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혜의 마음 읽기] 말은 글이 될 수 있을까

2023. 7. 26. 0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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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

잘 읽지 못하는 분야의 책이 있다. 말을 글로 정리한 책, 그리고 편지글이다. “말하듯이 쓰라”고 권하는 작가가 있고, 또 편집자는 글 쓸 시간이나 재간이 없는 유명인을 섭외해 녹취·윤문·재구성에 가담하며 말을 글로 바꿔내곤 한다. 내 경우 이런 책을 못 즐기는 이유는 우선 경어체 때문이다.

경어체 서술어는 길어서 경제적이지 않고, ‘다’ ‘요’ ‘죠’로 반복되는 어미는 단조롭다. 또 청중을 염두에 둔 공손한 어투는 화자의 사유가 앞 문장을 전복, 재조직하도록 다그치기보다 흐름을 벗어나지 못하게 잡아 가둔다. 때마침 앞에 인터뷰어가 있다면 그의 말에 동조하는 분위기에 힘입어 화자는 글쓰기에서라면 끊임없이 독자를 설득하기 위해 벌였을 자기투쟁 같은 것은 하지 않은 채 청중과 쉽게 한편이 된다.

「 말은 글과 다르게 물샐 틈 많아
매체 발달로 말의 중요성 커져
정돈되지 않은 말이 더 매력적

김지윤 기자

서간체 역시 두 사람의 관계 속에서 갖추는 예의가 글쓰기의 직설적 힘을 감소시키곤 하며, 독자인 제3자에게는 배타적인 발신자와 수신자의 친밀함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야 하는 책무를 준다. 가끔 편지의 수신자를 나로 상상해보지만 이내 구경꾼으로 전락한다. 특히 괴테처럼 과거 인물이 아니라 동시대 사람 둘이 끈끈한 우정 속에 주고받은 편지 책을 읽다 보면 실패한 독자가 되기도 한다.

이런 이유로 나는 말보다 글을 더 신뢰했고, 강연은 자주 다니지 않았으며, 작가는 말을 잘 못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대는 점점 접촉을 요구하고 매체 발달에 따라 글에서 말로 옮아가는 추세를 보인다. 더욱이 글 바깥에서 정돈되지 않은 모습을 드러내는 작가들에게서 진면목이 발견될 뿐 아니라, 몇몇 작가는 말을 문장 쓰듯이 하므로 사로잡는 힘이 강하다.

말은 글과 달리 물샐 틈이 많다. 글 쓸 때 작가는 하나의 주제로 수렴한다. 작가의 수렴은 독자의 발산을 자극한다는 면에서 매우 유용하다. 즉 독자는 저자의 한 문장 안에서 생각의 가지를 뻗고, 반론하고, 제 살을 덧붙이는 등 곁길에서 거두는 수확이 많다. 반면 말하기에서는 작가가 주로 발산한다. 책에서는 못 했던 얘기를 과감하게 하는데, 말은 좀 더 충동적이고 마주하는 눈동자들에 부응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는 데다 내 벌거벗은 모습을 드러내고 싶다는 바람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작가가 말하면서 무수한 오솔길로 새면 청중은 집중해 그 다양한 것을 자기 안으로 수렴해야 한다. 이때 예닐곱 명쯤 되는 작가의 자아를 하나의 초상으로 재구성하느라 청중은 자기 생각을 할 여유가 별로 없지만, 작가의 다중 인격을 본 것으로 보상은 되고도 남는다.

최근에 『김혜순의 말』을 읽었다. 김혜순 시인은 2년여 전 퇴직한 후 앓았던 터라, 말의 서두를 “여러 나무가 서 있는, 몸이라는 숲에 들어섰는데 숲에 사는 동식물과 광물들이 모두 통증을 호소하는 것 같았”다로 연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이 책에서 그가 그동안 지어낸 단정한 시의 옷이 아닌, 실밥과 보푸라기들이 달린 옷을 입어보게 될 거란 직감이 들었다. 작가는 자기 몸을 “저의 돼지” 혹은 “돼지를 먹는 돼지”라고 부르며, 그 “몸뚱이의 내밀성으로 시를 감지”한다고 말한다. 그는 내내 글 쓰듯이 말하지만, 말 속에서만 드러나는 작가의 부스러기는 독자에게 읽기의 또 다른 경이를 체험케 한다. 이 경이는 먼저 원고로 정리한 뒤 강연장에서 몸짓과 목소리로 풀어낸 ‘훌륭한 글-말’을 새삼 떠올리게 한다. 가라타니 고진의 『언어와 비극』,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 등등.

고진은 자신이 많은 사람 앞에서 말하는 데 서툴며 강연은 반드시 단순화된다고 했지만, 가령 학자 정희진의 강연을 듣다 보면 정돈되지 않은 말일수록, 글로 봉합될 수 없는 것일수록 더 매력을 발산한다. 거기서는 계몽의 시대가 강요했던 교양, 급진적 이데올로기가 갖는 빈틈이 드러나 우리는 통일된 인식의 주체가 아님을 솔직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평소 빈틈없는 논리에 곧잘 끌리는 우리지만, 논리로 무장한 저자들의 위선과 구멍도 수없이 목격하지 않았던가.

오래전엔 말이 곧 힘이었다. 로마의 마르쿠스 황제에게 “철학 속에서 리듬을, 말하는 목소리를, 그리고 그 목소리가 차용해 남아 있는 감정적 소리를 잃지 마십시오”라고 진언한 프론토의 말을 기억한다. 그 시절 이후 오랜 세월 글은 말보다 우위를 점해 왔다. 글은 물론 전적으로 말로 대체될 수 없고, 인터뷰 등을 삼간 채 글쓰기만 하는 작가들은 여전히 존경받을 만하다. 글은 침묵을 전제로 하고, 그 침묵은 빛나는 생산물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말하기의 세계로 끌려 나온다. 음성과 톤으로 청중을 고양하지 못하는 사람일지라도, 글 밖으로 떨어뜨리는 실밥은 옷의 박음질을 벌리려는 에너지의 충동을 보이면서 세계나 인간이 원래부터 지녔던 모순을 발견하도록 이끈다.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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