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스티키 인플레’…긴축 완화 쉽지 않아
영국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호에서 ‘스티키 인플레이션’에 빠진 글로벌 경제를 조명했다. ‘스티키’를 직역하면 ‘끈적거림’이다. 한 번 올라버린 물가가 끈적하게 위에 달라붙어 내려오지 않는 현상을 일컫는다. 미국 애틀랜타 연방준비은행이 상대적으로 낮은 변동성을 가진 재화·서비스에 가중치를 둔, ‘스티키 소비자물가지수(CPI)’에서 유래됐다. 스티키 CPI는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Fed)가 2021년 미국 인플레이션을 일시적이라고 진단했을 때 영향력을 발휘했다. 당시 이 지수가 물가가 급등할 것이라는 신호를 내보냈기 때문이다.
CPI·PPI 상승 둔화 통계 고무적
언뜻 보면 인플레 잦아들었지만…
이코노미스트는 “언뜻 보기에는 세계 경제는 어려운 상황에서 탈출한 것처럼 보인다”고 전제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해 두 자릿수까지 올랐던 미국 연간 인플레이션은 4%대로 낮아졌다. 최근 통계도 고무적이다. 미국 노동부는 6월 CPI가 지난해 같은 달보다 3%, 전월보다 0.2% 각각 올라 상승폭이 2021년 3월 이후 가장 작았다고 발표했다. 6월 생산자물가지수 역시 전월 대비로나 전년 동기 대비로나 각각 0.1% 상승하며 둔화세를 보였다. 전년 대비 상승률로만 보면 2020년 8월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이런 통계는 연준이 미국을 경기 침체에 빠뜨리지 않고 인플레이션을 낮추는, 이른바 ‘연착륙’을 이뤄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심지어 “미국에 더 이상 인플레이션 문제는 없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CNBC에 따르면 스티브 행크 존스홉킨스대 응용경제학 교수는 “인플레이션 얘기는 이미 지난 일이 됐다고 생각한다”며 “그 이유 중 하나는 미국에서 통화 공급량을 전년 대비 4%씩 줄어왔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행크 교수는 “(이 같은 추세를) 1938년 이후로 본 적 없다”며 “통화 공급량 변화는 가격 지수와 인플레이션에 변화를 불러온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코노미스트는 “문제는 인플레이션 괴물이 진정 길들여지지는 않았다”고 강조했다. 일례로 영국 근원물가는 매년 7%씩 오르는 중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심각한 에너지 가격 폭등세가 누그러졌는데도, 근원 인플레이션은 실망스러울 정도로 강하다는 설명이다. 미국과 유럽 주요국의 근원물가 역시 대부분 5%를 넘어서고 있다는 점은 여전히 인플레이션이 ‘끈적끈적하게’ 붙어 있다는 점을 말해준다.
이코노미스트는 “인플레이션이 연준 목표치로 안정되려면 실업률이 6.5%로 올라서야 하는데, 이는 500만명이 실직하는 것과 같다”며 “역사적으로 연준이 금리를 인상하면서 미국 경제가 피해를 입지 않는 경우는 없었다”고 했다.
국제 정세에서도 인플레이션이 가라앉기 힘든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세계에서 가장 강한 두 나라인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풀릴 기미가 없어서다. 글로벌 기업은 다국적 공급망을 현지 공급망으로 대체하며 비용 증가를 감내하는 중이다. 여기에 국방에서부터 탈탄소화까지 공공 부문 비용이 증가 일로라는 점은 스티키 인플레이션의 단면으로 해석된다.
1970년대 미국 금리 정책 대실패
확실한 인플레 둔화 신호 확인할 듯
연준이 금리 인상을 멈출 가능성도 높지 않다. 미국은 1970년대 금리 정책에서 뼈아픈 경험을 했다. 1972년 재선을 앞둔 닉슨 대통령이 인플레이션 우려에도 불구하고 금리 인하를 종용했다. 당시 아서 번스 연준 의장은 8%대였던 기준금리를 불과 1년 만에 4%대로 내렸다. 1973년 제1차 오일쇼크가 터지자 미국 물가 상승률은 걷잡을 수 없이 치솟아 10%대로 올라섰다. 번스는 뒤늦게 기준금리를 13.6%까지 급격히 인상했고, 그 결과 1970년대 미국 경제는 경기 침체까지 겹친 전대미문의 스태그플레이션을 맞이한다.
번스는 경제가 나빠지자 금리를 다시 내리라는 정치권 압박에 다시 굴복했다. 1년 만에 다시 기준금리를 5.24%로 끌어내리는, 이른바 ‘스톱앤고(Stop & Go)’ 전략을 썼다. 그러나 미국 인플레율은 다시 10%대로 치솟고 말았다.
“인플레이션에 대한 승리를 선언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메리 데일리 샌프란시스코 연은 총재), “인플레이션이 떨어지고 있다는 증거가 더 많이 나와야 한다.” (크리스토퍼 월러 연준 이사), “미국 경기가 예상외로 강하고, 인플레이션이 여전히 높다.” (로레타 메스터 클리블랜드 연은 총재) 등 금리 인하에 보수적인 발언이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데는 이런 역사와 관련 깊다.
제롬 파월 미 연준 의장 역시 “인플레이션 억제에 더 큰 진전이 있을 때까지 금리 인상이 더 있을 것”이라며 “인플레이션이 둔화됐지만 연준 목표치인 2%를 훨씬 웃돌고 있고, 2%로 낮추는 과정은 갈 길이 멀다”고 단언했다.
기회주의적 디스인플레가 대안?
고물가와 경기 침체 사이서 고민
인플레이션을 가라앉히려면 노동 시장에서의 고통은 피할 수 없을 듯 보인다. 파월 의장은 인플레이션 목표치 2%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노동 시장의 일부 위축이 필요하다고 자주 말해왔다. 공격적인 긴축 통화 정책에도 노동 시장은 강세를 보여왔기 때문이다.
6월 비농업 부문 고용은 20만9000명 증가에 그쳐 2020년 말 이후 가장 증가폭이 작았지만, 여전히 파월 의장이 장기적으로 경제에 적합한 규모라고 제시했던 10만명의 두 배에 달한다. 임금 상승률도 여전히 높다. 6월 시간당 평균 임금이 지난해 같은 달보다 4.4% 증가해 팬데믹 시작 직후인 2020년 4월(8.1%)보다는 낮았다. 하지만 2019년 평균(3.3%)보다 높은 수준이다.
일각에서는 미국이 ‘기회주의적 디스인플레이션(Opportunistic Disinflation)’을 펼쳐야 한다는 의견을 낸다. 디스인플레이션은 물가 수준은 높아지지만 상승률은 둔화하는 현상을 말한다. 물가 수준 자체가 낮아지는 디플레이션과 다르다. 디스인플레이션은 소비자 인플레이션 기대치를 정상화하고 경제가 과열되는 것을 방지하기 때문에 높은 인플레이션 상황에서 필요한 것으로 간주된다.
기회주의적 디스인플레이션 정책에 따르면, 인플레이션이 심각하지는 않지만 장기 목표보다 높을 때 연준은 의도적으로 반(反)인플레이션 조치를 취하지 않아야 한다. 오히려 유리한 공급 충격이나 예측할 수 없는 외부 상황을 기다린다. 경기는 상승 하락을 반복하는 동안 인플레이션은 고점과 저점을 낮추며 결국 물가 안정에 이른다는 개념이다. 다만 이 정책을 쓰기 위해서는 인플레이션 목표치를 제시하지 않아야 한다. 목표치를 내세우면 연준이 ‘신뢰성’을 지키기 위해 금리를 올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 그린스펀 의장이 인플레이션 목표치를 제시하지 않는 모호한 입장을 취했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이코노미스트는 “주요 국가의 금리 인상은 고통 없는 디스인플레이션이 아니라 경기 침체를 유발할 가능성이 높다”며 “중앙은행은 높은 인플레이션과 경기 침체의 어딘가를 오가는 참담한 상황에 있다”고 분석했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19호 (2023.07.26~2023.08.01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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