현실인지 꿈인지 알 수 없는 시간 속에서 허우적거리다 땀인지, 바닷물인지, 빗물인지 뒤섞인 액체 속으로 다시 침잠한다.
▲ 다네가시마에서 야쿠시마로 가는 길 다네가시마에서 나눠준 미군기지 반대 피켓을 들고 몇번을 서성이다 멀미를 느껴 잠든 승준과 나. 날씨는 비가 수시로 내리고 파도와 바람이 꽤 불었던 항해였다. |
ⓒ 공평해프로젝트 |
폭우처럼 쏟아지는 빗속에서 캡틴 브라더 쏭은 휠(운전대)를 잡고 있고, 쪼는 그 옆에서 폰으로 위치를 확인하고 있다. 저 멀리 어렴풋이 반짝이는 섬이 '야쿠시마'이다. 애니메이션 '월령 공주'의 배경인 아름다운 숲이 있는 곳이지만 지금은 아득하기만 하다. 쏭은 눈이 좋지 않아 나침반이 잘 안 보인다고 하여 서 있는 쏭 밑에 앉아 인간 나침반이 되어 "300, 300과 330 사이! 다시 300!" 시시각각 변하는 방향에 최적화된 각도를 계속해서 전했다.
'이렇게 항해 해도 되는 걸까?'
인도네시아 전통 요트 산덱부터 요나스 웨일로 제주도를 세 바퀴 돌며 훈련을 하며 가졌던 물음은 여기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다시 속이 메슥거린다. 기어이 토를 하고 만다. 점심으로 승준이 끓여준 라면 외에는 먹은 것이 없어 쓴 물만 올라온다(그렇게 기울기가 심한 상황에서도 요리하는 승준이 정말 대단해 보였고, 라면은 너무 맛있었다).
갑판에 앉아 저 멀리 희미한 불빛을 다시 바라본다. 비는 그칠 줄 모르고, 파도는 우리를 가만두지 않고, 잔뜩 낀 구름은 시야를 뿌옇게 만든다. 그래도 그 작은 불빛이 큰 위안이 된다.
첫 출항 한 지 5주
비행기, 버스, 기차, 여객선을 타고 다니며 요나스 웨일보다 조금 더 일찍 도착하여 입항할 자리도 알아보고, 그 지역에서 만날 사람들을 먼저 만나 크루들이 들어올 때 환영해 주었다. 가끔 요리도 하고, 빨래를 함께 널기도 한다. 다네가시마에서 야쿠시마까지는 여객선도 적당치 않아서 함께 요트를 탔다. 올해 초, 제주에서 새해를 본 이후 반년 만에 요트를 타게 됐다.
▲ 뿌리가 길이 된 야쿠시마 산행길 야쿠시마는 1000m가 넘는 산이 40개가 모인 웅장한 섬이다. 초보 산행부터 1박을 해야하는 코스까지 다양하게 있는데 처음에는 모르고 다녔지만 비가 많이 올때는 길이 너무 미끄럽고, 강물이 불어날 수도 있어서 유의해야 한다. 동네 사람들 얘기로는 가이드와 동행하는 것을 추천했다. 올해 1월에는 폭설이 갑자기 내리는 바람에 한국인 한 명이 실종되기도 했다. |
ⓒ 수피아 |
인근에 호텔들이 있다고 핸드폰에 나오긴 했지만, 막상 가보니 불은 다 꺼지고 입구 문까지 잠긴 호텔 몇 군데를 거쳐 문이 열린 한 호텔(이라고 하지만 여관에 가까운) 로비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리셉션에 사람은 없지만 화장실을 쓸 수 있었고, 빈 소파에 몸을 누인다. 짧은 시간이지만 회상해보니 홀로 낯선 새벽길을 걸은 것이 나도 무서웠는지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했는데 기어코 안식처를 찾아내어 스스로가 기특했다. 요트에서는 차마 큰 볼일을 볼 수가 없어 참았는데 보통의 방법으로 장까지 비우고 나니 행복감이 밀려온다(요나스 웨일에서는 좌식 요강으로 일을 보고 바다라는 자연에 돌려보내는데 배가 많이 기울 때는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끼의 시간
휴식도 취하고, 바다의 상황이 좋지 않은 관계로 이곳에 예상보다 길게 지내게 되었다. (7월 4일 입항, 7월 9일 출항) 오전에 쏭과 식초는 산에 올라가고, 나머지 크루들과 항해 이후 처음으로 해수욕을 하였다.
▲ 야쿠시마 숙소 근처 해변에서 해수욕을 한 후 아샤가 알려준 영화 <뷰티풀 그린>에서 외계인과 교신하는 포즈를 취해보았다. 그 외계인과 교신을 하고 나면 자연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고 한다. |
ⓒ 수피아 |
쪼가 가르쳐 준 대로 두 손을 수면 위에 모아서 코와 입을 물 위에 살짝 담그니 물안경 없이도 물속이 꽤 잘 보였다. 신기해하던 중에 수산이 "물뱀이다!"라고 소리를 쳤고, 우리는 다 같이 허둥지둥 물 밖으로 빠져나와 안도의 웃음을 터뜨렸다. 뒤늦게 건너온 승준은 물뱀이라는 말에 더욱 천천히 물 안을 살피며 왔고, 귀엽게 생겼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바다 옆 야쿠시마 숲에서 흘러나온 민물에서 몸을 씻었다.
▲ 야쿠시마의 석양 평소에도 석양 보는 것을 좋아하긴 하지만 이번 여행은 비행기, 기차, 버스, 화물선, 요트까지... 힘들게 온 만큼 이런 평화로운 시간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
ⓒ 수피아 |
내일이면 요나스 웨일은 아마미오시마를 향해 출항한다. 나는 그들을 배웅하고, 쏭의 지침에 따라 아마미오시마에 먼저 도착하여 오키나와 지인이 소개해준 사람을 먼저 만날 예정이다.
야쿠시마에서 바로 아마미오시마로 가는 여객선은 없다. 다시 가고시마까지 4시간 정도 여객선을 타고 가서 아마미오시마까지 가는 여객선을 타면 된다. 13시간 정도가 걸린다고 한다. 시간이나 금액 차이가 크지 않다면 야쿠시마와 아마미오시마 사이의 작은 섬들을 거쳐 가는 여객선을 탈 예정이다.
가끔 나에게 묻는다. '왜 나는 여기에 있지?' '공평해 프로젝트는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지?' 원하던 직업을 찾고, 바라던 대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었고, 답을 안다고 생각한 때도 있었는데 사실 아직 잘 모르겠다.
이 여행이 끝날 때쯤엔 명쾌한 답을 내릴 수 있을까? 어쩌면 여행 중인 지금보다 이 여정이 끝난 후에도 다를 바가 없을까 봐 두렵기도 하다. 답도 없이 글을 쓰고,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 머쓱하기도 하지만 계속해서 질문을 하게 만드는 것 또한 어렵기 때문에 흥미로운 게 아닐까 위안을 삼아본다. 항해도, 여행도, 글도 말이다.
대학을 갓 졸업한 어느 기자는 인생 처음으로 인터뷰를 하게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상대는 영화 '타이타닉'으로 유명해진 배우 케이트 윈슬렛이었다. 그녀는 떨고 있는 기자에게 이렇게 얘기를 했다.
When we do this interview,
It's going to be the most amazing interview ever.
And do you know why?
because we've decided that it is going to be.
So, we've decided right now. Me and you.
This is gonna be a really fantastic interview.
And you can ask me anything that you want.
and you don't have to be scared.
Everything gonna be amazing.
Okay, lets do it.
오늘, 이 인터뷰는 최고로 멋진 인터뷰가 될 거예요.
왜 그런 줄 아세요?
그렇게 될 거라고 우리가 정했으니까요.
우리가 지금 정한 겁니다.
기자님과 제가요.
정말 멋진 인터뷰가 될 거라고요.
원하시는 거 뭐든 물어보셔도 돼요.
두려워할 필요 없어요.
뭐든 멋질 거예요.
좋아요! 자, 합시다!
이번 공평해 프로젝트 1기는 멋진 항해, 여행이 될 것이다. 왜냐면 그렇게 될 거라고 정했다. "이마카라!(今から!)", 지금부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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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국제구호단체 '개척자들' 7-8월호 격월간지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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