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물협정 탈퇴한 푸틴의 초청…아프리카 정상들 싸늘한 이유는
러시아가 아프리카 국가들과의 관계 강화를 위해 마련한 정상회담에 아프리카 정상 21명만 참석한다. 지난 2019년 1차 정상회담 때 45개국 정상이 참여한 것에 절반에도 못 미친 규모다. 최근 러시아가 흑해 곡물협정에서 탈퇴를 선언하면서 식량 위기 가능성이 커진 아프리카 국가들이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낸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26일(현지시간) 독일 도이체벨레(DW)와 미국 워싱턴포스트(WP),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 등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오는 27·28일 양일간 열리는 러시아·아프리카 정상회담에 아프리카 주요국의 정상이 대거 불참하면서 이 지역과의 강한 유대를 과시하고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지지를 모으려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큰 타격을 입게 됐다고 전했다.
FT에 따르면, 나이지리아의 볼라 티누부 대통령, 케냐의 윌리엄 루토 대통령, 콩고민주공화국의 펠릭스 치세케디 대통령 등 아프리카 정상들이 줄줄이 불참을 선언했다. 폴 카가메 르완다 대통령, 하카인데 히칠레마 잠비아 대통령도 참석하지 않았다. 반면 이집트의 압델 파타 알-시시 대통령을 포함해 세네갈·말리·중앙아프리카공화국 정상들은 러시아를 찾았다.
흑해곡물협정 탈퇴로 싸늘해진 阿
WP는 “이번 정상회의가 단촐하게 치러진 이유는 애매한 개최 시점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앞서 러시아는 지난 17일 흑해 곡물협정의 4번째 기한 연장을 앞두고, 일방적으로 탈퇴를 선언한 뒤 흑해 연안의 우크라이나 항구 도시 오데사의 곡물 창고 등을 공습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러시아의 협정 탈퇴로 국제 곡물가가 최대 15% 상승할 수 있고, 북아프리카·중동·남아시아가 식량 위기 직격탄을 맞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아프리카의 뿔’이라 불리는 아프리카 북동부는 최근 극심한 가뭄으로 식량이 고갈된 상태다. 코리 싱오에이 케냐 외무장관은 러시아의 곡물협정 종료 선언에 대해 “아프리카의 등을 찌르는 행동”이라고 반감을 드러냈다. 시릴 라마포사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의 경제자문원인 완딜 실로보는 “(러시아의 조치가)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를 타격했다”고 말했다.
DW는 이번 정상회담에서 러시아가 곡물 공급 재개 가능성을 발표하면서 아프리카 국가들의 ‘구원자’ 행세를 할 가능성이 크다고 전했다. 실제로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가 흑해 항로 대신 우크라이나를 우회해 곡물과 비료를 공급하는 방안을 제안한 바 있다.
하지만 러시아의 아프리카 전문가인 알렉세이 트셀루노프는 “(개전 후) 폭등하던 곡물가를 낮춘 건 흑해를 통해 빠져나간 곡물의 양이 아니라, 흑해 곡물협정이 맺어졌다는 사실 자체였다”면서 “우회로 확보가 시장에서 곡물 가격을 안정시키진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바그너 용병 처리도 껄끄러운 현안
정상회담에서 곡물 협정 외에도 아프리카 내 바그너 용병 처리 문제도 ‘껄끄러운 현안’이 될 것이라고 뉴욕타임스(NYT)는 전했다. 현재 바그너 용병은 중앙아프리카 공화국·말리 등 내전 중인 아프리카 국가에 배치돼 권위주의 정부를 보호하면서 각종 이권을 챙겨왔다.
하지만 지난 6월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이끄는 바그너 용병이 러시아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아프리카 국가들은 민간 단체인 바그너 용병 대신 러시아 정부와 직접 안보 계약을 맺기를 바라고 있다. 가나 등 아프리카 일부 국가에서는 바그너 용병을 심각한 인권 침해 혐의로 기소하기도 했다.
阿 "러시아는 좋은 대안 아니다" 공감대
WP는 아프리카 정상들이 이번 러시아의 초청에 응하지 않은 근본적인 이유는 지난 2019년 정상회의에서 러시아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은 탓이라고도 분석했다. 당시 푸틴 대통령은 아프리카와의 교역을 168억 달러 규모에서 400억 달러로 늘리겠다고 했지만, 2021년 교역은 불과 177억 달러에 불과했다. 반면 아프리카와 유럽연합(EU)의 교역 규모는 2950억달러, 미국과는 837억 달러, 중국과는 2540억 달러였다.
러시아의 아프리카에 대한 인도적 지원도 미미한 수준이다. 올해 러시아는 유엔 세계식량계획(WFP)에 650만 달러만을 기부했다. 이는 온두라스(4200만 달러), 키니비사우(690만 달러) 등 최빈국보다도 적은 액수다.
국제위기그룹(ICG)의 아프리카 프로그램 책임자인 무리티 무티가는 “지난 몇 년 동안, 아프리카의 여러 국가들 사이에서 재정 지원과 구제 금융이 필요할 때 러시아를 바라보는 게 좋은 생각이 아니라는 공감대가 형성됐다”면서 “아프리카 국가들이 러시아를 암묵적으로 지원한다는 인식이 있지만, 현재로선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NYT는 서방 국가들이 이번 정상회담을 러시아와 아프리카 국가들 사이에 벌어지 틈에 쐐기를 박을 기회로 보고 있다고 전했다. 바바라 우드워드 주 유엔 영국대사는 “푸틴 대통령은 가능한 한 전 세계에 많은 고통을 안겨주려고 작정한 것 같다”면서 “러시아가 아프리카를 빈곤으로 몰아가고 있다”고 비난했다.
실제로 미국은 정상회담 기간에 맞춰 케냐와 소말리아에 재닛 옐런 재무장관을 파견했고, 우크리아나는 드미트로 쿨레바 외무장관이 세번째 전시 아프리카 순방에 나섰다고 로이터통신은 전했다. 이에 대해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미국·프랑스와 다른 서방 국가들이 외교 사절 등을 통해 정상회담을 노골적이고 뻔뻔하게 방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박형수 기자 hspark9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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