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여행'을 배워본 적 있나요?
'대안'이라는 표현 하에 경쟁과 입시몰입교육을 지양하고, 자치와 상생을 위한 교육을 하며, 학생들이 현재를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안전한 삶의 터전을 만들어주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곳에서 여러 존재들과 좌충우돌하며 교육활동을 하고 있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전하고자 합니다. <편집자말>
[안사을 기자]
보통 여행이란 취미나 쉼일 테고, 어쩌면 누군가에겐 직업일 수 있겠다. 그런데 여행을 일종의 '배움'이라 설정하고 3년 동안 꾸준히 가르치는 학교가 있다. '통합기행'이라는 과목명으로 두 시수(일주일에 2시간으로 생각하면 얼추 맞다)짜리 수업을 꾸려 각 학년마다 다르면서도 위계 있는 내용으로 여행을 가르친다.
'수업'이 된 '여행'
1학년 때는 우리 지역을 흐르는 만경강을 중심으로 여행을 기획한다. 학년 부장이 달라지면 그 내용이 조금씩 바뀐다. 어떤 해는 발원지부터 최하류까지 80km가 넘는 길을 주야장천 걷기도 하고, 어떤 연도에는 걷는 거리를 조금 줄이고 각 지역의 특색에 맞는 다양한 활동을 하기도 한다. 작년과 올해는 사전답사에서부터 학생들을 참여시켜서 전체적인 여정이나 배울 거리를 함께 고민하고 있다.
▲ 만경강 습지를 바라보며 사전답사 때부터 학생과 동행하며 뭘 뺄지, 뭘 더할지에 대해 토론한다. |
ⓒ 안사을 |
▲ 3학년 통합기행 발표 스스로 꾸린 여행에 대해 발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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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통합기행 교과 자체가 태생적으로 융합적이긴 하지만, 지난해부터 2학년의 통합기행은 본격적인 주제 통합 수업으로 꾸리기 시작했다. 기행의 지역에 따라 각 과목에서 콘텐츠를 지원하는 수준에서, 큰 주제를 정하고 처음부터 함께 기획하는 방식으로 진화한 것이다. 선봉이 되는 과목은 한국사, 뮤지컬, 통합기행이다.
▲ 독서중 통합기행을 위해 직접 쳐본 그늘막 밑에서 창장뮤지컬의 배경이 될 도서인 <내 사랑 사북>을 읽고 있는 아이들 |
ⓒ 안사을 |
해마다 주제가 바뀐다.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생겨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콘텐츠가 만들어지기까지는 새로운 시도를 계속하고 싶은 마음이다.
지난해에는 제주 4·3을 주제로 했다. 꼭 처참한 근현대사를 주제로 정하지는 않는다. 내년 융합수업은 춘향전을 잠정적 주제로 삼고, 상상을 차곡차곡 쌓아나가고 있다.
▲ 한국사 수업 쉽게 접할 수 있는 활동 중심의 한국사 수업 |
ⓒ 안사을 |
뮤지컬 시간에는 '내 사랑 사북'이라는 제목으로 창작뮤지컬을 만들고 있다. 연말에는 공연을 할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직전 기사 <작년엔 4.3, 올해엔 학생들과 '사북항쟁'을 노래합니다>에 대략 소개되어 있다(기사 보기 https://omn.kr/23vfq ). 지난해와 다르게 안무와 가사, 짤막한 시나리오까지 학생들이 직접 참여하여 만들고 있기에 속도가 느리지만 더욱 교육적일 것이라 기대한다.
▲ 2월 사전답사 여정을 짜기 위해 2월에 한 번, 6월에 한 번 사전답사를 진행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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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백산맥의 노을 아이들과 함께 올 때에도 이런 하늘이 있기를 바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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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작 기행'이라는 별명을 붙인 여정
본래 해외이동학습이었던 것을 코로나로 인해 2020년 국내 기행으로 전면 재구성하면서 나는 '노작 기행'이라는 별칭으로 국내 통합 기행을 꾸렸다. 해외이동학습에 준하는 수준의 배움이 발생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내가 잘하고 잘 지도할 수 있는 야영을 중심으로 여정을 짰다.
짧게는 4박 5일, 길게는 8박 9일의 기간 동안 아이들은 직접 텐트와 그늘막을 쳐야 했고, 절반이 넘는 정도의 식사를 직접 해 먹어야 했다. 필연적으로 모둠활동을 하게 되면서 그들은 부딪히고 깨지면서 성장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친구와 겸상을 해야 했고 평소 문제없던 사이가 틀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사소한 관계가 틀어지면 전체가 멈춰야 하는 상황 속에서 아이들은 자신을 조금씩 덜어내며 어른이 돼 갔다.
▲ 여행 수업 학습지를 앞에 놓고 열심히 모둠활동을 하고 있는 아이들 |
ⓒ 안사을 |
그동안 아이들은 수학여행으로 흔히 알고 있는 '테마식 현장체험학습'에서조차 이미 짜인 여정 속에서 수동적으로 참여했던 경험이 전부였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 여정의 틈새를 채워야 하는 활동 앞에서 학생들은 적잖이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학습지를 앞에 두고, 무엇을 해야 할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한 채 볼멘소리를 토해냈다.
"쌤. 뭘 어떻게 하라고 하는지 진짜 하나도 모르겠어요."
"당연히 모르지. 선생님이 방법을 아직 안 알려줬잖아요."
"알려줘도 모를 것 같아요."
"아니에요. 알려주면 누구나 할 수 있고, 심지어 재밌기까지 할걸?"
이렇게 애교 섞인 실랑이를 하다가 실제로 식단을 짜는 상황이 되니 막상 아이들은 재미를 느끼는 듯했다.
"쌤. 근데요. 진짜 우리가 먹고 싶은 것 다 먹어도 돼요? 라면, 막 그런 것도 뭐라고 안 해요?"
"여정을 보고 알아서 정하세요. 예를 들면, 등산을 가야 하는데 라면 하나만 먹고 가면 힘들겠지? 아니면, 다른 모둠은 저녁에 고기 파티 하는데 귀찮다고 컵밥 같은 것만 사 먹으면 뭔가 애매 할 거야. 그치?"
"에이! 누가 저녁에 컵밥만 먹어요. 캠핑장에서는 고기죠~!"
방식은 이렇다. 한 끼에 8000원인 식비를 모둠별로(3, 4인) 실제 기행(10월 13일 ~ 20일) 직전에 지급한다. 기행 동안 식사는 22번이고 그중 열여섯 끼니를 아이들이 직접 짜야 한다. 여섯 번은 식당에서 사 먹는데, 어디서 먹을지 무엇을 먹을지 얼마가 드는지를 미리 조사해야 한다. 열 번은 야영장에서 해 먹어야 하고, 메뉴와 장 볼 것을 미리 정하고 대략의 비용까지 조사해야 한다.
4인 기준으로 51만2000원이라는 적지 않은 비용을 두고 아이들은 진지하게 식단을 짜나갔다. 버스에서 하차하는 위치도 고려해야 했기 때문에 아이들은 인터넷 지도를 켜서 함께 의논하는 한편 교사에게 끊임없는 질문을 던졌다. 능동적으로 여행을 준비하는 모습에 미소가 절로 나왔다.
▲ 두 번째 학습지 여정 속에서 뭘 배울지에 대해 미리 생각해보는 수업 |
ⓒ 안사을 |
이 모든 과정을 한데 모아 1학기 마무리 발표를 진행했다. 평가를 해야 하기에 당연히 시행해야 하는 발표이긴 했지만, 아이들의 마음속에 점수 말고 좀 더 의미 있는 동기가 부여되기를 원했다.
"여러분. 이 수업은 절대평가로 이뤄지기 때문에 누가 1등하는 지는 중요하지 않은 것 알죠?"
"네!"
"지금까지 모든 활동 동안 다들 이미 열심히 참여했기 때문에 발표가 조금 부족하더라도 점수는 잘 나갈 거예요. 여러분이 뭘 느꼈고 뭘 배웠는지가 더 중요한 거니까 부담 갖지 말고 임하길 바라요."
"어떤 식으로 발표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음. 쉽게 생각해서, 여러분이 여행사나 식품사에서 홍보 나온 직원이라고 생각하고, 모둠별로 짠 식단과 배울 거리 등을 알려준다고 접근해보면 어떨까요?"
▲ 발표 장소에 대한 사전조사 내용을 발표하고 있다. |
ⓒ 안사을 |
▲ 발표 식단과 예산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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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학생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시
참, 한편 융합수업으로서의 뮤지컬 시간에는 최근 가사 쓰기 활동을 진행했다. '광산 노동자의 고단한 삶'이 주제인 학급이었다. 어차피 나온 결과마다 하나의 독립적인 곡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작곡자인 내가 아이디어를 빌릴 목적으로 하는 것이니 쉽게 생각하고 하고 싶은 말을 쓰라고 했다. 대신 가사는 곧 시이니 운율이 맞고 단어가 시어로서의 운치가 있으면 더 좋다고 했다.
▲ 학생이 쓴 가사 <검은 사람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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