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무력화법' 두쪽난 이스라엘...시작은 "남녀유별 위법" 판결
24일(현지시간) 이스라엘 베냐민 네타냐후 극우 연립 정부의 ‘사법 정비’와 관련한 첫 번째 법안이 크네세트(이스라엘 의회)를 통과하며 이스라엘의 내홍이 극한으로 치달을 전망이다. 어떻게든 사법부를 '손질'하겠다는 네타냐후 정부ㆍ여당과 결사반대하는 지식인·진보층의 대결을 놓고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국가의 영혼(soul)을 건 싸움”이라고 평했다.
올해 1월부터 매주 주말마다 텔아비브, 하이파, 예루살렘 등 대도시에서 벌어진 시위에 이스라엘 전 국민(약 910만명) 다섯 명 중 한 명이 거리로 나섰다. 시위대는 예루살렘의 크네세트 앞에서 텐트를 치고 노숙 시위를 하는가 하면, 텔아비브에서 예루살렘까지 4박 5일 간 행군 시위도 벌였다.
급기야 조 바이든 미 대통령까지 나서서 “서두르지 말라”며 경고했지만, 네타냐후 연정은 '나홀로 질주'를 계속하고 있다. 이 같은 행보 뒤엔 오랫동안 기회를 노려온 유대교 근본주의자들과 극우 정치인들의 의지가 작용하고 있다는 평이다. “이스라엘을 유대교 중심 국가로 만들자”는 게 이들의 목표다.
①왜 하필 법원인가
대표적인 사례가 2015년 공공장소에서 유대교 지도자가 남녀를 한 장소에 있지 못하도록 한 것은 위법하다는 판결이었다. 한 시립 유대인 공동묘지의 장례식장에 참석했다가 유대교 지도자인 랍비로부터 “남성 조문객들과 화분으로 구분된 공간에 떨어져 서 있으라”는 지시를 받은 여성이 제기한 소송이었다.
하급심은 “종교에 기반을 둔 남녀 유별 조치는 차별이 아니다”고 했지만, 대법원은 “차별이 맞다”며 파기 환송했다. “여자라는 이유로 특정 장소에 분리되도록 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추구하는 세계관에 위배된다”는 원고의 주장을 받아 들였다.
2017년엔 유대교 안식일인 ‘샤바트(토요일)’에 소규모 식료품점은 문을 열 수 있도록 한 텔아비브의 조례가 합법이라고 판결했다. 또 유대교 초정통파 신학생들에게만 징병을 특별히 면제하도록 한 법률은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지난 2020년엔 유대교의 명절인 유월절에 유대인들에게 금지된 음식 ‘하메츠’를 병원 등 공공장소에서 반입 못하게 한 조치를 위법이라고 판단하기도 했다. 대법원은 이처럼 민감한 사건마다 “민주 국가에서 유대교가 아닌 시민들도 종교적 자유에 관한 기본권을 존중 받아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런 판결이 나올 때마다 의회 내 유대교 근본주의 정치인들은 “유대교에 대한 전면전”, “의회에 대한 사법부의 도전”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②누가 주도하나
이렇게 탄생한 네타냐후 극우 연정이 ‘1호 정책’으로 들고 나온 게 ‘사법 정비’였다. 1월 4월 야리브 레빈 법무부 장관이 발표한 초안은 “대법원 판사를 지명하는 법관 선정위원회를 정부·야당에 유리하게 구성하고, 대법원 판결도 의회의 과반수 의결에 따라 무효로 한다”는 게 핵심이었다.
이스라엘의 표면상 권력자는 네타냐후 총리지만, 워싱턴포스트(WP) 등 외신들은 연정의 키를 쥐고 있는 베잘렐 스모트리치(43) 재무장관과 이타마르 벤그비르(47) 국가 안보 장관을 실권자로 꼽는다. 이들은 ‘극우 킹 메이커’ ‘극우 파워커플’로도 불린다. WP는 “두 사람은 그간 극단적인 행보로 오랫동안 정치권의 이단아, 비주류 취급을 받다가 이번 정부에서 급부상했다”고 했다.
스모트리치 재무장관은 국제 사회가 불법으로 규정한 이스라엘 서안지구의 유대인 정착지에 집을 짓고 사는 인물이다. 과거 크네세트 연단에서 동료 아랍 의원들을 향해 “당신들은 1948년(이스라엘 건국 때)에 쫓겨났어야 했다”고 막말을 했다가, 의원들로부터 '파시스트 오물'이란 비판을 샀다.
벤그비르 장관도 아랍인 경비원에게 권총을 꺼내 겨냥하는 등 인종 차별적 행동으로 논란을 일으킨 인물이다. 지난 1월 이슬람의 성지인 동예루살렘의 성전산 방문을 강행해 팔레스타인은 물론 주변국의 반발을 샀다. 스모트리치와 함께 종교적 시오니스트 정당 소속인 심카 로스만(42) 크네세트 헌법·법률·정의위원장도 사법 정비안에 적극적으로 관여한 키플레이어로 꼽힌다.
③극우 제동 건 女법조 투톱
하윳 대법원장은 이례적인 공개 연설로 반정부 시위와 비판 여론에 물꼬를 텄다. 지난 1월 TV로 생중계 된 학회 연설에서 그는 “정부의 사법 정비는 사법 제도를 고치려는 계획이 아니라 무너뜨리기 위한 계획”이라며 “법관의 독립성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힌다”고 공개 비판했다. 그는“이 계획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국가의 민주적 정체성을 바꾸는 것”이라고도 했다. 이에 야당 대표인 야이르 라피드(59) 전 총리는 “국가의 영혼을 위한 투쟁에서 하윳의 편에 서겠다”고 거들었다.
바하라브 미아라 검찰총장은 내각의 일원이면서도 네타냐후를 향해 맹공을 퍼붓고 있다. 정부안 발표 이후 “의회의 다수결 원칙이 다른 민주적 가치를 궁지로 밀어 넣을 것”이라거나 “부패 혐의로 재판을 받는 네타냐후 총리가 사법부 개편을 추진하는 건 불법”이라는 소신을 밝혔다.
교수 출신의 정통 경제학자인 아미르 야론(59) 이스라엘 중앙은행 총재도 네타냐후 총리에게 “계획을 철회하라”며 진언한 인물이다. 그는 미 CNN 등에 출연해 “무리한 사법 개혁 추진으로 민주적 가치가 위태로워지면 외국인 투자가 빠져나갈 수 있다”고 발언했다. 그는 근본주의 정치인들로부터 “해외에서 이스라엘을 더럽힌다”는 공격도 받았다.
④앞으로 어떻게 되나
성문헌법이 없는 이스라엘은 기본법의 개정 요건이 상대적으로 덜 엄격하다. 크네세트 과반의 의결만으로 변경할 수 있다. 극우 연정이 의회 120석 가운데 총 64석을 차지하고 있는 만큼 앞으로도 일방 독주가 가능하다. “이스라엘이 극우주의자들에게 인질로 붙잡혔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우선 오는 10월 16일부로 임기가 끝나는 하윳 대법원장의 후임 인선을 놓고 여야는 다시 한번 부딪힐 전망이다. 로스만 의회 법률위원장은 이와 관련 “하윳과 그다음 퇴임하는 대법관까지 두 명의 후임은 정부·여당이 지명하고, 세 번째 지명 몫부터 야당 의견을 반영하자”고 제안했다. 이스라엘 의회는 7월 말 휴회에 들어가 오는 10월 다시 열린다.
이유정 기자 uu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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