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 70주년, 평화통일을 이룰 지도자를 기다리다

박도 2023. 7. 26.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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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도의 치악산 일기] 제152화 : 정전협정 70돌 소회

[박도 기자]

 1953. 7. 27. 판문점, 정전회담 조인식, 2년여 동안 1천 시간 가까운 격렬한 논쟁으로 지루하게 끌어오던 정전협정 조인식은 1953. 7. 27. 오전 10시 정각 양측대표가 착석하여 11분 만에 끝났다. 유엔군 측 해리슨 장군과 북한 측 남일 장군은 서로 악수도 목례도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한국어 영어 중국어로 된 협정문서 정본 9통, 부본 9통에 각각 서명하였다고 한다. 왼쪽 책상에서 유엔군 측 대표 해리슨 장군이, 오른쪽 책상에서는 북한 측 남일 장군이 서명하고 있다.
ⓒ NARA
6.25전쟁 정전 70주년

2023년 7월 27일은 6.25전쟁 정전 70주년이 되는 날이다. 전선에서 총소리가 멈춘 지 70년이 지났으나 우리나라는 아직 정전(휴전) 중인 상태다. 유사 이래 이렇게 긴 정전 상태인 경우는 동서고금을 통틀어 6.25전쟁이 최장 기록이 아닐까 싶다.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정각, 동쪽 출입구로 유엔군 측 수석대표 해리슨과 실무자가 판문점 정전회담장으로 입장했다. 그와 동시에 서쪽 입구로 공산군 측 수석대표 남일과 실무자가 들어와 판문점 정전회담장에 착석했다. 양측 대표는 서로 목례도, 악수도 없었다. 시종 냉랭한 분위기였다. 정전회담장에는 북쪽으로 세 개의 탁자를 나란히 배치해 두었다. 가운데 탁자를 완충 경계지역으로 양쪽 탁자에 앉은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 대표들은 곧 무표정한 얼굴로 정본 9통, 부본 9통의 정전협정문에 부지런히 서명을 했다. 서명을 마치자 양측 선임 참모장교가 그것을 상대편에 건넸다.

이날 유엔군 측 해리슨과 공산군 측 남일은 서른여섯 번 서명했다. 정전협정 조인이 계속되고 있는 동안에도 유엔군 전폭기는 하늘에서 무력시위라도 하듯, 정전회담장 바로 근처 공산군 진지에 폭탄을 쏟았다. 그런 가운데 양측 대표는 10여 분 만에 서명을 끝냈다.

그런 뒤 그들은 정전 협정서를 교환하고 아무런 인사도 없이 곧장 회담장을 빠져나갔다. 그때가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12분이었다. 이날 정전협정 조인식은 회담장 분위기조차 글자 그대로 '정전'이었지 결코 '평화'가 아니었다. 한국전쟁(6.25전쟁) 정전협정은 25개월 만에, 모두 765차례 회담 끝에 이루어졌다.

이날 판문점 정전협정 조인식장에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심지어 기자단도 유엔군 측 기자는 1백 명 정도였고, 일본인 기자도 10명이었다. 그런데 한국인 기자는 단 두 명뿐이었다. 대한민국의 운명은 한국인 참여 없이 결정되는 어처구니없는, 비극의 현장이었다.

이날 정전협정 서명 이후에도 전투는 계속됐다. 정전협정문에는 서명 시점에서 12시간이 지난 뒤부터 전투 행위를 중지하도록 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날도 유엔군 폭격기들은 북한의 비행장과 철로들을 폭격했고, 유엔군 해군 전함들은 동해 바다에서 원산항 쪽으로 함포사격을 맹렬히 실시했다. 정전 직전 최후 순간까지도 서로가 한 하늘 아래서 살 수 없는 원수처럼 상대방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다.

전쟁에서 교전국 간 페어플레이나 자비를 바랄 순 없다. 하지만 한국전쟁은 그 시작인 북한의 기습남침에서부터 유엔군의 마지막 북한 지역 폭격까지 이 나라 백성들의 생명이나 인권은 그들의 안중에 없었다.
  
 1950. 9. 27. 전주, 학살의 현장.
ⓒ NARA
   
1953년 7월 27일 22시, 그제야 155마일 휴전선에 비로소 총성이 멎었다. 3년 1개월 남짓 지루하게 계속된 6.25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양측이 승자라고 서로 우기는)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일단 그 막을 내렸다.

이 기간 동안 양측 사상자는 민간인 포함 약 500만 명, 그리고 1천만 명의 이산가족을 만들었다. 그리고 한반도는 전쟁 전 일직선 38도선 대신 전쟁 후 구불구불한 곡선의 군사분계선으로, 또 다른 단장의, 원한과 통곡의 휴전선(DMZ)을 남겼다.

이와 반면 미국은 6.25전쟁으로 제2차 세계대전 후 침체기의 경제를 부흥시킴과 아울러 서방세계 최강국으로 부상하였다. 이웃 일본은 한국전쟁을 '신이 내린 선물'이라고 할 만큼 태평양전쟁 패전의 잿더미를 재건시키는 원동력이 됐다. 또한 북한은 김일성 유일체제를 더욱 공고히 굳혔고, 남한 역시 흔들리던 이승만 정권의 기반을 튼튼히 하는 데 큰 몫을 했다.

이와 아울러 국제무기상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조기 항복으로 산더미처럼 쌓인 무기 재고 때문에 속을 썩였다. 그러다가 6,25전쟁이 발발하자 무기 판매의 대목으로 재고정리를 말끔히 하면서 그들의 배를 한껏 두들겼다. 어쩌면 6.25전쟁이 3년이나 끌고 정전협정으로 끝난 것은 국제 무기상들의 농간이었을지도. 

한국전쟁은 결과적으로 남과 북의 힘없는, 불쌍한 어리석은 백성들만 소련제, 미국제 무기를 들고 한 핏줄, 내 형제들을 한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원수처럼 서로 무참히 죽이는 강대국의 땅따먹기 노름과 국제 무기상들의 장사노름에 놀아난 가엾고도 불쌍한 어릿광대 꼴이 됐다. 하지만 한국전쟁은 완전히 끝난 게 아니라 잠시 쉬는 정전협정으로 한반도는 어정쩡한 화약고로 계속 국제 무기상들의 좋은 먹잇감으로 남게 됐다.

- 박도의 NARA 답사 일지 및 저서 <전쟁과 사랑>에서"
   
 c81 1950. 8. 11. 한반도를 초토화시킨 c81 1950. 8. 11. 한반도를 초토화시킨 B-29 전투기들이 융탄 폭격 장면
ⓒ NARA
    
정반대의 답변

2005년 7월 20일부터 25일까지 닷새 동안 나는 평양·묘향산·백두산에서 열린 <6.15 공동선언실천을 위한 민족작가대회>에 참석한 바 있다. 그때 우리 일행은 첫날 고려호텔에서 묵었는데 호텔 방 달력에 7월 27일 날짜에 '전승절'로 표기돼 있었다. 이튿날 안내원에게 물었다.

"6.25전쟁 정전 기념일이 어떻게 '전승절'인가요?"

그러자 그는 마치 내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그동안 내가 학교나 군대에서 배운 바와는 정반대의 논리로 속사포처럼 답했다. 
  
 1950. 12. 9. 중국군 참전으로 북진한 유엔군들이 혹한 속에 장진호전투에서 후퇴하고 있다.
ⓒ NARA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6.25전쟁은 1년이 지나도 그 승부가 나지 않았다. 서로가 상대편을 군사적으로 굴복시키는 게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그런데다가 장기간 전선은 북위 38도선 일대에서 교착되자 국제 외교가에서는 정전 논의가 슬그머니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 신호탄을 쏜 첫 주인공은 미국 러시아 간 사전에 조율한 각본대로 주유엔 러시아대사 말리크였다.

그는 유엔방송을 통해 '평화의 가치'라는 제목의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러시아 인민은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종용하고, 교전국 간의 정전협상 토의가 시작되기를 희망한다."

이 한 마디는 전쟁 당사자, 특히 미국에게는 대단히 반가운 말이었다. 미국은 자존심 상 감히 청할 수는 없지만 간절히 바랐던, '불감청고소원'이었다.
   
 1951. 9. 20. 북한의 한 병사가 기어오면서 투항하고 있다.
ⓒ NARA
 
세계 최강을 자부하던 미국은 한국전쟁에서 체면상 먼저 '정전'이라는 말을 차마 먼저 꺼낼 수 없었다. 그런 가운데 대외적으로 러시아 측에서 이를 먼저 제의해 주자 미국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미국은 자신들의 본심을 숨긴 채 몽니를 부리며 겉으로는 말리크 러시아 대사의 체면을 살려주는 척, 의뭉스럽게 슬그머니 정전협상 테이블로 나갔다. 국제여론 역시 대체로 조속한 종전 방향으로 흘러갔다.
말리크 러시아 대사의 연설이 있은 지 얼마 뒤인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유엔군과 공산군 사이에 최초의 정전회담이 열렸다. 이에 한국 이승만 대통령은 완강하게 정전회담을 반대했다. 전국에서는 연일 정전(휴전)반대 관제 데모가 일어났다. '통일 없는 휴전은 있을 수 없다'고 여학생들까지 관제 데모에 나섰다. 하지만 미국은 이를 철저히 묵살했다. 정전회담이 열리자 곧 유엔군과 공산군 양측은 본회담 시작 17일 만에 5개 항의 의제와 의사일정에 전격 합의했다.
 
 1953. 6. 11. 부산, 학생들이 정전회담 반대 시위를 하고 있다.
ⓒ NARA
  
 1952. 12. 4.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 당선자가 취임에 앞서 한국전선을 시찰하고 있다. 뒤에 탄 사람이 주한 클라크 유엔사령관이다.
ⓒ NARA
 
하지만 애초 쉽게 빨리 끝나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정전회담은 포로교환문제로 더 이상 진전이 없었다. 그런 가운데 전쟁 당사국들에게 정전회담을 조속히 매듭지어야 하는 사정이 발생했다.

1952년 11월에 실시된 미 대통령선거에서 아이젠하워가 당선되면서 한국전쟁 상황이 급반전됐다. 아이젠하워는 군 출신이지만, 대통령선거에서 한국전쟁 종전을 선거공약으로 내세웠다. 미국인들은 장진호전투와 1·4 후퇴의 악몽을 잊지 않고 있었던 터라, 아이젠하워의 대선 종전 공약은 설득력이 있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출범하지마자 한국전쟁을 끝내고자 적극 노력하였다. 아이젠하워는 취임 전 당선자 신분으로 한국전선을 조용히 시찰하기도 했다. 그런데다가 러시아는 1953년 3월에 스탈린이 사망했다. 스탈린 사망은 냉전 분위기를 완화시켰다. 중국 역시 내전을 마친 지 1년 만에 한국전쟁에 참전한 터라 피폐한 국내 사정은 마냥 한국전쟁을 오랫동안 끌게 할 수 없었다. 이런 각국의 여러 긴박한 상황에서 포로문제로 질질 끌던 정전회담은 서로가 양보, 마침내 1953년 7월 27일에 체결됐다.

그날로부터 꼬박 7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새 휴전선의 철조망은 두 겹 세 겹으로 두터워지다가 그 언제부터는 철책으로 바뀌었다. 양측은 긴박한 대치 끝에 때로는 곳곳에서 사소한 총격전, 동해와 서해에서는 포격전 등 해전이 발생하기도 하고,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조차도 동족들끼리 서로 철천지원수처럼 지내고 있다. 서로 한겨레를 욕하고 총부리를 겨누며 지내고 있다.
  
 남북 정상의 첫 만남
ⓒ 김대중 이희호 기념사압회
 
거꾸로 도는 역사의 시계바늘

지난 문재인 정부 때 남북 정상간, 평양, 백두산, 판문점 등지에서 서로 화해의 손길을 잡는 등, 좋은 그림을 많이 보여줬다. 하지만 정전협정을 대신할 평화협정은커녕 끊어진 금강산 길도 개성공단 길도 열지 못하고, 윤석열 정부를 맞게 했다. 이즈음 한반도는 역사의 시계 바늘이 거꾸로 도는 듯, 남북 관계는 엄동설한으로 치닫고 있다. 정전 70주년을 비통한 마음으로 맞으면서 평화통일을 가져다 줄 겨레의 지도자를 학수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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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박도 기자의 최근 작 <대한민국 대통령>이 지금 막 출시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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