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남아도는데 뭔 걱정? 이 오해가 한국 식량위기 불렀다 [위기의 식량안보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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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인의 ‘식탁’이 위협받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이상기후의 만연, 에너지 가격과 비료값 등 연일 치솟는 물가, 미·중 전략경쟁으로 인한 공급망 분절 등 중증 복합 위기에 빠졌다. 100%가 넘는 식량자급률을 자랑하던 유럽 주요국들조차 폭등하는 빵값에 살충제 사용을 줄이는 친환경 정책을 보류할 정도로 상황은 급박해졌다. 중국은 녹지를 경작지로 갈아엎기 시작했고, 일본은 주식 반열에 든 밀 생산을 서둘러 늘리겠다는 태세다. 한국인의 ‘밥상’에도 위기는 닥쳤다. 식량안보를 지키기 위한 지구촌의 총성 없는 식량 전쟁 현장을 들여다봤다.
」
“세계 식량 안보 전망을 악화시키고 식량 인플레이션을 부추길 위험이 있다.”
러시아가 흑해곡물협정을 탈퇴한 지난 17일 국제통화기금(IMF)이 내놓은 경고다. '유럽의 곡창' 우크라이나의 수출 길이 막히면 세계 식량 시장이 흔들릴 것이란 얘기다. 실제로 25일(현지시간) 미국 시카고상품거래소(CBOT) 선물 시장에서 밀 가격은 장중 전날보다 2.6% 오른 부셸(곡물 중량 단위·1부셸=27.2㎏)당 7.7725달러에 거래됐다.
지난 5개월만에 최고치로, 러시아의 협정 중단 이후 약 19% 올랐다. 해상운송 중심지인 우크라이나 남부 오데사를 연일 공습했던 러시아군은 이제 내륙 운송로인 다뉴브강 항구까지 타격하고 있다.
국제 쌀 가격도 들썩이고 있다. 지난 20일 세계 최대의 쌀 수출국인 인도는 강화된 금수 조치를 발표했다. 몬순(우기) 폭우에 경작지가 타격을 입고, 곡물 시장 물가가 요동치자 지난해 수출 물량의 절반 가량을 수출 금지 품목으로 지정했다. 이미 국제 쌀가격의 기준이 되는 태국산 쌀의 수출 가격이 1년 전보다 24%가량 오른 상태다.
인도 ‘쌀 금수조치’, 美 53년만 대통령이 식량안보 회의
세계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말 현재 헝가리 등 19개국이 식품 수출을 금지했고, 아르헨티나 등 8개국이 수출 제한을 시행하고 있다. 미국에선 지난해 9월 조 바이든 대통령 주재로 식량 안보회의가 열렸다. 백악관 차원의 식량 안보회의는 1969년 리처드 닉슨 행정부 이후 53년 만의 일이다.
식량 부족과 이에 따른 가격 상승은 민생을 위협하고 정치 혼란을 키우는 동시에 경제성장의 걸림돌이 된다. 한국도 '안전지대'가 아니다. 이날 IMF가 내놓은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에서 한국은 석달 전보다 0.1%포인트 하락한 1.4% 성장에 그칠 것으로 예측됐다. 미국·유로존·일본 등 주요국이 소비회복으로 전망치가 올랐지만, 한국은 효과를 얻지 못하고 있다. 만일 주춤했던 물가가 다시 오른다면 소비 심리가 위축되고 성장이 쪼그라들 수 있다.
정부 “식량위기는 초국가적 위협”
정부도 위기 의식을 느끼고 있다. 지난달 7일 발간한 보고서(윤석열 정부의 국가안보전략 : 자유·평화번영의 글로벌 중추국가, 대통령실)에서 식량 위기를 "개별국가 차원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초국가적 위협"이라고 규정했다.
우리나라의 식량 안보 경쟁력은 그리 높지 않은 편이다. 글로벌 정치·경제 분석기관인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이 해마다 발표하는 세계식량안보지수(GFSI) 순위에서 우리나라는 지난해 조사 대상 113개국 중 39위로 평가됐다. 10년 전(2012년 21위)보다 훨씬 뒷걸음질 친 모습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중 최하위권에 해당했다.
기후, 경작지 면적에서 한국보다 불리할 것으로 여겨지는 아랍에미리트(UAE·23위), 카타르(30위) 등 걸프 지역의 사막 국가, 영토가 좁은 도시국가 싱가포르(28위)보다 낮은 순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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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 급증 밀·옥수수·콩, 대부분 수입
1970년 79.5%이던 한국의 식량자급률(칼로리 기준)은 지난해 32%로 해마다 최저치를 경신하고 있다. 곡물 자급률도 2021년 기준 20.9%로 매년 낮아지고 있다. 경지면적도 해마다 줄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 경지 면적은 152만8000㏊로 2012년 이후 10년 연속 감소세다.
우리나라는 연간 1700만t의 곡물을 수입하는 세계 7위의 곡물 수입국이다. 종종 "(과잉 생산으로) 쌀이 남아돌아 걱정 없다"는 얘기도 나오나, 이는 국민의 변화한 식생활을 고려하지 않은 오해다. 쌀밥 식사의 비중은 급속히 감소했고, 밀·옥수수·콩으로 만든 가공식품을 즐기는 게 라이프 스타일로 자리잡았다. 또한 육류 소비가 늘면서 사료용 곡물 수요도 급증하고 있다.
실제로 국민 1인의 하루 공급 열량서 주식인 쌀이 차지하는 비중은 1970년 49.2%에서 2021년 20.1%로 낮아졌다. 이에 따라 2021년 기준 자급률이 84.6%인 쌀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외국산에 의존하고 있다. 빵·파스타 등으로 수요가 크게 늘어난 밀의 식량 자급률은 1.1%, 다양한 식품과 식용유 원료로 쓰는 옥수수는 4.2%, 식물성 단백질의 대명사인 콩은 23.7%에 그친다.
때문에 국내 곡물 시장도 국제 식량 가격이 요동치면 덩달아 휘청일 수밖에 없는 구조다. 관련 무역수지 적자도 증가하고 있다. 농촌경제연구원이 유엔 통계를 분석한 결과 2021년 한국 농축산물 무역수지 적자 규모는 254억9900만 달러로, 전년보다 51억3100만 달러가 늘었다. 통계를 집계한 이래 최대 규모로, 중국·일본·영국에 이어 세계에서 적자 폭이 큰 나라였다.
동맹국 중심으로 식량 수입원 확보해야
김동환 농식품신유통연구원장(안양대 글로벌경영학과 교수)은 “외부 영향을 받지 않고 적정 가격을 유지하려면 해외 산지와 직접 접촉해 장기계약을 맺고 곡물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현지 곡물 조달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며 “일본의 경우 전농(한국의 농협)의 자회사 전농그레인을 통해 해외 농가와 직접 계약·수입하고 있다”고 말했다.
물론 수입처만 늘리는 게 능사는 아니다. 김 원장은 “미·중 갈등 등 안보환경이 불안한 상황에선 다양한 공급원보다 확실한 공급원이 더 중요하다”며 “미국·호주 등 식량이 풍부한 동맹국 중심으로 식량 계약을 추진해 유사시에도 안정적으로 곡물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밀·콩 재배 농가에 쌀 수준 소득 보장해야”
장기적으론 식량자급률을 높이는 데 힘써야 한다. 쌀에만 집중돼 있는 국내 경작지를 줄이는 대신, 밀 등 다른 작물의 경작지를 확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농가에 줄 ‘당근’이 있어야 한다. 임정빈 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 교수는 “최소한 밀·콩·옥수수 같은 주요 곡물에 한해서는 쌀 대신에 이들 곡물을 재배하면 보조금을 주는 정책으로 쌀 농가 수준의 소득을 보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정부 차원의 비상계획을 수립하는 게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김 원장은 “식량안보라고 부르는 것처럼 식량문제는 국방 분야와 같다. 위기를 대비하는 ‘컨틴전시 플랜(비상계획)’이 필요하다”며 “일본의 경우 해외 식량 수입이 어려워질 경우 국내 부존자원을 활용해 국민에게 어디까지 필수 영양소를 공급할 것이란 비상계획을 마련해 놓고 있다”고 지적했다. 임 교수는 “주요 곡물을 정부가 보관하면 효율이 떨어지고 관리도 쉽지 않다”며 “주요 곡물을 사용하는 국내 식품·사료 기업에 보조금을 주고 이들의 곡물 창고에 정부가 확보한 곡물을 보관하는 방법도 고려할 만하다”고 했다.
「 용어사전 > 세계식량안보지수(GFSI)
글로벌 정치·경제 분석기관인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이 매년 발표하는 국가별 식량안보 현황. 세계 각국의 식량 공급능력, 영양학적 품질, 식품안전 등을 종합해 평가한다.
」
특별취재팀=김상진·임주리·이승호 기자 wonder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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