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 몸 살피던 부검의가 한 말... 무너진 해병대의 자부심

손우정 2023. 7. 27. 12:09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1984년 자해 사망한 최승규 일병과 그의 형 최용규의 이야기

이 기사는 대통령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작성한 글을 축약한 것입니다. 전체 글은 2023년 9월 13일 발간 예정인 <대통령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 5년 종합활동보고서 피해사례집>에 수록할 예정입니다. <기자말>

[손우정 기자]

▲ 4남매의 어린 시절 둘째 최용규는 키도 크고 운동도 잘해 인기가 많았고, 한 살 어린 셋째 최승규는 키도 작고 내성적이었다. 동생은 형에게 크게 의지하며 살았다.
ⓒ 최용규
  
한 살 터울의 형제는 성격이 달랐다. 운동신경이 뛰어났던 형 최용규는 야구를 하며 인기도, 친구도 많았지만, 동생 최승규(1962~1984)는 책을 좋아하는 내성적인 아이였다. 형 최용규가 지역에서 야구로 명성이 자자하던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 최승규는 최용규와 초중고를 함께 다니며 늘 형에게 의지했다. 덩치 큰 친구들이 최승규를 괴롭힐 때면 항상 형이 나서 혼내줬다.

"야, 쟈 빵개(* 빵빵한 개-최용규의 별명) 동생 아이가? 쟈 건드리면 쟤네 형이 니 쥑이뿐다."

대학 야구선수가 된 형 최용규는 프로선수가 될 꿈에 부풀었다. 그런데 불같은 성격이 결국 사고를 쳤다. 훌쩍 떠나고 싶었다. 가장 편한 도피처는 군대였다. 빨리 입대할 수 있는 곳을 찾았더니 해병대였다. 자원하고 채 한 달이 안 되어서 최용규는 귀신 잡는 해병이 됐다.

그 시절 군대라는 곳이 다 그랬지만, 특히 해병대는 군기가 셌다. 그래도 최용규는 금세 적응했다. 운동신경은 타고났으니 체육대회를 하면 항상 포상 휴가를 받아냈고, 수류탄 던지기, 선착순 뛰어오기 등 몸으로 하는 것은 항상 1등을 놓치지 않았다. 신병 생활은 힘들었지만 좀 지나고 나니 버틸 만했다. 시간이 좀 더 흐르자 군이 적성에 맞는다는 생각까지 하게 됐다.

제대가 다가오자, 야구를 향한 열망이 다시 꿈틀거렸다. 다시 공을 잡고 싶었다. 프로팀 연습선수로 갈 계획이었는데, 귀가 얇았다. 힘들게 연습선수 하지 말고 고교 야구팀 코치나 하면서 실업팀이나 프로팀에 가라는 말에 솔깃해, 무보수 코치 생활을 했다. 변화구도 제대로 못 던지던 투수들과 지옥 훈련을 함께하다 보니 어깨가 망가졌다.

그래도 야구는 포기할 수 없었다. 돈도 벌어야 했다. 직장인 야구를 시작했다. 일과 야구를 병행하는 건 쉽지 않았다. 회사를 옮기고 집에도 제때 못 들어가면서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때쯤, 동생 최승규가 군대에 간다고 했다. 최용규는 자원입대해 해병이 됐지만, 동생은 차출되어 해병이 됐다.

"걱정하지 마라, 괜찮다. 다 견딜 만하다."

힘든 일이든 좋은 일이든 늘 형에게 의지하고 따랐던 동생은 형 없는 낯선 곳으로 홀로 떠나는 것이 무서웠다. 형은 늘 그랬듯 걱정하지 말라고, 그리 나쁘지 않다고,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이라고, 별것 아니라며 다독였다.

빈말은 아니었다. 최용규에게 해병대는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신병 때는 힘들었지만, 고참이 되면서 달라졌다. 신병이 힘든 만큼 고참이 편해지는 것이 그 당시 군대였다. 최용규에게 군대 기억은 제대하기 3개월 전, 모든 것에서 열외 된 순간만이 남아 있었다. 동생 역시 처음에는 힘들겠지만, 어차피 겪어야 할 일이라면 모르고 가는 게 낫다는 생각도 들었다.

동생이 입대하고 몇 개월이 지나고 새로 옮긴 직장 일이 한창 몰릴 시기의 어느 날 새벽, 전화국에서 전보가 왔다. 잠에서 깬 아버지가 전화를 받았다. 그러고는 이내 꺼이꺼이 울음을 터뜨렸다. 영문을 몰라 아버지를 한참 쳐다봤다. 아버지는 흐느낌과 통곡 사이에 겨우 한마디를 내뱉었다.

"승규가 죽었단다."

동생이 죽었다. 입대한 지 5개월이 채 안 된,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이.

1984년 8월 6일, 새벽을 가른 총소리

동생 최승규는 대학생이 귀하던 시절, 집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학비를 벌며 대학에 간 성실한 청년이었다. 2학년이 되던 해 3월 8일 입대해 신병훈련을 마치고 수도를 방위하는 해병대 제2사단으로 배치됐다. 그리고 자대배치 후 석 달이 채 되지 않았을 때, 동생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보초를 서다 소대의 근무 상황 확인 전화를 받지 못했던 것이 발단이었다.

선임은 졸고 있었던 초소병들을 찾아와 한차례 소나기 구타를 퍼부었다. 그것이 끝이 아님은 때린 선임도, 맞은 초소병들도 잘 알고 있었다. 최승규는 부대로 돌아가다 같이 보초를 선 일병 선임이 잠시 소변을 보는 사이, 초소에서 23미터 떨어진 제방 아래 풀숲으로 걸어가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자신을 겨눈 채 방아쇠를 당겼다. 최승규의 나이 이제 갓 22살, 무엇이든 될 수 있었던 꽃다운 나이였다.

형 최용규는 동생이 죽었다는 아버지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왜? 승규가 왜? 아버지도 그랬다. 승규가? 스스로? 왜? 도대체 왜? 도무지 이해되는 것이 하나 없었다. 아버지는 처음에 군이 오발 사고를 자살로 처리한 것으로 의심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스스로 목숨을 끊을 이유가 없었다.

날이 밝자 허겁지겁 서울로 올라와 친척을 만나 김포로 갔다. 둑길 위에 천막이 처져 있었고 그 안에는 몸의 모든 구멍이 솜으로 채워진 동생이 누워있었다. 의사로 보이는 남자가 부검을 시작했다. 어머니는 정신을 놓았고, 아버지도 차마 아들의 배를 가르는 것을 보지 못했다. 결국 최용규만 남았다.

가슴을 가르니 앞가슴에서만 다섯 곳의 피부밑 출혈이 발견됐다. 배에도, 허벅지에도, 정강이에도 피가 보였다. 여기저기 살펴보던 부검의는 혼잣말인 듯 설명인 듯 나지막이 말했다.

"예전부터 참 많이 맞은 거 같네…."

그제야 얼마 전, 동생이 보낸 편지가 생각났다. 한 번 부대로 와달라는 내용이었다. '선임들이 괴롭히나?'라는 생각이 잠시 스쳤지만, 매일 같이 새벽에 퇴근하던 때라 '바쁜 거 끝내고 곧 가야지'하고 말았다.

최용규는 피멍으로 얼룩져 부검대에 누워있는 동생을 보고 나서야 까맣게 잊고 있던 해병대 신병 시절이 떠올랐다. 자대배치를 받은 최용규를 처음 맞이한 건 2층 침대에서 내리꽂힌 '날아차기'였다.

"부대에 가니까 선임이 '고향이 어디야?' 물어. '네! 마산입니다!' 그랬더니 갑자기 2층에서 욕을 하더니 휙 날아 오면서 나를 발로 차더라고.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사람 고향이 광주였어. 당시는 광주에서 일이 있었던 지 얼마 안 지났을 때라, 그 선임도 고향이 광주라고 마산 출신 선임한테 엄청나게 맞았나 봐. 마산 출신이 광주 출신 후임을 때리고, 광주 출신이 마산 출신 후임을 때린 거지. 그때는 다 그랬어."

그때는 다 그랬다. 해병은 귀신만 잡은 것이 아니라 사람도 잡았다. 최승규가 특별히 심약하거나 문제가 있었기 때문은 아니다. 최승규와 같이 훈련받았던 동기는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이하 위원회)의 조사에서 당시 해병대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하루하루 맞는 게 일이었고 안 맞는 날이 없었습니다. … 당시 고참들이 곡괭이 자루를 물에 담가놨다가 그것으로 때리고, 총으로도 때리고 다수였습니다."(최승규의 동기병 ○○○, 위원회 조사기록 240~241쪽)

최용규는 그제야 동생의 죽음을 실감했다. 이번에는 화가 솟구쳤다. 소대장인지 누구인지 부검에 참여한 장교의 멱살을 잡고 소리를 질렀다.

"이 새끼들아! 내가 해병대 416기다! 느그 부대 어딨노? 부대로 가자! 앞장서그라! 우리 동생 때린 놈 얼굴 좀 보자! 가자!"

눈물과 땀, 분노와 슬픔이 뒤섞인 고함이 터져 나왔다. '나도 해병대 416기'라는 말은, 해병대의 구타에 대해 알 만큼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래도 장기까지 다 망가질 정도로 이렇게 동생을 때린 건 그 기준에서도 용서할 수 없는 폭력이라는 항의였다. 그가 기억하는 동생은 자신이 한 대만 때려도 싹싹 빌던, 순둥이 같은 아이였다. 맞는 것도 요령이 있으면 덜 아프지만, 동생은 그런 요령도 부릴 줄 몰랐다.

자대배치 3개월도 안 된 졸병이 보초를 서면서 잠을 잔 것은 군기가 빠져서가 절대 아니었다. 고등학교 생활기록부는 최승규를 "스스로 맡은 바 책임을 다하여 학급 일을 솔선하여 잘하며 책임감이 강한 학생"으로 기록하고 있었다. 최용규는 동생 죽음의 발단이 된 '졸음'이 해병대의 '곱빼기 근무' 때문이라고 했다.

"쫄병들은 선임들이 쉴 때 못 쉬어. 사역이라고 해서 고참들은 놀고 쫄병 순으로 나가서 이런저런 잡일을 해. 그러고 나서 잠도 못 자고 야간 보초를 한 시간 반 정도 서야 하는데, 다음 순번 고참들이 안 나오면 그냥 계속 서야 해. 한번 대신 섰는데, 또 안 나오면 또 서야 해. 매일 그래. 그런 상태에서 일병 이병이 자기들끼리 가만히 앉아서 보초 서는데 안 졸 수가 있어?"

누구에게나 잠이 부족한 조건이었다. 군기가 센 해병대에서 자대배치 후 채 3개월도 되지 않은 '쫄병'들은 선임들의 부족한 잠을 채우기 위해 무엇을 해야 했을까? 졸음을 참는 것이 단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육체적으로,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이었다면, 그 불가능을 채우기 위해 동원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애국심이었을까, 물에 담가둔 곡괭이 자루였을까?

풍비박산 난 집안
 
▲ 최승규의 형 최용규 최승규의 한 살 터울인 형 최용규는 해병대 416기다. 동생과 아버지가 죽은 후, 가정을 지키는 것은 오롯이 그의 책임이 되었다.
ⓒ 손우정
 
최용규는 동생 최승규의 유분(遺粉)을 화장터 인근 천변에 뿌렸다. 형제의 어머니는 차마 그 모습을 보지 못해 차 안에 머물렀다. 친척 집에서 하루를 더 머문 뒤 다시 마산으로 내려왔다.

동생의 죽음 후, 남은 가족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평소 술을 많이 마시지 못했던 아버지는 그날부터 술만 마셨다. 큰 병원의 원무과장이었던 아버지는 아침에 일어나면 막걸리부터 한 사발 들이켰다. 출근해서 점심을 먹을 땐 소주 한 병을 비웠다. 퇴근 후 집에 와서는 연거푸 맥주를 마셨다. 하루도 빼지 않고 몇 달을 그렇게 살았다.

애간장을 녹인다는 말이 있다. 간과 창자(肝腸)를 녹일 정도의 아픔이라는 의미다. 몇 달을 술과 함께 보낸 아버지의 배가 어느 날 불쑥 솟아올랐다. 부산의 큰 병원으로 가서 CT를 찍어보니 간경화에 췌장이 망가졌다. 정말로 간장이 녹은 것이다. 1985년 1월, 소스라치게 추웠던 날, 아버지는 영원히 다시 일어서지 못하게 됐다. 아들을 잃은 지 채 일 년도 되지 않았을 때였다.

최용규도 다르지 않았다. '빵빵한 개'였던 그는 '미친개'처럼 살았다. 늘 술에 취했고 화가 나 있었다. 그러나 슬픔에 빠져 있을 여유는 더 이상 없었다. 아버지도 없는 상황에서 최용규가 가장 역할을 오롯이 감당해야 했다. 홀로 남은 어머니를 여동생과 함께 살피며 택시 운전대를 잡았다. 밤낮없이 일했다. 대기업 대졸 월급이 30만 원 할 때, 하루 20만 원을 집에 가져다주기도 했다. 그렇게 내려앉은 집을 다시 세우기 위해 3년 동안 4천만 원을 모았다.

그 돈으로 미술, 웅변, 피아노를 가르치는 유아 학원을 열었는데 입소문이 나면서 대박이 났다. 원생이 유치부만 130명, 초등부가 150명 있었다. 학원을 동생에게 넘기고 인천에서 분양대행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말 그대로 '폭삭' 망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가장이었다. 홀로 남아 계신 어머니는 고혈압과 당뇨병, 퇴행성 관절염으로 인해 병원 생활을 해야 했다. 아내는 식당에서 반찬 만드는 일을 했고, 자신은 선배 일을 돕다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도 일했다. 다시 조금씩 돈을 모아 음식 솜씨가 좋은 아내와 곰탕집을 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뉴스에서 국방부가 순직 인정 범위를 자해 사망자까지로 확대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잊고 있던, 아니 잊으려고 부단히도 노력했던 동생이 떠올랐다. 순직을 인정받으면 죽은 동생을 조금이라도 위로할 수 있겠다는 실낱같은 기대로 국방부에 전화했다.

"전화해서 우리 동생도 순직 인정이 되냐고 물어봤지. 그런데 국방부에서 '아니, 자살한 장병을 어떻게 순직으로 인정해 줍니까?' 이러더라고. 아니, 뉴스에 나왔다고 하니까 첨 듣는다는 식으로 '자살은 자살이지, 그게 어떻게 순직이 됩니까?' 이러더라고."

그러면 그렇지. 다시 기대를 접었다. 그러는 사이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 아들이 죽고 31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30년이 지난, 2015년이었다.

결국 인정받은 순직, 꼭 하고 싶었던 말
  
▲ 부모님과 동생 최용규의 딸이 동생 사진과 부모님의 사진을 합성해 만들어 준 사진. 제사를 지낼 때면, 동생 최승규의 메밥도 늘 함께 올려둔다.
ⓒ 최용규
 
2018년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가 출범하자, 최용규는 한 번 더 기대를 걸기로 했다. 손으로 꾹꾹 눌러 써 가며 진정서를 완성했다. 2018년 11월 28일 진정서를 접수했다. 위원회는 조사관을 파견해 직접 조사하고 유가족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줬다. 2019년 9월 9일 해병대의 폭력에 대한 국가책임을 인정하고, 국방부 장관에게 최승규의 사망을 순직으로 재심사할 것을 요청했다. 최승규가 사망한 지 35년 만이다.

그래도 아쉬움은 남았다. 진상조사 와중에 조사관들에게 당시 최승규가 복무했던 부대 선임들을 꼭 만나게 해달라고 몇 번이나 부탁했다. 물론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도 그는 그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내가 뭐 해코지하려는 게 아니고…. 그냥 한번 꼭 만나서 말하고 싶었어. '내가 해병대 416기니까 니네 고참 맞제? 니도 동생 있을 것 아이가? 와 그랬노? 좀 살살하지!' 이렇게 한번 나무라고 막걸리 한번 같이 마시고 싶어. 그리고 '니도 참 맘고생 많았겠다.' '니도 어쩔 수 없었겠다.' '이제 같이 다 털자.' 이렇게 얘기하고 안아 주고 싶어. 만날 수만 있으면."

해병대 제대 후 최용규는 빨간 옷을 입은 해병대 군인을 보면 불러서 경례시키고 술을 사줬다. 그러나 동생의 죽음 이후 귀신 잡는 해병의 자부심은 마음속 깊은 곳으로 감춰 버렸다. 순직으로 인정받고 현충원에 위패가 모셔진 지금은 해병대의 자부심을 조금 되찾았을까? 국가에 대한, 군대에 대한 신뢰가 회복되었을까? 억울함과 분노는 얼마나 해소되었을까?

물론 완전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가 동생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조금의 위로는 되었을 것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