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학부모다, 성교육 책 빼라" 악성 민원 시달리는 공공도서관

이재환 2023. 7. 26.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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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지역서 성·인권도서 폐기 요구 쏟아져, 사서들 "막무가내" 분노... 충남교육청 "대응 검토중"

[이재환 기자]

 충남의 한 공공도서관. 지난 5월부터 충남 지역 공공도서관을 중심으로 어린이책 코너에서 성 관련 서적을 폐기할 것을 요구하는 민원이 계속 제기됐다. 이에 일부 도서관은 해당 책들을 열람실이 아닌 도서관 사무실에 이동조치한 상태다.
ⓒ 이재환
 
최근 일부 보수단체과 학부모단체들이 충청 지역의 공공도서관에 공문을 보내 성교육과 인권 관관련 도서들의 '열람 제한 및 폐기 처분'을 요구해 논란이 되고 있다. 이같은 민원을 두고 일각에선 '도서 검열' 혹은 '현대판 분서갱유'라는 비판까지 나오고 있다.

26일 취재 내용을 종합하면, 올해 들어 자신들을 학부모 혹은 학부모 단체라고 소개한 민원인들이 충남 전역과 충북 제천시의 공공도서관에 지속적으로 민원을 제기하고 있다.

이들은 지난 2019년부터 2020년 사이 여성가족부 '나다움 어린이책'으로 선정된 도서 134종과 제목에 페미니즘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도서 등에 대해 무차별적으로 폐기를 요구했다. 이들이 폐기를 요구한 책은 총 150여 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가운데 지난 5월 한 단체는 아산·홍성·서천 등 충남 지역의 19개 공공도서관에 공문을 보내 일부 어린이 성 관련 도서 및 인권 도서를 폐기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7월 초에는 학부모 단체라고 주장하는 시민들이 충북 제천시에 있는 기적의 도서관을 방문해 관련 도서를 폐기하라고 했다.

제천시립도서관에 따르면, 제천시 5개 도서관은 최근 대한출판문화협회 등에 의견을 구하는 등 책 폐기 민원에 공동대응하고 있다. '도서관인 윤리선언' 2조는 '도서관 서비스를 제공함에 있어서 자신의 편견을 배제하고 정보 접근을 저해하는 일체의 검열에 반대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도서관 측은 민원인들에게 이를 고지했는데도 폐기 요구가 계속되자, 결국 공신력 있는 외부 단체에 자문을 구한 것이다. 

민원인들은 지난 2022년 말 발표된 교육과정개정고시에서 '섹슈얼리티'를 삭제한 것을 책 폐기 근거로 들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섹슈얼리티와 전혀 무관한 인권 관련 서적까지 폐기 처분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실제로 이들이 폐기를 요청한 책 중에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를 다룬 그림책 <꽃할머니>와 <딸 인권선언>, <아들 인권 선언> 등의 책들도 포함됐다.

"폐기 근거 없다 해도 막무가내"... 충남교육청 "검토 뒤 대응할 것"

충남지역 도서관 사서들은 '모두 간행물 윤리위원회를 통과한 책들로 임의로 폐기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다만, 민원이 계속되자 일부 도서관에서는 관련 도서들을 별도의 공간에 옮겨 놓고, 교육청과 출판 관련 기관 등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 

충남에 거주하고 있는 한 사서는 "민원인들은 성에 대한 그림책, 제목에 페미니즘이란 단어가 들어간 책, 심지어 인권과 위안부 할머니들을 다룬 책들에 대해서도 폐기 요구를 했다. 책을 폐기할 법적인 근거가 없다고 설명했지만 막무가내였다"라고 전했다.

충남의 한 도서관 관장도 "지난 5월부터 두 달 동안 민원인들의 항의 전화에 시달렸다.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사서로서 자괴감이 들었다"고 호소했다. 이어 "민원인들이 빼라고 한 책들은 현재 어린이자료실에서 보존서고로 이동 조치한 상태다. 물론 열람과 검색은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번 사안을) 일종의 도서 검열이라고 보고 있다. 민원인들에게 이념과 신념이 다르다고 해서 타인을 차별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더니 오히려 '학부모로서 요구를 하는 것이다'라고 항변했다. 민원인들이 도서관에서 빼라고 주장한 책들은 간행물 윤리위원회의 심의를 통과한 책들이다. 이미 검증이 끝났다"라고 지적했다.

또 "게다가 도서관에 비치된 책은 도서관법상 사서가 임의로 폐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최근 지속적으로 민원이 나오고 있다. 대책이 필요해 보인다. 도서관 사서들이 중립을 지킬 수 있도록 국민들이 이 문제에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충남의 또 다른 도서관 사서는 "도서관법 제2조는 지역주민들에게 차별 없이 도서를 제공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공공도서관에서 책을 폐기할 때는 명백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민원인들이 문제제기한 책들은 출판 및 유통에 전혀 문제가 없는 책들이다. 공공도서관은 모든 정보를 시민들에게 편견 없이 제공할 의무가 있다. 명확한 법적 근거가 없는 상황에서 폐기 요청을 무작정 들어 줄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이어 "만약에 민원인들의 요구를 수용해서 책을 폐기하거나 검색조차 되지 않도록 막아 놓을 경우, 오히려 해당 출판사와 작가에게 행정소송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럴 경우 도서관이 패소할 확률이 높다"고 전했다.

시민사회 단체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나온다. 이진숙 충남 인권교육활동가 모임 부뜰 대표는 "백번양보해서 '섹슈얼리티'를 삭제한 2022년 교육과정개정고시가 초중고 교과서에 적용될 수 있다고 치자. 그렇더라도 간행물 윤리위원회를 통과한 일반 도서까지 이를 적용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자신들의 신념에 맞지 않는 다는 이유로 도서관에서 책을 빼라고 주장하는 것은 현대판 분서갱유로 볼 수밖에 없다"라고 비판했다.

충남교육청도 현재 대응 방안을 찾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충남교육청 관계자는 "민원 내용을 파악 중이다. 검토한 뒤 대응하겠다"고 답변했다.
 
 충남의 한 공공도서관 어린이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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