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 고위험군 언론인”…대응 가이드북 1.0 나왔다

이정헌 2023. 7. 25.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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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취재진이 지난해 10월 30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주민센터에 마련된 실종자 접수처에서 이태원 압사사고 실종자 가족을 취재하는 모습. 이한형 기자


“현장에 가면 눈빛을 만나잖아요. 유족의 눈빛, 가해자의 눈빛, 법정에서 선고를 받는 피의자의 눈빛 그런 게 좀 안 잊히고 시시각각 떠오른다거나 심장이 갑자기 뛴다거나…”

“오히려 일이 없으면 더 생각나니까 미친 듯이 일을 몰아붙여서 했어요.”

“현장에서 가장 슬퍼해야 할 사람들이 따로 있잖아요. 거기에서 제가 슬픔을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죄책감이 들었던 것 같아요.”

한국기자협회와 한국여성기자협회, 방송기자연합회가 언론인의 트라우마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구성한 ‘언론인 트라우마 위원회’가 25일 ‘언론인 트라우마 가이드북 1.0’을 제작해 온라인과 오프라인 책자 형태로 배포했다.

언론인 트라우마 위원회는 다트센터, 구글뉴스 이니셔티브와 2021년 11월 공동 실시한 한국 언론인 대상 첫 트라우마 설문 결과와 2022년 11월부터 안현의 이화여대 심리학과 교수 연구팀이 진행한 포커스 그룹 인터뷰(FGI) 등을 통해 확인한 트라우마 양상과 실태를 가이드북에 담았다.

각종 설문 조사 및 연구 결과 분석 과정은 국가트라우마센터와 대한신경정신의학회 등 트라우마 분야 최고 전문가들의 꼼꼼한 자문을 거쳐 진행했다.

이에 따르면 취재와 뉴스 제작 과정에서 사건·사고에 장기간, 반복적으로 노출되는 언론인은 ‘트라우마 고위험군 직종’에 해당한다. 언론인들이 겪는 트라우마에는 사건이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재경험, 사건과 관련된 기억과 감정을 떠올리지 않으려는 회피, 주위를 경계하고 작은 자극에 과도하게 놀라는 과각성, 과도한 책임감을 느끼거나 부정적인 감정과 사고 등 다양한 양상을 보인다. 현장 취재 기자뿐만 아니라 제작 과정에 관여하는 데스크와 영상·사진 기자 인력까지 모두 트라우마에 노출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가이드북은 10·29 이태원 참사 등 대형 재난 사고를 비롯해 언론인의 트라우마를 유발하는 다양한 요인과 유형도 다뤘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보도 이후 부각된 ‘도덕적 상해’와 정치적 양극화 속에 심해지는 언론인에 대한 ‘온라인 공격’ 등이 그 예다. 가이드북은 이 같은 유형의 트라우마가 특히 근무 연차가 낮은 기자들에게 일 자체에 대한 회의감을 주고, 데스크와 소속 언론사를 불신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언론이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는 사건을 취재·보도했을 때 그 영향이 뉴스룸에서 어떻게 퍼져나가는지를 보여주는 사진. 가이드북 캡처


그러나 언론인이 겪는 트라우마는 그동안 적극적으로 논의되지 못했다. 언론인은 취재 과정에서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분리하도록 요구받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감추거나 축소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기자 사회의 오래된 문화와 관행도 기자가 트라우마를 겪는다는 자체를 ‘나약함과 부적응’으로 여겨왔다.

가이드북은 언론사가 구성원의 트라우마를 이해하고 조직 차원의 문제로 이해하는 ‘트라우마 리터러시’가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취재진과 데스크가 이러한 트라우마 관점을 ▲취재진의 사안 인식 단계 ▲인터뷰 단계 ▲취재 및 촬영 단계 ▲기사 작성 및 편집 단계 ▲보도 단계 ▲보도 이후의 단계 등 각 과정별로 주의하고 인지해야 할 점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가이드북에는 언론인을 향한 온라인 공격과 관련해 회사 차원에서 기자를 보호하기 위해 취할 조치도 소개돼 있다. 소속 기자가 특정 단체나 개인으로부터 지속적이고 집요한 공격을 받는 것은 개인이 아닌 회사 차원에서 공식 대응할 사안이며, 각종 조치가 신속히 결정돼야 한다는 점이 강조됐다.

위원회는 “언론사가 언론인뿐 아니라 취재원, 나아가 독자나 시청자의 심리적 안전까지 고려해야 한다”며 “‘트라우마 공감 언론’으로 나아갈 때 사회로부터 더 신뢰받고, 지속 가능한 조직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정애 언론인 트라우마 위원장은 “국내에서는 10·29 이태원 참사를 계기로 언론사들뿐 아니라 대한신경정신의학회나 한국심리학회 등 유관기관에서도 언론인의 트라우마 문제를 인지하게 됐다”면서 “‘가이드북 1.0’이 중요한 이정표 역할을 하게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언론인 트라우마 위원회가 25일 발간한 '언론인 트라우마 가이드북 1.0'. 가이드북 캡처


‘언론인 트라우마 가이드북 1.0’ 온라인 PDF 파일은 한국기자협회 홈페이지 정관·보도준칙 페이지(http://www.journalist.or.kr/news/section4.html?p_num=2)에서 다운로드할 수 있다.

이정헌 기자 h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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