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연의 시인이 사랑한 단어] 박서원의 ‘고통’
독서를 하다가 생각한다. 이 저자도 녹록지 않은 나날을 이렇게 통과했구나. ‘녹록지 않다’라는 편안한 표현이 민망할 정도다. 내가 독서로 만나온 저자들에게는-문학작품이든, 인문학 서적이든-고통이 무엇인지를 자기 방식대로 이해하려는 투지가 있다. 고통의 우주를 관찰하고 탐구하고 분석하는 사람, 고통의 터널을 통과의례처럼 지나오며 거기서 획득한 고유한 힘을 강조하는 사람, 고통의 한가운데에서 고통과 싸워 이겨보려는 의식으로 글을 쓰는 사람, 고통에 먹이를 주고 다독이면서 쓰라림을 잠재우려는 사람…….
박서원 시인은 한국 시인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고통이 동굴처럼 커다랗게 입을 벌릴 때 그 속에 머리를 집어넣는 사람이었다. 시인에게는 고통이 곧 사랑이었다. 삶의 마디마디에서 솟아나는 수치와 모욕. 시인은 그때마다 오히려 자신의 꿈이 더 오롯해짐을 알았다. 최후까지 빼앗기고 싶지 않은 것이 있다는 것을 고통 속에서 또렷하게 느꼈다. ‘강박관념2’라는 시는 이렇게 끝이 난다. ‘온갖 갈망들이 부드럽고 새로운 빵을 부풀리고/ 있는 어둠 속’에서 시인은 ‘무릎을 얼굴에 묻고 오랜만에/ 훈훈한 울음으로 익어가는’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그 모습에 시인은 ‘융단처럼 퍼지는 희열의 촛불들’을 겹쳐 놓는다. ‘울음’이 ‘희열’로 이어지는 것은 시의 비약이 아니다. 울음에 깃든 희열을 발견할 줄 알고 그것을 표현해내는 것이 시인의 임무인 것이다. 그럼으로써 시는 잠복해 있던 진리 하나를 들추는 것이다.
‘문학을 위한 기도’라는 시의 끝부분은 다음과 같다. ‘아가야,/ 바구니에 고통의 창호지들 담으면/ 펄떡펄떡 잉어가 된단다, 아가야.’ 고통이 힘 좋은 잉어가 되는 꿈. 이것은 인간의 오랜 꿈이고, 시인은 이미 시인으로 살면서 이 꿈을 이루어내고 있다. 생눈을 뜨고 꾸는 악몽의 형태로. 스스로 헐벗은 알몸으로써. 사랑을 향하면서.
김소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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