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회숙의 음악으로 읽는 세상] 세상에서 가장 긴 음악

2023. 7. 25. 00:34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진회숙 음악평론가

프랑스 작곡가 에릭 사티의 작품 중 ‘벡사시옹(Vexation, 괴롭힘 혹은 짜증)’이라는 피아노곡이 있다. 악보가 한 페이지밖에 안 되는 짧은 곡이지만 작곡가가 적어 놓은 메트로놈 지시에 따라 정확하게 연주하면 전곡을 연주에 대략 13시간 40분이 걸린다. 작곡가가 악보에 무려 840번 반복하라고 적어놓았기 때문이다.

이 곡의 완전한 초연은 사티가 살아있는 동안에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 후, 세계적인 전위음악가 존 케이지가 이 곡의 초연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 긴 곡을 도저히 혼자 연주할 자신이 없었던 케이지는 네 명의 피아니스트와 함께 연주했다. 이렇게 해서 무지막지한 반복의 테러리즘 ‘벡사시옹’이 세상 빛을 보게 되었으니 아마 서양음악사상 전무후무한 연주 기록이 아닐까 싶다.

음악으로 읽는 세상

여러 명의 피아니스트가 함께했던 한 연주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처음 30분 동안 청중은 열심히 음악을 들었다. 하지만 들어도 들어도 같은 멜로디가 나오자 슬슬 객석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 후 객석에선 인간이 지루함을 느낄 때 나올 수 있는 갖가지 표정과 몸짓이 속출했다. 시간이 더 흐르자 하나둘씩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몇 시간이 지나자 객석은 절반 이상이 비었고, 그나마 남은 절반의 관객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연주가 막바지에 달했을 때는 객석엔 10여 명만 남아 있었다.

여차여차해서 13시간 40여분이 흐르고, 드디어 연주자가 종지부를 맺는 음을 누르고는 비틀대며 일어섰다. 그가 객석을 향해 인사를 하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관객들이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어떻게 보면 이건 연주자에 대한 박수라기보다 그 긴 시간을 참아낸 자신의 인내심에 보내는 박수였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순간 경악할만한 일이 벌어졌다. 맨 앞자리에 앉은 사람이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앙코르! 앙코르!”

진회숙 음악평론가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