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 넘다 죽는 사람들... 아이의 반응이 슬프다
[조영준 기자]
▲ 다큐멘터리 <국경 너머> 스틸컷 |
ⓒ EBS |
* 주의!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다. 베를린을 동과 서로 가르는 긴 장벽이 세워진 지 28년 만의 일이었다. 왕래를 막고 있던 장벽 하나가 영구히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은 희망처럼 여겨졌지만 세계 곳곳에는 여전히 길고 높은 장벽들이 국경을 가로막고 있다. 어떤 장벽은 국가와 국가 사이의 국경에 존재하기도 하고 또 어떤 장벽은 한 국가 내에 설치되어 있기도 하다.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사이에도, 이집트와 이스라엘 사이에도, 태국과 말레이시아 사이에도 존재한다. 물론 이 외에도 국경을 마주하고 있으며 서로의 왕래를 차단하기 위해 장벽을 세워둔 국가는 훨씬 더 많다. 대륙을 막론하고.
다큐멘터리 <국경 너머>는 그런 경계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작품이다. 국경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과 국경을 넘어야 하는 이들, 그런 사람들을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돕고자 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 모두가 이 작품의 대상이 된다.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국경은 총 세 곳이다. 멕시코와 미국 사이를 가르고 있는 장벽과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짐바브웨 사이의 날카로운 철조망, 그리고 모로코와 스페인 사이의 접경지대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장벽. 지금 국경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문제와 일들이 어느 한 지역의 국지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며, 이 작품은 그 지점에 주목한다.
02.
어느 쪽에 놓이느냐에 따라 각자의 입장은 모두 다른 모습을 하게 된다. 장벽을 지키는 사람들에게도 나름의 이유가 있고, 이를 허물로 넘어가고자 하는 이들에게도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다. 이곳에 오래 있다 보면 서로의 그런 차이를 인정하게 된다고 한다. 국경을 따라 순찰하는 이들이 밀입국자들에게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유다. 오히려 이 위험한 장애물을 목숨 걸고 뛰어넘는 그들을 보고 있으면 그 간절함이 얼마나 큰지 이해하게 된다고 한다. 다만 그 과정에서 그들이 범죄를 저지르고 사고를 치는 것이 문제다. 정해진 절차가 아닌 방식으로 다른 나라로 넘어오려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는 대중의 시선도 그들에게는 외면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이 된다.
시시때때로 경계를 넘기 위해 도전하는 이들 역시 국경 레인저들이 정해진 루트를 순찰하고 그들을 잡아들이는 일이 이들의 의무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 다만 경계에 오래 머무는 이들의 삶은 계속해서 피폐해진다. 일을 해도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없고, 상상하기 어려운 종류의 폭력에도 쉽게 노출된다. 그들의 절박한 상황을 알고 이용하려는 사람들 때문이다. 경계로 한번 내몰리기 시작한 이들이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다고 한다. 목적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방식을 고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대표적인 조직이 브로커들이다. 이들은 밀입국 알선을 빌미로 사람들을 착취하고 갖은 범죄를 저지른다. 절도와 성폭행은 만연해 있다. 앞서 국경을 지키는 이들이 밀입국자들에게는 다른 감정이 없다던 이야기가 이런 의미일 것이다.
▲ 다큐멘터리 <국경 너머> 스틸컷 |
ⓒ EBS |
영화의 초중반을 지나며 섬뜩한 장면 하나가 등장한다. 4분할로 나뉜 장면을 통해 서로 다른 입장에 놓인 사람들이 번갈아가며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고 이야기하는 부분이다. 이 부분은 서로 다른 입장이 엇갈리듯 부딪히며 한 장면에서 흩어지는 느낌을 주기 위한 연출로도 충분히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주로 국경을 넘는 쪽에 위치한 이들의 가정에서 부모와 아이들이 대화를 나누는 섹션은 특별히 더 눈길이 간다. 그렇게 국경을 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는 부모의 말을 들은 어린아이가 조금도 놀라는 기색 없이 그 과정에서 죽게 되는 이들이 있음을 이해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게 되는 것은 두 가지다. 첫째는 국경도 일방적으로 넘게 되는 쪽과 그들을 막고자 하는 쪽으로 나뉘게 된다는 점. 국경에 세워진 철조망과 장벽은 수직으로 세워져서 하나의 땅을 양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기울어져 있다는 뜻이다. 국경 너머의 사람들이 다르다는 인식은 이 차이로부터 시작된다. 그들도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기본적인 감정을 느끼고, 우리와 같은 꿈과 희망을 갖고 살아간다는 점보다 차이점을 더 많이 찾게 되는 이유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언론이나 선전을 통해 그들을 먼저 만나게 되는 것 역시.
▲ 다큐멘터리 <국경 너머> 스틸컷 |
ⓒ EBS |
넘어야 하는 쪽의 사정이 간절한 만큼 이를 저지해야 하는 쪽의 책임도 막중하다. 처음에는 단순히 높고 긴 장벽을 세우는 것만이 전부였지만 이제 국경에는 수많은 센서와 카메라 등의 기술 장치를 배치하여 활용하고 있다. 한두 명의 사정을 봐주다가는 밀입국을 원하는 이들 모두를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에 놓일 것이고, 이는 국경에서의 문제가 자국 내에서의 문제로 비화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넘으려는 이들과 막으려는 이들의 대립이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는 뜻이다.
한때 선량하고 순수했던 사람도 국경에서 끔찍한 경험을 하고 나면 그 경험으로 인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기도 한다고 한다. 전쟁과도 같은 장벽과의 사투를 지나는 동안 순수함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성공하면 살아남고 성공하지 못하면 죽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나서는 서바이벌 게임처럼도 느껴진다. 이는 어느 한쪽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국경을 넘는 사람들만큼 지키는 사람들 역시 숱한 어려움에 놓이게 된다. 사정을 호소하는 이들의 모습이나 국경 근처에 남겨진 지난밤 사이 시도된 밀입국자들의 사체나 유품을 계속해서 마주하게 된다면 그 마음 역시 온전할 수 있을까.
영화는 반복해서 국경을 사이에 둔 첨예한 입장의 두 집단과 그들 뒤에서 이야기하는 찬성과 반대의 목소리를 가진 사람들을 함께 조명하는 모습이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도 동조하지도 않고 모두를 사실에 가깝게 그려내는 것이다. 어떤 해결책이나 해답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이 아주 작은 결점으로 보일 수도 있겠으나, 오랜 세월 수많은 국경에서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에 대한 답을 2시간이 채 되지 않는 작품 속에서 찾겠다는 것 역시 조금 무리라는 생각이 든다.
TAMBIEN DE ESTE LADO HAY SUENOS
이쪽 사람들도 꿈을 꾼다.
국경의 담벼락에 쓰인 문구다. 그들의 꿈이 이렇게 놓일 수밖에 없는 이 모든 상황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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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작품은 2016 EBS 국제다큐영화제에 출품된 바 있는 작품입니다. 현재 EBS 다큐멘터리 전용 플랫폼인 D-Box를 통해 유료로 관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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