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K-우먼] 눈앞의 한계 뛰어넘어야 다음 장이 열린다
한국인 공채 2호로 OECD에 들어가…정책과 현실의 괴리 느껴
정년 보장에도 창업전선으로…의안·법령·정책 등 데이터 기업에 제공
편집자주 - 아시아경제는 국내외 각계각층에서 활약하고 있는 여성을 '파워 K-우먼'으로 선정해 오는 10월 24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리는 ‘2023 여성리더스포럼’을 통해 발표할 예정입니다. 이들은 성별·인종·장애·가난 등 장벽에 굴하지 않고 경계를 부수거나 뛰어넘어 새롭고 보편적인 가치를 창출한 여성 리더들입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지친 세상에 위로를 주고, 누군가의 롤모델로 자리 잡아 공동체가 나아갈 힘을 줄 것입니다. 차별에 위축되거나 경계에 갇히지 않고 맞서 싸운 사람들을 파워 K-우먼 후보로 뽑아 소개합니다.
"일단 해보면 되더라고요. 안 되면 또 방법을 찾으면 되니까요."
외교통상부·유네스코·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 선망의 대상인 국제기구를 거친 정지은 코딧(CODIT) 대표는 끊임없이 도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을 이렇게 설명했다. 정 대표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이제껏 걸어온 삶의 경로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세계 곳곳의 수재들이 모인 OECD에 '역대 2번째 한국인 공채'로 들어간 그는 정년이 보장된 직장에서 8년 만에 나와 귀국해 스타트업을 창업했다. 평탄한 길이 아닌, 스스로 가시밭길을 선택해 새로운 도전에 나선 건 노력에 기반한 실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처럼 다 외워 오는 사람은 없었다"
정 대표는 학창 시절 영국으로 유학을 간 후 공공기관에서 일하겠다는 꿈을 꿨다. 대학에 진학해 '정치경제학'을 주전공으로 선택한 후부터 그는 정책 연구에 깊게 빠져들었다. 그러던 중 외교부에서 인턴으로 국제 행사를 주관하는 경험을 하면서 국제기구에 관심이 커졌다. 행정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밟던 도중 시작한 유네스코 인턴 프로그램이 출발점이 됐다. 3개월간의 인턴 경험을 발판으로 정 대표는 OECD 공채 시험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400명 중 12명, 각 분과당 1명. 대부분의 지원자는 경제학 박사에다가, 20대는 많지 않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당시 20대 중반이자 석사 학위를 지녔던 그는 '이게 될까'라며 처음엔 스스로에게도 회의적이었다고 한다. "총 6명이 파이널 관문에 올라갔는데 경쟁자 중에는 옥스포드 대학교에서 조교수로 강의를 하고 있는 분도 있었어요. 제 경력이 초라하게 느껴졌습니다." 정 대표는 수개월간의 전형 과정을 거쳐 1999년 이후 두 번째 한국인 공채 합격자로 OECD에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그걸로 끝나는 건 아니었다. OECD는 2년에 한 번씩 승진 시험을 통해 외부 경력자들과 경쟁을 해야 자리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계속 경쟁력을 가지고 있어야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구조인 셈이다. 그렇게 5년을 버티고 정년 보장 심사(테뉴얼)를 거쳐 정 대표는 OECD의 정년 보장 자격을 얻었다. 그는 OECD에서의 순간순간이 시험의 연속이었다고 말했다. "단점이 많았던 것 같아요. 나이 어린 아시아인. 처음에는 사람으로 취급을 안 해요. 그러다가 앞에서 기조 발표를 하게 되면 '이 사람이 뭔가 있구나' 하고 다시 봐주더라고요."
남성·서양인 중심의 국제기구에서 살아남았을 수 있었던 그의 비결은 부단한 노력이다. 정 대표는 생각보다 많은 정부 부처나 국제 기구 사람들이 준비를 많이 하지 않고 온다고 전했다. 500페이지가 넘는 발표 내용을 직접 외워서 숙지한 후에 발표를 하는 그가 단연 돋보일 수 있었던 이유다. "저는 절대 주눅들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남들은 제 얼굴을 보고 있지만, 저는 제 얼굴이 안 보이잖아요. 제가 동양인이든, 여자든 남들만 보이니까 제 이야기를 잘 듣고 있는지, 제 이야기가 정말 잘 전달되고 있는지에만 집중했어요."
'골든 케이지'에서 '현장'으로 뛰어들다
하지만 정 대표는 OECD에서 어렵게 얻은 정년 보장 자격을 미련없이 버리고 8년 만에 관둔다. 그 역시 결심하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국제기구는 그에게 '금으로 된 철장(골든 케이지)'과도 같았다. 국제기구에선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지만, 막상 실제 현장의 이야기를 들여다보기 어려웠던 탓이다. "그 안에서는 무언가 중요한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지만 실제로 들여다봤을 때 각 정책은 그 나라의 현실을 모르고서 이야기할 수 없었어요. 현실과의 괴리가 크다고 느꼈어요."
현장에 발을 붙이고 싶다는 욕구가 그를 창업의 길로 이끌었다. 정 대표는 곧장 한국에 들어와 '코딧'이라는 스타트업을 창업했다. 2020년 설립한 코딧은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 기술 등을 활용해 의안·법령·정책 등 데이터를 정리한 후 기업·공공기관에 제공하는 회사다. 각종 국제기구에서 근무하면서 한국에는 정책 데이터를 분석해 제공하는 '아카이빙 서비스'가 없다는 데서 아쉬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SNS, 국회 회의록에는 어떤 내용이 나오는지, 지금의 정책과 기업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파악할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하겠다는 취지다.
창업은 다시 바닥부터 시작하는 것과 같았다. 각 국가 대표를 상대하는 국제기구와 달리, 스타트업은 일반 기업을 직접 상대해야 했다. 코딧을 처음 시작했을 당시 정 대표는 타깃 기업을 돌며 직접 영업을 했다. 영업을 하면서도 그는 주눅들지 않았다. 서비스를 파는 것보다는, 기업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그 덕에 고객 업체의 마음을 얻고, 또 새로운 서비스를 만들어갈 수도 있었다.
무작정 문을 두드린 결과, 코딧은 2년 만에 급격히 성장했다. 투자 규모만 50억원대, 1년 반 사이 8개의 특허를 출원한 회사가 됐다. 10명 정도의 고객으로부터 시작해 이제는 1000개가량의 기업이 이용하는 서비스가 됐다. 코딧은 국내를 넘어 해외 정책 정보를 제공할 수 있도록 하는 확장 작업을 진행중이다.
"도전하는 과정 자체가 이미 성공"
그가 매번 도전할 때마다 주변에선 곱지 않은 시선도 많았다. 직장을 관두고 창업에 도전할 때 그의 부모는 '왜 좋은 직장을 버리고 나오려고 하느냐'며 만류했다. 하지만 정 대표는 "조금 더 일찍 했으면 좋았겠다"라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왕 하고자 할 거면, 더 빨리 했으면 좋았겠다 싶을 정도로 후회가 없다는 뜻이다. 그는 결과가 좋든, 좋지 않든 이미 코딧을 시작하고 해나가는 과정 자체가 '성공'이라고 봤다. "얼마를 벌었는지보다 뭘 배웠고, 어느 정도 성장했고, 이걸 가지고 뭘 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건지가 더 중요한 거라고 생각해요."
"모든 것을 쏟아붓는 시기가 인생에서 한 번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물이 끓으려면 100도가 돼야 하는데, 50도 정도에서 많이 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그걸 한 번 뛰어넘어보면 그 다음이 열리는 것 같거든요." 정 대표는 자신처럼 도전하는 여성 리더들에게 이같이 전했다. 국제기구에서 정책 전문가를 꿈꾸던 그는 이제 '창업가 정신'을 갖추기 위해 부단히 노력 중이다.
◆정지은 대표는...
정 대표는 2006년 런던대학교 로열할러웨이 런던대학 정치경제학 학사를 졸업하고 외교통상부에서 7개월간 경제기구국 등에서 인턴 및 연구원으로 근무했다. 이후 2009년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정책학 석사를 마쳤다. 대학원 재학 당시 여성가족부가 운영하는 국제기구 인턴십을 통해 3개월간 유네스코에서 일했고 이후 컨설턴트로 2년간 근무했다. 이를 기반으로 2011년 약 400대1의 경쟁률을 뚫고 OECD 공채 'Young Professional'로 입사해 8년간 근무했다. 2020년에는 맞춤형 입법 및 정책 플랫폼 '코딧(CODIT)'을 창업했다.
박준이 기자 giver@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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