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 주민들은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이향림 2023. 7. 27.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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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헤노코 평화활동가들의 쉼터 '쿠션' 지킴이 이나바 상

[이향림 기자]

▲ 요트팀을 환대해준 헤노코 미군기지 반대 주민들 헤노코 인근 세다케 마을의 항구에 들어온 요트팀.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주민들과 교류가 있던 헤노코 미군기지 반대 주민들의 환대를 받으며, 다음날 같은 사진으로 오키나와 지역 신문들에도 기사화가 되었다.
ⓒ 수피아
 
6월 1일 시작된 제주-오키나와-대만을 도는 공평해 프로젝트*를 따라 후쿠오카, 나가사키, 가고시마, 요나구니시마, 다네가시마, 야쿠시마, 아마미오시마, 도쿠노시마, 오키노예라부를 거쳐 7월 18일 화요일에 오키나와현 북부 나고시(名護市)에 있는 인구 1500명가량의 작은 어촌마을인 헤노코에 도착했다. 항구에는 헤노코 미군기지 반대운동을 하는 주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송강호 선장과 교류가 있던 주민들이었다. 

(*제주-오키나와-대만을 잇는 바닷길 5000km를 무동력 요트를 타고 항해하며, 반전 메시지를 전달하고 동아시아의 바다를 공존과 평화의 바다로 만들자는 취지의 프로젝트.)

헤노코의 평화 활동가들의 쉼터이자 방문객들이 부담 없는 가격으로 숙박과 음식을 해결할 수 있는 '쿠션'. 7년간 이곳을 운영하며 많은 사람들의 가교 역할을 해온 이나바 상에게 오키나와, 헤노코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처음부터 기지가 들어서는 것을 반대했지만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를 무시하고 차별한다. 만약 도쿄에서 새로운 미군기지가 들어서는 것에 대해 주민들이 찬반 투표를 해서 70퍼센트 이상이 반대를 했다면 결코 도쿄에 새로운 기지가 들어올 수 없을 것이다." 

이나바 상은 오키나와를 일본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일본과 오키나와를 따로 표현했다. 일본을 '본토'라고 표현하는 것도 지양했다. 

"태평양전쟁(1941~45년)에서 일본군이 미국과 싸울 때 오키나와 주민들을 군인 외에도 여자와 아이들을 가리지 않고, 총알받이로 이용했으며 미국에 일본군의 정보가 누설될까 봐 집단 자결을 세뇌하고 요구했다. 만약 그렇지 않을 때는 일본 군인이 자국민인 오키나와 주민들을 직접 학살하기도 했다. 강제로 끌려온 조선인들도 많은 희생을 당했다."

일본은 패전의 대가로 오키나와를 미국에 넘겼고, 하루아침에 오키나와는 미국 땅이 되어버렸다. 1972년 일본으로 반환되었지만 미군 기지의 규모는 계속해서 커졌고, 결국 헤노코에 공군기지가 지어진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오키나와 남쪽의 후텐마에서 많은 문제를 일으켜 주민들의 공분을 사자 민심을 달래려 공군기지를 이전한다는 명목이었다. 헤노코 주민들은 바로 카누와 배를 타는 해상 팀을 꾸렸고, 그게 어느덧 19년이 되었다. 바다를 매립하려 조사를 벌이는 일본 정부가 어떤 일들을 벌이는지 보기 위해서였다. 2014년 6월, 헤노코에서 새로운 기지를 짓는 공사가 시작되었다. 

제주 강정마을에 다녀온 뒤 만들게 된 공간, '쿠션'
 
▲ 집밥의 분위기가 나는 이나바 상의 요리 유머있고 요리를 잘하는 이나바상. 믿기 힘들지만 원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대화하는 걸 꺼려했었는데 여기서는 많이 바뀌었다고 한다.
ⓒ 이향림
 
도쿄의 서쪽에 위치한 시즈오카 출신인 이나바 상, 오키나와 사람도 아닌 그는 어떻게 '쿠션'을 운영하게 됐을까? 

"이 공간은 6년 전에 생겼다. 이런 공간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은 것은 바로 제주의 강정마을에 있는 '성 프란치스코 평화센터(프코)'에 가보고 나서다."

'프코'는 오랫동안 강정마을에서 해군기지 반대 싸움을 해 온 문정현 신부가 강정마을 주민들과의 소통, 평화를 이야기하는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시작된 곳이다. 그는 유신정권 당시 74년 인민혁명당 조작 사건으로 억울하게 2년 6개월의 실형을 살았다. 다행히 2006년 재심으로 40년 만에 무죄판결을 받아 국가 배상금으로 땅을 샀고, 이후 6천 명이 넘는 시민들의 후원으로 건물이 완성되었다.

제주에 3번 방문했다는 이나바 상은 평소 헤노코 시위 현장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지만 주변에 교류를 할 수 있는 장소가 마땅히 없어서 아쉬움이 컸다. 그러다 강정마을 '프코'를 보고 실질적인 행동에 착수했고, 마침 투자자가 있어 공간을 마련하고, 직접 운영을 하게 되었다. 그의 등 뒤로 보이는 화이트보드에는 다음달까지 쿠션의 스케줄이 빼곡했다. 그에게 방문객들은 얼마나 되는지 물었다. 

"도쿄 및 오사카 등 일본 각지에서 찾아온다. 물론 반대운동이 장기화 되고, 코로나 때문에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은 꾸준히 많이 오고 있다. 다음 달에도 10명 정도의 기자들이 온다고 했다. 헤노코는 미국이 차지하려고 하는데 아마 쿠션은 한국인들이 차지하려고 그러는 게 아닐까? (웃음) 그래도 괜찮다. 많이 오셔라. 다 내어줄 수 있다.  송강호 선장을 보고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난생처음 들어본 얘기에 큰 감명을 받았다. '공평해 프로젝트'는 평화의 길로 가는 모험이다. 한국인의 힘을 느낄 수 있다." 

많은 한국인들과 외국인을 만났지만 공평해 프로젝트와 같은 기획은 처음 들어봤다며 응원을 해주었다. 
 
▲ 공평해 프로젝트를 응원해준 이나바 상 강정마을의 푸코를 보고 '쿠션'이라는 공간을 만들었다며 한국인들에게 보고 배울게 많다고 힘을 듬뿍 실어주었다.
ⓒ 수피아
 
그는 일본인들을 상대로 한 신문 편집자로서 독일에서 14년을 지냈다. 뒤셀도르프에는 1960-70년대 광부 및 간호사가 되기 위해 떠난 한국인들처럼 일본인들도 많이 살고 있었다. 이후 영국에서 5년, 그 외에도 상해, 하이난, 홍콩을 다니며 외국에 산 지 40년이 된 이나바 상. 헤노코는 언제 온 것일까?

"헤노코에는 2014년 7월에 처음 방문했다. 고작 한 달 전에 반대운동이 시작되었다고 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반대하고 있어서 굉장히 놀랐다. 일주일만 지내려고 했는데 2주가 되고 3달이 되었고, 결국 1년이 넘어 지금까지 있게 되었다. 반대 시위를 하다가 3개월 유치장에 들어가기도 했다. 오키나와는 일본에서 제외된 기분이었다."

그는 전쟁 피해자들의 유골이 묻힌 흙을 기지 매립에 이용하는 것에 반대하는 단식 투쟁에 동참하기도 했다.

외국 생활을 오래 한 이나바 상은 일본의 도시 사람들과는 대화를 하면 답답함을 느낀 경우가 많았고, 일본 사람이지만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헤노코에 오게 됐고, 오키나와 사람들에게는 다른 점을 느꼈다. 솔직하다는 점이 그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그 사이 오키나와 친구들이 늘었고, 그들이 하는 운동에 동참하며 자리를 잡게 되었다. 미군기지 반대 운동은 언제까지 지속되는 걸까? 기지가 다 지어진다면 반대운동도 끝나는 걸까. 

"지금의 노인들은 그들의 부모에게서부터 태평양 전쟁 피해를 듣고 자라왔다. 전쟁을 겪은 분들 중에 아직 살아있는 분들도 있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안다. 미군기지와 자위대가 들어서는 것은 우리를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전쟁에 대한 위험만 높아질 뿐이라는 것을 말이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한다."

쿠션 일이 너무 많다고 하소연하기도 했지만 그의 대답 속에서 느낄 수 있었다. '이나바 상도 평화운동을, 쿠션을 절대 포기하지 않겠구나'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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