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직전, 유성룡이 꺼내 든 비책

이준목 2023. 7. 27.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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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

[이준목 기자]

'조선의 처칠'로 불리우는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은 황희, 정도전, 맹사성, 최명길, 이원익 등과 함께 한국사에서 명재상을 거론할 때 빠지지 않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임진왜란이라는 최대의 국가적 위기 속에서 전시재상(戰時宰相)으로 활약하며 벼랑 끝에 놓인 조선을 묵묵히 지탱했으며, 행정·경제·외교·민생에까지 다방면에 걸쳐 업적을 남긴 다재다능의 표본이기도 했다. 또한 그가 남긴 징비록(懲毖錄)은 지금까지도 후세들에게 역사의 처절한 교훈을 통하여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는 성찰의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다.

7월 26일 방송된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 66회에서는 '이순신을 추천한 류성룡은 왜 임진왜란 직후 탄핵당했나' 편을 통하여 유성룡의 일대기와 징비록의 탄생 비화를 조명했다.

좌의정(부총리)-병조판서(국방부장관)-도체찰사(임시지역사령관)-영의정(국무총리) 등, 조선에서 손꼽히는 고위직을 홀로 모두 역임한 인물이 있다. 단 한 사람이 특정한 시기에 일국의 국방에서 행정까지 모두 총괄하는 것은. 권신(權臣)이 아닌 이상, 정상적인 국가 체제에서는 보기드문 장면이다. 당시는 전시(戰時), 바로 임진왜란(壬辰倭亂)이라는 조선사 최대의 난세였다. 이는 그만큼 나라의 존망이 걸린 위급한 상황이었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해당 인물이 수많은 중책을 도맡아야할만큼 대단한 인재였음을 알려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가 바로 유성룡이었다. 흔히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구한 구국의 영웅하면 충무공 이순신을 가장 먼저 떠올리기 쉽지만, 내정에 있어서 유성룡이 남긴 수많은 업적들은 결코 이순신에 뒤지지 않는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조선 백성들 사이에서는 '유성룡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모두 죽었을 것이다'는 이야기가 나왔을 정도였다.

유성룡은 1542년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유중영의 아들로 경상북도 의성에서 태어났고 안동에서 자라났다. 21세가 된 유성룡은 당대의 석학이던 퇴계 이황을 찾아가 제자가 되기를 청했다. 스승 이황은 유성룡과 불과 몇 마디를 나눠보자마자 바로 그의 남다른 재능을 알아보고 "이 사람은 하늘이 낸 사람이다(天之所出者)"라며 극찬했다고 한다.

이황은 유성룡을 문하에 들인 이후에도 종종 "자네는 훗날 큰 일을 해낼 것"이라는 예언을 했다고 한다. 이황에게는 수많은 제자가 있었지만 이 정도의 찬사와 기대를 받은 것은 유성룡이 유일했다.

1566년, 25세의 유성룡은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한다. 유성룡은 조선의 대표적인 언론기관 3사에 해당하던 사간원-사헌부-홍문관을 두루 거치며 엘리트 코스를 밟았고, 41세때는 현재의 감사원장에 해당하는 사헌부 대사헌의 직위까지 올랐다. 명석한 유성룡은 업무에 능할뿐 아니라 박학다식하여 노련한 대신들도 모르는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유성룡을 찾았을 정도라고 한다.

국왕 선조도 유성룡에 대한 신임이 두터웠다. '우복집'에 따르면 선조는 "유성룡은 어진 선비이면서도 재주가 있는 바, 조정 신하들 가운데 아주 걸출한 자"라고 평하며 극찬하고 있다. 특히 유성룡은 관료들이 세력을 나누어 대립하던 당시 조선의 붕당정치에서 다툼을 중재하고 갈등 상황을 해결하는 역할을 전담하며 '조정의 해결사'로서 선조의 남다른 신임을 받았다.

임진왜란 3년 전인 1589년, 조선 조정은 일본에 통신사(사절단)을 파견하는 문제로 고민에 빠져있었다. 일본의 전국시대를 통일한 집권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나라를 침공할 계획이라는 소문이 조선에도 퍼져있었고, 심지어 조선이 이에 동참할 것이라는 루머가 나돌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이 일본에 사신을 파견한다면 명나라에도 일본과 내통한다는 오해를 살 수 있기에 사신 파견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하지만 유성룡은 선조에게 일본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으니 이를 대비하기 위하여 유능한 장수를 뽑아 국방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성룡은 일본의 위험성과 함께 허약해진 조선의 국방력이라는 문제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던 것. 선조는 유성룡의 의견을 받아들여 1590년 3월, 일본을 파견하기 위하여 통신사를 파견한다.

유능한 장수의 발탁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 한 장면.
ⓒ tvN
 
이 기간 유성룡은 빠르게 국방을 재정비하고 유능한 장수들을 발탁하는 데 앞장선다. 이 때 유성룡이 천거한 인물이 훗날 임진왜란의 영웅으로 활약하는 이순신과 권율 등이다.

유성룡은 이순신과는 세 살 터울로 어린 시절부터 막연하게 지냈던 친우였다. 하지만 승승장구한 유성룡과는 달리, 당시만 해도 이순신은 중앙조정에서는 이름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무명이었다. 과거 북방에서 복무하다가 성을 비우고 쫓았다는 이유로 파직당한 전력도 있었다. 실제로 이순신의 이름이 거론되자 조정의 반응은 싸늘했다고 한다.

하지만 유성룡은 오랫동안 가까이서 지켜본 이순신의 능력과 진면목을 확신하고 있기에 주변의 따가운 시선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선조 역시 유성룡의 청을 받아들여 이순신을 무려 7계급이나 특진시킨 정 3품 전라 좌수사로 과감하게 기용한다. 그리고 이 선택은 훗날 조선을 위기에서 구하는 신의 한수가 된다. 유성룡의 최대 업적이 '이순신을 추천한 것'이라는 이야기까지 있을 정도다.

1591년, 일본에 갔던 통신사들이 복귀하지만, 일본의 침공 가능성에 대하여 황윤길과 김성일, 두 통신사의 의견이 정반대로 엇갈리며 오히려 조정은 혼란에 빠진다. 하지만 김성일은 유성룡과의 대화에서 본인도 사실 일본의 위협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민심이 동요할까봐 일부러 자신의 생각을 숨겼다고 고백한다.

통신사들의 보고를 통하여 일본이 정말로 명나라를 침략할 아욕이 있음을 파악한 유성룡은,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사실을 알릴 것을 제안한다. 당시 명나라도 일본의 동태를 주시하며 조선과의 결탁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다행히 유성룡의 적절한 판단과 빠른 외교적 대처로 인하여 명과의 갈등이라는 최악의 상황은 면할 수 있었다.

또한 유성룡은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여 국방을 정비하는 데 주력했다. 병법에도 능했던 유성룡은 이순신에게 편지와 함께 직접 집필한 '증손전수병략'이라는 병법서를 보냈는데 이순신도 이를 읽어보고 그 다양하고 실용적인 병법에 극찬했다고 한다.

1592년, 마침내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이미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던 유성룡으로서도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는데, 당시 조선은 전면전이 아닌 기존의 왜변같은 국지적인 침입 정도로만 예상한 데다, 일본군의 실제 규모와 전력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부재했다는 한계 때문이었다. 일본은 무려 20만에 이끄는 대규모 병력과 전국시대를 거치며 다져진 전투경험과 신식무기 조총을 앞세워 파죽지세로 조선을 침공해 들어왔다.

그해 4월 30일, 선조와 조선 조정은 결국 수도를 떠나 피난길에 오른다. 유성룡 역시 동행하며 일본의 침략을 막지 못했다는 후회와 고민으로 심란할 수밖에 없었다. 평양에 도착한 유성룡은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하면서 파병을 위한 군사 외교 업무를 맡게 된다.

명나라는 당시 일본이 조선과 내통하고 있다고 의심하고 있었다. 이에 유성룡은 명나라 사신을 일본군의 동향이 훤히 내다보이는 평양성 안 정자로 초청했다. 유성룡은 평양성 공격을 한창 준비중인 일본군의 모습을 사신에게 보여주며 "내통했다면 왜적이 왜 우리를 공격하겠는가?"라고 설명했다. 그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의심을 풀게 된 명나라는, 참전하여 조선과 함께 싸우기로 결정한다.

한편 임진왜란의 전황에 뒤집을 또다른 희소식이 전해진다. 유성룡이 천거한 이순신이 수군을 이끌고 바다에서 연이은 승리를 거두며 구국의 영웅으로 등장한 것. 이순신의 활약으로 보급로가 끊긴 일본군은 더 이상 북진할 수 없었다. 당시 평양성마저 함락당하고 최북방인 의주까지 쫓겨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었던 선조와 조선 조정에겐 기적과도 같은 반전이었다. 

또한 명나라로부터 4만 명의 지원군도 도착한다. 조명 연합군은 1593년 1월, 반격에 나서서 7개월 만에 평양성을 탈환하는 데 성공하고, 한양 수복을 위하여 진군한다. 이 과정에서 유성룡은 후방에서 조명연합군을 지원하는 업무를 맡으며 군량지원, 공성 전략과 지도 제작, 임진강 도하를 위한 다리 건설 등 온갖 난제와 변수들에 능숙하게 대처하며 군사 행정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조명연합군은 벽제관 전투에서 일본군의 역습에 일격을 당하며 주춤했다. 하지만 유성룡이 발탁한 또다른 인재였던 권율이 행주산성에서 일본군을 격퇴하며 다시 전황을 반전시켰고, 일본군은 결국 한양 철수를 결정한다.

우여곡절 끝에 도성을 수복했지만 돌아온 유성룡은 탄식을 금치못했다. 한양 거리에는 조선 백성들의 시신이 즐비했고 왕실의 근간인 궁궐과 종묘마저 타버린 상황이었다. 유성룡은 페허가 되어버린 한양을 보고 목놓아 통곡했다고 한다.

한편 벽제관 전투 패배 이후 위축된 명군은 더 이상 일본군의 전투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명은 조선을 배제하고 일본과 비밀 교섭을 통하여 강화를 시도하려고 했다. 전쟁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지만 일본은 철수하지 않고 조선 국토 곳곳에 왜성을 구축하며 장기건에 돌입했다. 일본을 쫓아내지도 못하고 명나라에 배신당한 조선 조정으로서는 진퇴양난이었다. 유성룡은 이에 상심하여 몇 달간 병으로 앓아눕기도 했다.

명과 일본의 협상이 한창 진행중이던 1593년 8월, 선조는 유성룡을 다시 불러들여 훈련도감을 신설하고 그 총책임자로 영의정인 유성룡을 임명한다. 일본군의 신식무기인 조총에 대응할 수 있는 특수부대를 양성한 것.

유성룡은 여기서 전권을 부여받으며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은 파격적인 정책들을 과감하게 시도했다. 조총에 사용되는 화약 제조 문제로 고민하던 유성룡은, 일본군에서 화약을 제공했다는 혐의로 사형을 앞두고 있던 기술자 대풍손이라는 인물을 전격 사면했다. 대풍손은 이후 하루에 10kg에 이르는 화약을 만들어내며 유성룡의 은혜에 보답했다고 한다.

또한 인력난을 해결하기 위하여 훈련도감에 자원한 병사들에게는 직업군인과 같은 '봉급 지원'과 '신분 상승'이라는 파격적 혜택을 보장하면서, 수많은 백성들이 대거 훈련도감에 지원했다. 보수적인 조선 사회였지만 국가적 위기라는 특수한 상황에 걸맞게 대처할줄 알았던 유성룡의 과감한 결단은, 그가 현실적이면서도 유연한 사고를 지닌 정치인이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유성룡의 추진력을 앞세워 훈련도감을 통해 완성된 조총부대는 이후 왜란에서 조선군의 최정예로 맹활약하게 된다.

1597년, 명과 일본의 강화 협상이 결렬되며 일본이 재침공하는 정유재란이 발발한다. 여기에 조선군의 버팀목이던 이순신이 물러나는 충격적인 사건까지 벌어진다. 일본군은 거짓 정보로 조선 수군을 유도하려고 했고 이순신은 함정을 간파하고 응하지 않았다. 의심많던 선조는 명령불복종을 이유로 이순신을 파직하고 도성으로 압송하여 옥에 가두고 고문을 가했다. 그리고 이순신이 사라진 조선 수군은 원균이 이어받았으나 칠천량해전에서 참담한 패배를 당하며 궤멸당하는 비극을 겪는다.

실록에는 당시 유성룡이 친우인 이순신의 위기에도 적극적으로 비호하지 않았고, 오히려 일부분은 모함에 동조하는 듯한 어록도 남아있다. 이를 두고 이순신을 질투하는 선조의 속내를 잘알고 있던 유성룡이 알아서 몸을 사렸다는 해석에서부터, 본인과 이순신의 친분이 널리 알려져 있던 상황에서 섣불리 구명에 나서기 어려웠다는 옹호론도 존재한다. 하지만 이순신이 한달만에 옥에서 풀려나자 유성룡은 곧바로 이순신을 찾아가 밤새 그를 극진하게 챙겼다는 일화도 전한다.

1597년 9월, 백의종군을 거쳐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한 이순신은 명량해전에서 압도적인 전력차를 극복하고 일본 수군을 대파하며 전황을 반전시킨다. 또한 유성룡이 정비한 조선군 역시 일본군을 상대로 맹활약을 이어가며 일본은 더 이상 왜란 초기와 같은 우세를 점할 수 없게 됐다. 묵묵히 전쟁에 대비해온 유성룡과 이순신의 노력이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1598년 8월, 임진왜란의 전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전의를 상실한 일본군은 조선 에서 철수하기 시작한다. 7년에 걸친 기나긴 전란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승전이 눈앞으로 다가온 상황에서, 유성룡에게 뜻하지 않은 고비가 찾아온다. 명나라 정계 내부에서 '조선이 일본과 손을 잡고 고의로 전쟁을 일으켰다'는 유언비어가 나돌기 시작한 것. 이에 선조는 해명을 위하여 명나라에 보낼 사신으로 영의정 유성룡을 지목했다.

선조의 명령을 거부한 유성룡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 한 장면.
ⓒ tvN
 
하지만 유성룡은 놀랍게도 선조의 명령을 거부했다. 유성룡은 오랜 격무로 인하여 건강이 나빠진 상태였고, 굳이 자신이 아니어도 다른 재상이 갈수 있다는 것을 이유로 들었다. 하지만 붕당싸움에 빠져있던 조선 조정에서는 이를 빌미로 유성룡의 탄핵을 주장했다. 반대파들은 유성룡의 직무유기에서부터 심지어 '나라를 망친 간신'이라고 모함하기도 했다. 선조는 신하들의 상소를 받아들여 유성룡을 파직시킨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당시 군주 선조에게 쏟아진 정치적 책임을 유성룡이 희생양으로 대신 뒤집어썼다고 보기도 한다. 유성룡으로서도 선조의 입장을 고려하여 억울해도 적극적으로 해명에 나설수 없는 상황이었다.

또한 유성룡이 파직당하던 날,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일본군과의 전투중 전사하며, 조선은 임진왜란의 승리와 종전에도 나라를 지켰던 두 명의 걸출한 영웅을 모두 잃게 된다. 평생을 국가에 헌신하고도 토사구팽당한 그가 절친의 죽음이라는 비극까지 겪게 된 것이다. 

정계에서 물러난 유성룡은 이후 안동으로 내려가 여생을 보내다가 9년 후,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런데 그가 세상을 떠나고 약 90년이 흘러 돌연 유성룡의 이름이 일본까지 널리 알려지게 된다. 바로 유성룡이 남긴 징비록이 일본까지 전파된 것이다.

유성룡은 은퇴 이후 정계 복귀를 거부하고 고향에 은거하며 임진왜란 시절과 본인의 발자취를 회고하는 징비록을 남겼다. 징계할 징️(懲), 삼갈 비(毖)라는 제목처럼, 징비록은 '지난 잘못을 반성하고 경계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유성룡은 여기서 "임진왜란은 나와 같은 조정대신들의 잘못"이라며 당시 국가를 이끌었던 주요한 리더로서 미화와 자찬 대신 통렬한 성찰을 담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역사를 배우는 가장 큰 이유는 과거의 교훈을 통하여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다. 유성룡은 평화와 안일에 젖어 나라를 잃을뻔 했던 지난날을 잊지 않기 위해서 참혹했던 당시 전쟁 상황과 아픔을 상세하게 기록해 놓았다. 이를 통하여 선조들의 실수를 돌아본 후손들이 부디 나라를 더 잘 지켜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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