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황혼이혼'을 응원하는 1박 2일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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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아 기자]
장마 빗줄기를 뚫고 우리 셋은 양재 숲속 호텔에 모였다. 내 동갑내기 친구의 황혼 이혼을 응원하는 일박이일을 위해서다. 나이 70이 코앞인 나이에 홀로서기가 어찌 두렵지 않을까? 하지만 오래 망설였던 친구는 "이혼을 단행하기로 죽을 힘을 냈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먼저 그간의 속내를 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 황혼 이혼을 선택한 친구의 결단을 응원하는 작은 여행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
ⓒ 정경아 |
"사이좋은 부부 코스프레를 하면서 살기엔 노년의 날들이 너무 길더라고. 뒤늦게라도 사람 사는 것같이 한번 살아보고 싶어. 내 인생, 아무도 뺏어가지 못하게..."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은 얼굴로 말하는 그녀. 친구의 합의 이혼 숙려기간 3개월은 현재 진행 중이다. "숙려기간이 끝날 때까지 도저히 못 기다리겠더라. 그동안 참아온 세월이 너무 억울해서였나봐." 싸우기 싫어 위자료도 요구하지 않았다.
아들이 쓰던 침대와 탁자 그리고 옷가지를 챙겨 친구는 1억 원 전세로 얻은 빌라로 이사했다. 예전 살던 집에서 차로 20 분 정도의 거리. 전 남편은 아무 말 없이 오래 써온 차 한 대를 그녀에게 주었다. 아들은 "왜 진작 이혼하지 않았냐?"며 엄마의 결정을 격려해줬단다.
"남들은 멀리 멀리 떠나라고 하는데, 나는 친구들이랑 성당이랑 동아리 회원들이 있는 이 곳을 떠나고 싶지 않았어. 도망가고 싶지도 않고. 여기에 내 인생이 전부 다 있는데 어디로 가겠니?"
황혼이혼은 경로수정
얼마 전, 그녀의 집을 찾아갔다. 거의 모든 가재도구가 오랫동안 그곳에 있던 것처럼 정돈돼 있었다. 성당 교우들과 동네 이웃들, 동아리 친구들이 하나씩 둘씩 쓰던 물건들을 가져왔다고 했다.
안 쓰는 세탁기를 들고 온 이는 사라진 부품을 수소문해 가져온 다음 직접 조립해줬다. 전자레인지나 냉장고도 중고였지만 성능은 온전했다. 이웃들은 냄비 두 개, 접시 다섯 개, 머그컵과 밀폐용기를 제각각 형편껏 들고 왔다. 김치와 밑반찬, 비타민류를 챙겨온 후배들도 있었다.
"이 모든 게 순식간에 일어났어. 이혼한 후 내 몸 하나 깃들일 작은 집 밖에는 다른 소소한 준비를 할 여력이 전혀 없던 날들이었거든."
내 눈에도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짜임새 있는 살림살이! 마치 잘 살아온 그녀의 인생 성적표를 보듯 뿌듯했다.
"돌아보면 35년 결혼생활이 꿈만 같아. 시부모님의 납득하기 어려운 말이나 행동에 상처받으면서도 오히려 그분들에게 더 잘해드리려 노력한 것도 후회가 돼. 잘못된 결혼이라는 사실, 내가 불행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었나 봐."
그렇다면 이혼은 실패일까? 내 생각에 황혼이혼은 경로수정이다. 자동차 네비게이션의 말처럼 "경로를 재탐색" 하고 수정하는, 용기 있는 행동이다.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미래는 만들어 갈 수 있기에 가능한 선택이다.
그녀에겐 친구가 많다. 나처럼 옛 직장 인연으로 만난 사이도 많지만 동네 이웃 네트워크가 실로 짱짱하다. 동급 최강 인기 비결 중 하나는 뛰어난 음식 솜씨! 직접 기른 배추와 고추로 담근 김장 김치를 택배로 선물 받고 그녀에게 반하지 않을 이가 있겠는가? 그녀는 채소와 산야초들의 약성을 연구하고 요리에 적용한다.
수시로 사람을 청해 음식을 대접하고 뭐든 함께 나눈다. 동네 친구들과 성당의 교우들이 내 집 드나들 듯 그녀의 집을 찾게 된다. 그녀는 7년째 지역 밴드의 리더로 활동한다. 코로나 사태로 한동안 외부 공연을 못했지만 연습을 거른 적은 없다. 냇가에 모여 앉아 세상살이 설움을 빨래 방망이에 실었던 옛 부인네들처럼 북을 두드리며 서로 마음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그녀에겐 네 명의 동서들이 있다. 그 중 두 사촌 동서와는 1955년 양띠 동갑이다. 그녀의 이혼으로 동서 관계는 종료. 그러나 그녀들은 굳은 자매 결의로 우정의 시대를 열었다. 그녀의 결혼생활을 오래 지켜본 동서들의 연민어린 격려와 응원이 이혼 결정에 큰 힘이 됐음은 물론이다.
만성적인 허리 통증과 약간의 건강 문제가 있긴 하지만 요즘 친구는 발랄하다. 이웃의 블루베리 농장에서 사흘간 반나절 알바로 15만 원을 벌었다는 자랑을 한다. 가을 학기엔 인근 요리학교에서 약선 음식 강좌를 맡기로 했다는 소식을 알려오기도 한다.
"앞으로 어떻게 살지는 차차 생각하려고 해. 우선은 좀 쉬면서 외롭고 게으르게 지내볼래."
하지만 그녀가 외롭기는 좀 힘들 전망이다. 그녀의 새 거처에 마련한 작은 방 하나는 이미 동네 친구들의 '원 나잇'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이웃 여성들은 찾아와 각자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그녀는 밥을 지어 저녁을 대접한다. 상처받은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그녀의 진심어린 언어를 상대방은 신뢰한다. 어느새 그녀는 상처 입은 치유자(wounded healer)가 되어간다.
너의 남은 인생을 응원해
얼얼하고 매콤한 바지락볶음과 가지 요리로 저녁을 먹고 돌아와 나란히 호텔 침대에 누운 그녀가 말한다.
"한때는 내 인생을 도둑맞은 느낌으로 피해의식에 시달렸어. 남편이 진짜로 나를 사랑해서 결혼했는지 의심하기도 했고. 가족이라는 인간관계가 너무 허망하고 비참했거든. 그렇긴 해도 남편이 나를 한때나마 사랑했던 건 분명하다고 믿고 싶어. 맞지?"
친구의 눈에 핑 눈물이 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그분들을 많이 미워했으니까 이젠 덜 미워할 거야. 남을 원망하는 데 더 이상 내 인생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이제부터 내 에너지를 조금 더 고급지게 써보려고 해. 너희들이 많이 도와주라."
나는 대답 대신 윙크를 날린다. 함께 터지는 웃음! 우리가 처음 만났던 무렵, 그녀는 잘 웃고, 잘 먹고, 유머 넘치던 20대 후반이었다. 그 매력녀의 눈빛이 눈가 주름 속에 다시 돌아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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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https://brunch.co.kr/@chungkyun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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