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계약 체결 후 약관 사본 교부 요청 거절해도 계약 유효"
사업자가 고객으로부터 약관 사본 교부를 요청받고도 이를 이행하지 않았을 때 해당 약관을 계약의 내용으로 주장할 수 없는 것은 계약 체결 당시에 사본 교부를 요청받았을 때이에 한하며, 이미 계약이 체결된 뒤에 고객의 사본 교부 요청을 거부한 경우까지 포함되는 것은 아니라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25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3부(주심 노정희 대법관)는 A씨 등이 분양사·시행사 등을 상대로 낸 계약금 반환 청구 소송에서 원고 일부승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인천지법으로 돌려보냈다. 재판부는 "원심 판단에는 약관법 제3조 2항, 4항에 관한 법리를 오해해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있다"고 파기환송의 이유를 밝혔다.
A씨는 인천 연수구 송도동에 신축 예정인 생활숙박시설 5개 호실을 분양받는 계약을 2018년 3월28일 시행사·분양사와 체결했다. A씨는 계약 체결 당시 인감을 소지하지 않아 서명·손도장 방식으로 공급계약서와 각서를 작성하면서 사흘 뒤까지 인감과 인감증명서를 지참해 문서를 보완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그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이후 4월2일 시행사·분양사 측 담당자에게 계약서 등 사본을 보내달라고 요구했는데, 담당 직원은 A씨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요구를 거절했다.
이후 A씨는 두 차례 독촉에도 잔금을 지급하지 않았다. 시행사·분양사 측은 같은 해 5월 계약 해지를 통보하고 위약금을 지불하라는 내용증명을 보냈다. 계약서에는 A씨가 2회 이상 최고를 받고도 2차 계약금을 납부하지 않은 경우 계약을 해제할 수 있도록 정해져 있었다. 6개월 뒤 A씨는 계약금 1500만원을 돌려달라며 회사들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A씨는 시행사·분양사 측이 계약서 사본을 교부해달라는 자신의 요구를 거절했으므로 약관법에 따라 약관이 무효라고 주장했다.
약관법 제3조(약관의 작성 및 설명의무 등) 2항은 '사업자는 계약을 체결할 때에는 고객에게 약관의 내용을 계약의 종류에 따라 일반적으로 예상되는 방법으로 분명하게 밝히고, 고객이 요구할 경우 그 약관의 사본을 고객에게 내주어 고객이 약관의 내용을 알 수 있게 하여야 한다'며 고객의 요구가 있을 때 사업자가 약관 사본을 교부해줘야 할 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같은 조 4항은 '사업자가 2항을 위반하여 계약을 체결한 경우에는 해당 약관을 계약의 내용으로 주장할 수 없다'고 정하고 있다.
한편 약관법 제16조(일부 무효의 특칙)는 이처럼 계약 체결 당시 사업자가 고객의 요청을 받고도 약관을 교부하지 않은 경우 해당 약관 조항을 제외한 나머지 부문만으로 계약은 유효하게 존속하지만, 유효한 부분만으로는 계약의 목적 달성이 불가능하거나 그 유효한 부분이 한쪽 당사자에게 부당하게 불리한 경우에는 그 계약 전부가 무효가 된다고 정했다. 결국 자신의 약관 사본 교부 요구를 회사들이 거부했기 때문에, 약관을 계약의 내용으로 주장하지 못하는 상황인데, 해당 약관에는 계약의 중요부분이 모두 포함돼 있는 만큼, 계약 전부가 무효라는 게 A씨의 주장이었다.
시행사·분양사 측도 위약금 지급을 요구하는 반소(맞소송)를 냈다.
1심은 시행사·분양사 승소로 판결했지만 2심은 A씨의 손을 들었다. 2심은 "(약관법 조항은) 고객이 언제든지 사업자에게 약관의 교부를 요구할 수 있고 사업자는 이를 제공할 의무가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며 A씨 주장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재판부는 먼저 약관법 제3조 2항과 3항의 입법 취지에 대한 대법원 판례를 인용했다. 재판부는 "약관법 제3조 2항 본문과 같은 조 4항이 사업자에 대해 약관의 명시의무와 약관 사본 교부의무를 부과하고 이를 위반해 계약을 체결한 경우에는 그 약관을 계약의 내용으로 주장할 수 없도록 한 것은, 고객으로 하여금 각 당사자를 구속하게 될 내용을 미리 알고 약관에 의한 계약을 체결하도록 함으로써 예측하지 못한 불이익을 받게 되는 것을 방지해 고객을 보호하려는 데 입법 취지가 있다"고 밝혔다.
이어 "이러한 약관법 제3조 2항 및 4항의 규정내용과 입법 취지를 고려하면, 약관법 제3조 4항에 따라 해당 약관을 계약의 내용으로 주장할 수 없는 사유로서 '약관 사본 교부와 관련하여 약관법 제3조 2항을 위반하여 계약을 체결한 경우'라 함은 고객이 계약 체결 당시 사업자에게 약관 사본을 내줄 것을 요구하여 사업자가 약관 사본 교부의무를 부담하게 되었음에도 이를 이행하지 아니한 경우를 의미하고, 계약이 체결된 이후 고객이 사업자에게 약관의 사본을 내줄 것을 요구하고 사업자가 이에 불응한 경우까지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마지막으로 재판부는 "원고(A씨)는 이 사건 각 공급계약 체결 이후 피고들에게 약관인 계약서 사본 등의 교부를 요구하였으므로 피고들이 이에 응하지 아니하였더라도 약관법 제3조 4항이 적용되는 경우로서 약관법 제3조 2항을 위반하여 계약을 체결한 경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최석진 법조전문기자 csj040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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