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협정 체결일에 교과서 나른 아이들…미군이 찍은 50~60년대 한국
한국전쟁 정전 협정이 체결된 1953년 7월 27일, 강원도 원주의 초등학교 6학년 학생들이 양손에 무거운 책더미를 들고 낑낑대며 선생님과 함께 교실로 옮긴다. 새로 지급받은 국어 교과서다. 전쟁통에 아이들은 남루한 옷차림이지만 표정은 밝다. 26일 한국영상자료원이 정전협정 70주년을 하루 앞두고 언론에 공개한 기록영상의 한 장면이다.
영상자료원은 이날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등에서 발굴한 기록영상을 공개했다. 1950~60년대 한국을 원조하고 재건을 도운 미군과 UN이 기록용으로 촬영한 영상이다. 영상자료원은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와 함께 약 190분 분량의 필름 24릴을 발굴했는데, 대부분이 1953년부터 1971년까지 이뤄진 미군대한원조(AFAK) 프로그램 때 촬영한 영상이다.
강성현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교수는 “주한미군 주도의 AFAK는 지역 사회를 재건하기 위해 소규모로 진행됐다”고 말했다. “주로 미군 부대 주둔지 인근 지역을 중심으로 종교, 문화 및 교육 기관을 지원하고 고아원·병원·학교 건설 등의 활동을 펼쳤다”면서 “굵직한 인프라를 지원받을 수 있었던 만큼 지역 주민 입장에선 실질적인 도움이 됐고, 직접 활동에 참여하는 모습이 영상에 생생하게 담겼다”고 설명했다.
이번에 발굴한 필름 24릴 중 16편은 최초 공개다. 학교 교과서를 인쇄했던 영등포 인쇄공장 건설 현장, 인천의 화도예배당(화도감리교회) 재건 모습 등을 담은 영상이다. 특히 피란민 구호를 위해 설치됐던 대구 사동의 우유죽급식소 앞에는 아기를 업은 여성, 노인, 아이 등 남녀노소가 모여들었고, 아이들이 식탁에 앉아 우유죽을 먹는 모습 등이 담겼다.
1960년대로 넘어가면 흑백의 영상이 컬러로 바뀌는데, 미군의 원조로 지어진 경기도 파주 상업여자고등학교 운동장에서 여고생들이 군복을 입은 미군 장병과 배구 시합을 하거나 율곡 중·고등학교에서 교직원과 학생, 미군이 삽을 들고 교정 정비작업을 함께하는 장면도 있다.(1963년 11월 12일 촬영본)
각 지역의 중요한 건물, 인물 등을 포착하고 있기 때문에 지역사 차원에서 의미가 크다. 강 교수는 "인천 화도예배당의 경우 기도처로 출발해 일제강점기 때 유지됐다가 한국전쟁 때 파괴된 뒤 재건됐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이번 영상이) 지역사 차원에서 굉장히 중요한 장면을 포착한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이번에 공개된 영상 만으로 당시 시대상을 이해하기엔 한계도 있다. 영상자료원은 “기록영상은 미군이 냉전 시기 소련과의 체제 경쟁에 활용한 것으로, 미군의 인도주의적인 모습을 부각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고 밝혔다. ‘지원하고 지도하는 미군과 그에 수동적으로 따르는 한국인’의 구도가 의도적으로 강조된 연출이 보인다는 설명이다.
정영신 카톨릭대 사회학과 교수는 “당시 한국인들은 수동적인 태도에 머무르지 않고 각종 재건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며 “영상 속 여러 장면에 대한 입체적 분석과 함께 영상 외에도 다양한 자료를 교차 검증해 원조·재건 사업을 한국인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영상자료원은 한미 동맹 70주년을 기념해 공개한 기록영상 중 핵심 부분을 27일부터 한 달 동안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웹사이트(www.kmdb.or.kr)에서 공개한다. 김홍준 영상자료원장은 “해외에서 한국 관련 영상을 찾는 것은 보물찾기와 같다. 웬만큼 수집돼서 이제는 숨어 있는 것들을 찾아내는 단계에 진입했기 때문에 한 편, 한 편이 소중하다”고 말했다. 이어 “해외 자료 담당자들이 마음을 쉽게 열지 않는 기질이 있는데 꾸준히 접촉했고, 비공식적인 채널도 활용하는 등 힘든 과정이 모인 결과”라고 덧붙였다.
영상자료원은 연말까지 130여 릴을 더 수집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후 영상에 대한 연구 및 해제 작업을 거쳐 창립 50주년을 맞이하는 내년 상반기 중 대중에 공개할 예정이다.
어환희 기자 eo.hwa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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