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새로운 유령이 출현해야 한다
유령이 배회하고 있다. 갈수록 잔혹해지는 무더위를 날릴 수 있는 반가운 존재다. 원래 이 첫 문장은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에 나온다. 하지만 검찰 관계자는 혹시 오해하지 않길 바란다. 지금 내가 반기는 유령은 공산당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 발전하고 있는 시민들의 다양한 정치 실험이다.
얼마 전 그리스 크레타 섬에 이 유령들의 국제 모임이 개최됐다. 이들은 세계 어느 곳이든 이제 민주주의의 오작동이 ‘새로운 정상’이 되어버린 암울한 현실을 확인하면서 다양한 대안을 논의했다. 참가자 중 한 활동가는 영국 웨일스 자치정부의 실험을 전 세계적으로 확산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웨일스는 미래세대 커미셔너가 단기적 시야에 머무르는 현실 정치권의 정책들을 미래 세대 관점에서 평가하고 대안을 조언해왔다. 서구 고대 문명의 발원지인 크레타 섬에서 이제 미래 문명의 씨앗도 탄생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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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주의는 진정한 대안인가
현재 정치운동, 미래 어젠다 결여
태어나지 않은 세대 대표하는
새로운 정치체제 고민 시작해야
」
지금 현재 역술인 이슈로 서로 멱살을 움켜잡고 있는 여의도 섬 입장에서 크레타 섬에서의 민주주의의 미래 대안에 대한 논의는 너무 이상적으로 들린다. 하지만 여의도 섬이 언제나 귀신과 풍수에만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다. 과거 김대중 대통령은 이미 그 당시 기존 민주주의를 넘어 생태 민주주의를 주창한 바 있다. 최근에도 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중요한 질문이 여의도 본회의장에서 제기되기도 했다. 1987년생인 장혜영 정의당 의원은 87년 운동을 주도했던 소위 586세대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을 던진 바 있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정말로 지금 우리가 마주한 이 위기를 돌파할 수 있을까요?”
나는 이 질문이 오늘날 전 세계가 함께 풀어가야 할 가장 중요한 화두라고 생각한다. 사실 우리가 아는 민주주의는 그게 어디든 기후위기, 팬데믹, AI, 합성 생물학 등이 주는 위험성을 해결하는 데 이미 실패했고, 현재 실패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기후위기 하나만 예를 들어도 민주주의 능력에 대한 비관적 전망의 이유로서 충분하다. 근대 대의 민주주의의 창의적 기준을 만든 미국 정치는 60년대 초부터 기후위기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이를 선도적으로 다루지 못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인류의 모든 정치는 현재 유권자들의 투표에 좌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미래에 대한 책임윤리를 강연하곤 하는 나도, 태어나지도 않은 내 손자나 먼 미래 어느 시점의 동해 바다와의 공존보다 당장 내 딸의 이익이 더 중요하다. 그저 더 좋은 대통령을 뽑거나 새로운 정당을 만들어 진정성 있는 대화를 통해 우리가 직면한 위기를 극복해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순진하거나 혹은 스스로의 도덕적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것에 불과하다.
물론 단기처방으로 기존 정치 질서를 견제할 제3당 운동은 중요하다. 하지만 단지 나이가 젊거나 기존 정치권의 비주류라고 해서 이들에게 희망을 걸 수는 없다. 더 중요한 건 오작동을 일으키는 민주주의에 대한 근본 질문 및 미래에 대한 대담한 어젠다를 가지고 있는 세력인가의 여부이다. 하지만 지금 제3당 운동을 전개하는 이들의 새로운 가치와 실천이 잘 머리에 떠오르질 않는다. 블록체인 민주주의? 기술이 정치의 위기를 극복하는 주요한 대안이라는 발상 자체가 사실은 근대적 사고의 잔재이고 극복 대상이다. 그리고 말이 아니라 실제 신뢰할만한 실험의 축적으로 대안을 보여주고 있는지를 묻고 싶다. 현재 자신들의 발걸음으로 드러나지 않는 미래 비전은 그저 ‘공약’일 뿐이다.
나는 이 크레타 국제회의에서 하나의 장기 구상으로서 미래에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인간과 비인간들을 대표하는 제4부(가칭 미래심의부)의 설계도를 발표했다. 현재 입법·행정·사법의 3부는 아무래도 현재 인간들만의 대표 체제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지금의 인류가 미래에 거대한 (심지어 돌이킬 수도 없는) 영향을 이미 미치고 있다는 점이다. 반면에 아직 태어나지 않는 주체들은 자신들의 대표자를 보낼 기회조차도 없이 이미 결정된 제약 속에서 디스토피아를 살아가거나 혹은 아예 태어날 기회조차 사라질지 모른다. 따라서 우리는 현재의 민주주의 체제로부터 배제된 자들의 권리를 더 확장하면서도 동시에 미래의 태어나지 않는 인간과 비인간 주체들까지 대표하는 새로운 정치체제를 발명해야 한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지구, 그리고 현재와 미래가 공존하는 정치 체제만이 우리가 마주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총선을 앞두고 현재 다루는 이슈들도 중요하다. 하지만 동시에 과연 지금 우리가 추구하는 대안들 정도로 오늘날의 복합 위기를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 있을지의 킬러 문항에도 답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단기적 처방과 함께 당장 불가능해 보이더라도 더 대담한 미래를 상상할 때 비로소 문제의 해법이 나올 수 있다. 이제 대한민국과 아시아도 크레타에 모였던 전 세계의 유령들과 함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가야 한다. 마르크스를 흉내 내보자. 만국의 전환 세력이여, 단결하라!
안병진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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