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기관들, '세컨더리펀드'로 싸게 나온 스타트업-벤처 담는다
산업은행, 모태펀드 등 정책적지원 뒷받침
'부실자산 탈출구 인식' 개선 필요
세컨더리펀드가 주요 연기금, 공제회 등 기관투자자들의 쇼핑리스트 상위권에 올랐다. 세컨더리 투자란 사모펀드, 벤처캐피털(VC) 등이 보유한 벤처 기업 지분을 유동화하기 위해 다른 사모펀드 등에 매각하는 거래를 의미한다. 유동성이 필요한 기존 투자자는 세컨더리 펀드에 지분을 판매해서 투자금을 회수하고, 새로운 투자자는 검증된 기업의 지분을 할인된 가격에 매입할 수 있다.
대체투자 화두는 '세컨더리펀드'‥그 배경은 기관들의 자금회수 및 유동화
27일 투자은행(IB)업계에 따르면 기관투자자 대다수는 올해를 '세컨더리 펀드의 해'로 꼽는다. A공제회 최고투자책임자는 "올해 대체투자 분야에서 기관들의 관심사는 세컨더리펀드"라고 말했다. 세컨더리펀드 투자에 대한 관심은 자본시장이 위축된 상황에서도 기존 투자금을 회수하고 새로운 투자 기회를 찾기 위한 시장 참여자들의 자구책으로도 볼 수 있다. 유동성이 필요한 기존 투자자와 검증된 투자처를 원하는 새로운 투자자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세컨더리펀드 투자는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특히 투자자 입장에선 기업가치가 현저하게 떨어진 스타트업 지분 등을 저가에 매수할 기회다. 가령 기존 펀드가 벤처기업 지분 확보에 100억원을 투자해 지분가치가 약 130억~140억원 정도로 올라갔다면 이를 10% 정도 할인된 가격에 세컨더리펀드에 매각한다.
해외에서는 이런 세컨더리펀드 시장이 국내보다 먼저 정착되고 활성화돼 있다. 펀드 가격표가 책정돼 시중에 돌아다닐 정도다. 이 펀드에 속한 자산들은 유동성이 없는 자산이지만 투자자 간 정보교류가 이뤄지면서 업계 자체적으로 매긴 가격표가 생기는 것이다. IB업계 관계자는 "대형 펀드들이 연기금에서 지속해서 펀딩을 하고 사업을 계속하려면 절대 사고가 나서는 안 되기 때문에 그들이 넘기는 물건은 안전한 편"이라며 "새로운 투자 기업을 발굴하는 것은 품이 들고 리스크도 크지만, 믿을 만한 VC가 기존에 선별해 놓은 기업들을 그대로 사 오는 것은 편리하고 상대적으로 리스크가 적다"고 설명했다.
최근 공무원연금공단은 해외 운용사인 아르디안(Ardian), 하버베스트 파트너스(HarbourVest Partners) 렉싱턴 파트너스(Lexington Partners) 등 3곳을 세컨더리펀드 운용사로 선정해 각각 400억원씩 총 1200억원 규모 투자를 진행했다. 기존에 투자한 세컨더리펀드 성과가 내부수익률(IRR) 기준 30~40%대를 기록할 만큼 좋아 추가 투자를 진행한 것이다. 해밀턴 레인(Hamilton Lane)도 국내 연기금, 공제회 등을 대상으로 펀드 레이징을 진행하고 있다.
국내서도 세컨더리펀드 시장 활기‥산업은행 등 정책적 지원 강화국내 세컨더리펀드 시장은 아직은 초기 단계지만 정책적 지원을 받으면서 급성장하고 있다. 중소기업창업투자회사 전자공시에 따르면 국내 세컨더리 투자목적의 조합은 총 67개, 전체 결성액 규모는 1조7203억원으로 집계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급격한 투자 위축으로 벤처 기업들이 중기·후기 투자 유치에 어려움을 겪게 되고, 기존 투자자들로서는 예상보다 지분 보유 기간이 길어지면서 자본의 적절한 순환을 위해서 정부와 산하기관들이 나섰다.
앞서 중소벤처기업부는 모태펀드가 일반 사모펀드에 출자할 수 있도록 모태펀드 관리 규정을 개정했다. 세컨더리펀드가 주로 일반 사모펀드여서 모태펀드 출자 대상을 확대하고, 투자 시장에 활력을 더하겠다는 의지다. 현재 모태펀드는 5000억원 규모의 세컨더리펀드 조성을 앞두고 있다. 모태펀드는 올해 출자사업으로 펀드출자자(LP)지분 유동화 펀드, 일반 세컨더리펀드로 3400억원, 벤처 세컨더리 사모펀드 1500억원을 조성하기로 했다.
이에 더해 산업은행 역시 최근 정책지원펀드 출자사업 공고를 통해 세컨더리펀드 분야에서 3개 운용사(대형 1개, 중형 2개)를 선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세컨더리 부문엔 1200억원(대형 600억원, 중형 600억원)을 출자할 예정이다. 한국벤처캐피탈협회도 세컨더리펀드 조성에 앞장서고 있다. 협회장인 윤건수 대표가 이끄는 DSC인베스트먼트는 역대 최대 규모인 2000억원을 목표로 'DSC세컨더리패키지인수펀드제1호' 펀드를 조성하고 있다. 특정 스타트업의 구주에 투자하는 게 아닌 만기가 다가오는 벤처펀드를 통째로 인수하는 펀드다.
그동안 세컨더리 펀드에 정책자금을 투입하는 것을 두고 비판적인 시각도 있었다. VC 시장에 투입되는 정책자금의 목적은 모험자본을 활성화해 벤처기업을 육성하려는 것인데, 세컨더리 펀드는 신주보다는 구주에 투자하는 비중이 더 큰 만큼 정책적 목표와는 거리가 있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최근 이런 비판적 시각보다는 회수 시장 악화에 따른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한 정책적 움직임이 불가피하다는 인식이 커지고 있다. 그만큼 벤처 시장이 어렵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다만 세컨더리 투자가 국내 시장에 제대로 안착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투자 목적을 가진 우량자산 편입을 통해 '세컨더리펀드는 부실 자산을 털어내는 펀드'라는 부정적 인식부터 해소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B 연기금 최고투자책임자는 "국내 벤처투자 업계에서도 세컨더리펀드를 출시하려는 시도가 이전보다 많아진 것 같다"며 "다만 아직 국내시장에서는 '세컨더리'에 대한 인식이 성숙하지 않아 안착에는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다"고 언급했다. 그는 "해외에서는 비유동성 대체 자산의 유동화, 조기 엑시트(자금회수), 대체 자산군의 비중조절 등 다양한 목적으로 출자자(LP)들이 기존에 보유한 자산들을 세컨더리펀드에 매각하기도 하는데 국내에서는 우량자산보다는 대체로 계속 들고 가기 곤란하거나 좀 문제가 있는 자산들을 털어내려는 동기가 여전히 큰 것 같다"며 "매력적인 자산을 펀드에 편입시키고, 운용사가 잘 선별해 담을 수 있어야 투자자의 신뢰를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박소연 기자 mus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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