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모차르트를 사랑한 남자
나는 어릴 때부터 책만 있으면 혼자 잘 놀았다. 친구들과 만나는 장소도, 데이트 약속도 책방에서 했다. 돈만 생기면 책을 샀으니 신혼 초 좁은 집을 점령한 책에 놀란 시어머니는 혀를 찼다. “너는 책과 결혼한 사람 같구나.” 나는 웃음으로 얼버무렸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좋아하는 일에 집중하면 그렇게 되지 않는가. 한때 책방 주인과 결혼할까 싶었는데 책을 분류하고 정리하는 일에 매달리는 모습을 보고 깨끗하게 생각을 접었다. 나의 목적은 책을 읽는 것이지 판매하는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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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비명 ‘모차르트 미망인 남편’
아내의 전 남편 악보까지 정리
‘활자중독자’로 살아온 시간들
사랑은 평생 동안 함께하는 것
」
읽고 쓰는 일이 일상이 된 내게 사람들은 어떤 책을 읽느냐고 묻는다. 사실 나는 남독(濫讀)형이다. 읽던 책의 주제에 흥미가 생기면 참고문헌을 다 찾아 읽는 계독(系讀)형이 되고, 한 작가의 책을 모두 찾아 읽는 전작주의가 되기도 한다. 소음에 둔감해서 시끄러워도 책을 잘 읽는다. 초등학생 때 기찻길 침목에 앉아 책을 읽다가 기적소리를 듣지 못해 사달이 날 뻔한 적도 있었고, 지하철을 타고 가다 내릴 장소를 지나친 것도 부지기수였다. 단칸방에서 형제들의 소음을 고스란히 견뎌야 했던 성장기의 환경적 이유가 컸던 것 같다.
왁자지껄한 오락시간에도 책을 읽는 나를 보고 한 친구가 ‘책멍’이라고 불렀는데 그때만 해도 나는 내가 정말 책을 사랑하는 줄 알았다. 지금은 책 사랑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머뭇거리는데 나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맞지만, 사랑까지는 아닌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사랑’은 심하게 말하면 전 생애와 목숨을 거는 일이어서 사랑이란 말을 함부로 쓰지 못하겠다.
올해 처음 번역된 괴테의 『식물변형론』을 읽다가 식물학에 흥미를 느꼈다. 국내 식물학자들의 책을 찾아 읽던 중에 허태임의 『나의 초록 목록』을 만나게 되었다. 학술서로 알았던 책은 식물과 자신의 삶을 엮은 서정적인 산문집이었다. 저자는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의 보존복원실에서 근무하는 식물분류학자다. 그녀의 어린 시절은 내가 ‘책멍’이었던 것처럼 ‘풀멍’이었다. 그녀는 연구도 하고 탐사 활동도 하는데 바다를 가로질러 무인도에도 가고 암벽 로프를 타고 산과 절벽을 오르내리기도 한다. 이 일은 상당히 위험해서 실제 목숨을 잃은 학자도 있다고 들었다. 이 책을 읽으면 모든 생명에 인격을 부여하고 싶어진다. 식물의 성격을 파악하고 소통하는 그녀에게서 계(Kingdom)를 초월한 사랑이 느껴진다.
책을 읽다가 루트비히 쾨헬이 식물학자였다는 걸 알게 되었는데 그는 모차르트의 흩어진 악보를 연대순으로 정리한 음악연구가이기도 했다. 나는 모차르트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한 남자를 기억했다. 1791년 35세의 모차르트는 아내 콘스탄체에게 엄청난 빚을 남기고 사망했다. 그의 낭비벽은 유명했는데 그보다 아내의 낭비벽이 더 심했다. 이들은 돈을 벌어 쓸 줄만 알았지 관리할 줄은 몰랐다. 자신들을 상류사회의 일원으로 착각했던 것 같다.
상류사회는 노동하지 않아도 돈이 굴러들어오는 계층이지만 모차르트는 음악 노동자였다. 콘스탄체에겐 부양해야 할 두 아들이 있었고 생계는 막막했다. 그녀가 택한 방법은 저녁에 사교 살롱에 나가 남자를 기다리는 일이었다. 늙고 가난한 그녀는 인기가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덴마크의 외교관 ‘게오르그 니콜라우스 폰 니센’이 다가왔다. 그는 귀족이었고 품위와 교양이 있는 신사였다.
콘스탄체와 동거를 시작한 니센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모차르트의 내팽개쳐진 악보를 정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모차르트의 전기를 쓰기 시작했다. 낭비벽이 있는 콘스탄체의 허영심을 충족시켜주었고, 모차르트의 악보집을 출판해서 수익을 모두 그녀에게 넘겼다. 가장 극적인 일은 결혼했음에도 그녀에게 전 남편의 성을 쓰도록 한 것이었다. 콘스탄체는 재혼했으므로 귀족인 남편의 성을 따라 ‘콘스탄체 폰 니센’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녀에게 ‘콘스탄체 모차르트’를 쓰도록 했다. 그의 꿈은 자기가 죽으면 나란히 모차르트의 무덤 옆에 묻히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의 묘비명도 ‘모차르트 미망인의 남편’이었다. 그는 모차르트를 사랑해서 모차르트가 사랑한 사람마저 사랑했다.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차이의 간극이 하늘과 땅처럼 느껴진다.
어릴 때부터 식물학자를 꿈꾸었던 허태임과 모차르트에게 생애를 바친 폰 니센의 삶을 생각하면 나는 내가 좋아하는 책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얼마 전 좌담회에서 대담자가 ‘책을 정말 사랑하는 분’이란 말을 했는데 기분이 묘했다. 정말 사랑인가. 그래도 평생을 함께 가는 것이 사랑이라면 책에 대한 나의 마음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내 별명은 읽고 쓰는 사람, 활자중독자다.
김미옥 작가·문예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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