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도 없던 일로... 윤 정부가 내세운 기막힌 논리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기자]
▲ 경북 칠곡군 다부동전적기념관에 지난 5일 백선엽씨의 동상이 세워졌다. 동상은 2분30초 간격으로 360도 회전하도록 제작됐다. |
ⓒ 조정훈 |
국가보훈부가 24일 친일파 백선엽의 국립묘지 안장 기록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 문구를 삭제했다. 그동안 국립대전현충원이나 서울현충원 홈페이지의 '안장자 검색' 또는 '안장자 찾기'에서 백선엽 세 글자를 입력하면,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2009년)"이라는 문구가 나왔다. 보훈부가 이 문구를 삭제한 것이다.
항일군대를 토벌하는 일본 괴뢰국 만주국군 간도토벌대에서 일제에 부역한 행위는 친일인 동시에 전쟁범죄다. 그의 친일은 평화기가 아닌 전쟁기에 있었다. 일본의 세계 침략이 절정에 달했을 때 일어난 일이다. 한국을 위해서뿐 아니라 인류를 위해서도 그의 죄상은 크게 알려져야 함에도, 윤석열 정부는 그것을 삭제했다.
▲ 기존의 백선엽 현충원 안장 기록.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되어있다는 내용이 기재돼있다. |
ⓒ 국립현충원 |
▲ 24일 자로 수정된 백선엽의 국립묘지 안장 기록. 비고란이 사라지고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내용 역시 빠져있다. |
ⓒ 국립현충원 |
윤석열 정부의 친일청산 방해
이번 일은 명백히 친일청산에 대한 방해 행위다. 윤석열 정부가 한 일은 '지우는 행위'이지만, 역설적으로 보면 그것은 친일청산 방해를 '기록하는 행위'다. 하필이면 독도 옆에서 자위대와 연합군사훈련을 벌이는 모습이 윤석열 정부의 역사관과 무관치 않다는 판단을 더욱 굳히는 일이다.
보훈부는 24일 자 보도자료에서 "안장자 검색 및 온라인 참배란은 사이버 참배 서비스 등을 제공하여 안장자 명예를 선양하기 위한 목적으로 운영하는 것인데, 이와 반대로 오히려 명예를 훼손할 여지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라며 이번 삭제를 정당화했다.
언뜻 들으면 그럴싸하지만, 말이 되지 않는 논리다. 그런 말은 존중될 만한 명예가 있는 인물을 안장해놓고 해야 한다. 처음부터 친일파를 안장해 놓고 '안장자의 명예를 훼손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궤변이다.
위 보도자료는 "타 안장자에 대해서는 범죄 경력 등 안장 자격과 관계없는 다른 정보는 기재하지 않으면서 특정인에 대한 특정 사실만 기재하도록 한 것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고 백선엽 장군을 욕보이고 명예를 깎아내리려 했다는 강한 의심과 함께 안장자 간 균형성도 간과한 것으로 판단하였다"고 말한다.
친일반민족행위 경력을 표기하려면 여타 전과 사실도 함께 표기해야 공정하다는 이 주장은 친일행위를 일반 전과와 동일선상에 놓는 것이다. 단순히 일본과 친했다는 이유로 친일파로 규정된 게 아니다. 일본과 손잡고 한민족과 인류를 괴롭히고 착취했기 때문에 그렇게 규정됐다. 이 같은 반인류 범죄를 일반 전과처럼 취급하는 것은 윤석열 정부의 역사인식을 그대로 노출한다.
친일파 표기가 백선엽에 대해서만 있었던 것처럼 주장하는 것도 허위다. 보훈부가 국가보훈처 시절인 2019년 3월부터 했던 작업이 현충원 홈페이지에 친일파 표기를 하는 일이었다. 백선엽 사망 1년 4개월 전에 이미 시작한 일이다.
보도자료는 유족의 명예도 거론했다. "유족의 명예훼손 등 여지가 있음에도 관련 유족의 의견을 청취하지 않았고"라고 말한다. 유족의 명예는 당연히 보호돼야 한다. 친일파 단죄로 인해 가족이 연좌제의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함은 물론이다.
하지만 범죄자에 대한 제재는 가족의 불명예를 어느 정도 수반할 수밖에 없다. 이 정도의 불명예조차 발생하지 않게 하려면, 가족이 있는 범죄자를 수사하거나 재판하거나 구금할 수 없게 된다. 언론 역시, 가족이 있는 사람의 허물은 보도할 수 없게 된다.
백선엽의 유족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하는 것도 당연히 필요하지만, 그에 못지않은 혹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본제국주의로 인한 우리 국민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일이다. 해방 80년이 다 되도록 응어리져 있는 민족적 상처를 보듬는 일도 중요하다. 보훈부는 이 점을 간과하고 있다.
▲ 대전현충원에서 찍은 백선엽의 묘. |
ⓒ 김종성 |
"첫째,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이하 국립묘지법) 제1조에서는 '국가나 사회를 위하여 희생·공헌한 사람을 안장하고, 그 충의와 위훈의 정신을 기리며 선양하는 것'을 목적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고 백선엽 장군은 장성급 장교로서 국립묘지법에 따라 적법하게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음에도 어떠한 법적 근거도 없이 안장 자격이 된 공적과 관계없는 문구를 기재하는 것은 국립묘지 설치 목적에 부합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친일파라는 사실을 알리는 문구를 국립묘지 홈페이지에 표기할 법적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실소를 자아내는 내용이 아닐 수 없다.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 제4-7권 백선엽 편에 따르면, '일제강점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설치된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백선엽의 친일행위를 16쪽에 걸쳐 열거하다가 "이상의 내용을 근거로 하여 백선엽의 행위를 특별법 제2조 제10호에서 규정하고 있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결정한다"라고 선고했다.
이처럼 법률과 절차에 따라 친일파로 인정됐으니, 이런 사실을 어디에 표기할 건가는 담당 관청의 재량에 맡겨도 무방하다. 어디에 어떻게 표기할 것인가도 법령으로 일일이 규정하면 더 좋겠지만, 그것은 가능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국민 세금을 불필요하게 사용하는 일이다. 법률보다 하위인 시행령을 이용해 국회 입법을 무시하는 윤석열 정권이 이 같이 세세한 입법까지 주문하는 것은 난센스다.
사실, 법적 근거를 따지려면 '현충원 홈페이지에 친일파 표기를 하는 것이 적법한가'보다는 '백선엽이 국립묘지에 안장되는 것이 적법한가'부터 따져야 한다. 보훈부는 "고 백선엽 장군은 장성급 장교로서 국립묘지법에 따라 적법하게 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고 말하지만, 과연 적법한 안장인가를 의심해 보는 것이 먼저다.
위에 제시됐듯이 보훈부 보도자료는 백선엽이 장성급 장교로서 현충원에 안장된 사실을 강조했다. 하지만, 모든 장성급 장교가 당연히 현충원에 안장돼야 하는 것은 아니다. 국립묘지법 제1조가 정한 요건에 부합하는 장성급 장교가 안장될 수 있다. 위 보도자료에 부분적으로 언급된 제1조의 전문은 아래와 같다.
"이 법은 국립묘지의 설치와 운영에 관한 사항을 규정함으로써 국가나 사회를 위하여 희생·공헌한 사람이 사망한 후 그를 안장하고 그 충의와 위훈의 정신을 기리며 선양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대통령이나 장군직을 지냈더라도 명백한 반국가·반사회적 행위를 저질렀다면 국립묘지에 당연히 갈 수 없다. 장군보다 높은 직책에 있었던 전두환·노태우가 국립묘지에 가지 못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 박민식 보훈부장관이 지난 5일 오후 경북 칠곡군 다부동 전적기념관에서 열린 '고 백선엽 대장 동상 제막식'에서 기념사하고 있다. |
ⓒ 연합뉴스 |
백선엽은 위 특별법에 의해 설치된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됐다. 위원회는 그가 일제 침략전쟁에 협조한 친일 장교들을 처벌하는 특별법 제2조 제10호에 저촉된다고 규정했다.
위 보고서에 따르면 위원회는 "1941년부터 1945년 일본 패전 시까지 일제의 실질적 식민지였던 만주국군 장교로서 침략전쟁에 협력하였고, 특히 1943년부터 1945년까지 항일세력을 무력 탄압하는 조선인 특수부대인 간도특설대 장교로서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함"이라고 그의 죄상을 적시했다.
백선엽 자신도 자기 부대의 실적을 언급하면서 이 부분을 거론한 일이 있다. 1993년에 일본에서 펴낸 회고록 <대게릴라전, 아메리카는 왜 졌는가>에서 "소규모이면서도 군기가 잡혀 있는 부대였기에 게릴라를 상대로 커다란 전과를 올렸던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라며 "우리들이 추격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고 회고했다. 주로 한국인을 토벌해 놓고도, '많은 한국인'이 섞여 있었다며 서술의 수위를 낮췄다.
백선엽은 대한민국 법률에 의해 설치된 대통령 직속 위원회에 의해서 반국가·반사회적 인물로 규정됐다. 그 자신도 '많은 조선인'을 추격하고 토벌한 사실을 인정했다. 그런 그가 국립묘지에 안장돼 있는 것은 명백한 위법이자 불법이다. 백선엽까지 안장하는 것은 국립묘지의 설립 취지에 어긋난다.
백선엽이 친일파였다고 국립묘지 홈페이지에 표기하는 것은 위법도 아니고 불법도 아니다. 국립묘지에 근거도 없이 누워 있는 그가 제자리를 찾아가도록 함으로써 식민지배와 친일행위로 인한 한국인들의 한을 조금이나마 달래주는 것이 국가의 책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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