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당 집권하자 은퇴 번복한 감독... 끝까지 약자 편에 서다

조영준 2023. 7. 24.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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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버링 무비 271] 다큐멘터리 <켄 로치의 삶과 영화>

[조영준 기자]

 영화 <켄 로치의 삶과 영화> 스틸컷
ⓒ EBS
* 주의!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2016년 칸 영화제의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평생을 성실한 목수로 살아가던 주인공 다니엘이 심장병 악화로 인해 일을 계속해 나갈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며 벌어지는 일들이 그려진 작품이다.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 찾아간 관공서에서 복잡하고 관료적인 절차로 인해 번번이 좌절하는 모습을 통해 약자와 소외계층의 안전망이 되어야 하는 복지정책이 운영자 위주의 효율적인 시스템으로 전락한 영국의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이 작품의 황금종려상 수상이 놀라웠던 것은 당시에 함께 후보에 올랐던 짐 자무쉬, 페드로 알모도바르, 다르덴 형제, 자비에 돌란의 이름이 대단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작품을 연출했던 켄 로치 감독은 이미 5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대처리즘을 비판하는 쪽에 서서 노동자와 실직자, 홈리스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이야기를 그려온 인물이었다. 이 작품의 수상으로 인해 그 목적과 의미를 다시 한번 전 세계로부터 인정받은 셈이다.

루이즈 오스몬드 감독의 다큐멘터리 <켄 로치의 삶과 영화>는 그런 감독의 인생을 비추고 있는 작품이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만들어지고 있던 시점을 기준으로 영국에서 가장 유명하면서도 정치적인 문제로 논란을 일으킨 바 있었던 켄 로치 감독의 지난 50년의 작업을 보여주는 것이다. 단순히 시간 순서에 따라 그가 지나온 작업물을 돌아보는 일대기 같은 작품은 아니다. 한때 영국에서 가장 좌파적인 성향이 강한 감독이라고까지 불릴 정도로 한쪽으로만 치우치게 된 그의 정치적 성향이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게 되었는지, 또 이를 통해 작품 세계는 어떤 식으로 구성되어 왔는지를 살펴보고, 이를 무너뜨리기 위해 바깥에서는 어떤 억압들이 가해졌는지까지 함께 이야기한다. 자신과 반대되는 세상을 향해 그가 어떤 걸음을 걸어왔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02.
이 작품은 켄 로치 감독을 소개하기에 앞서 사람들의 삶에 관한 영화를 만들 때 정치를 빼놓을 수 없다며 운을 뗀다. 극적인 상황과 갈등이 바로 정치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가 세상의 진짜 모습을 담은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하기에 세상의 정치적 논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사회의 일터에는 두 가지 강력한 세력이 존재하고 그 둘은 서로 적대적이기에 양쪽 중 하나를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른 한쪽의 저항을 받을 수밖에 없다. 실제로 켄 로치 감독은 '블루 칼라의 시인'이라는 별명을 가졌을 정도로 사회의 다양한 지점에 놓인 약자들의 편에 서서 이야기해왔고, 그 과정에서 반대쪽인 보수 진영의 크고 작은 압력과 저항에 시달렸다.

첫 시작은 1960년대 초중반 BBC로부터 몇 편의 단편 작품에 대한 연출을 의뢰받으면서부터였다고 한다. 당시의 산업은 모두 세트장에서 촬영되었고 노동자 계층의 배우는 전혀 등장하지 않았다. 노동자 계층의 사회를 들여다보는 장면이 필요하더라도 상류층 배우들을 캐스팅해 그들이 급을 낮춘 연기를 대신했다. 감독은 이것부터가 계급이 지배하는 영국 사회를 그대로 보여준다고 여기고 적어도 자신의 작품에서만큼은 이를 탈피하고자 했다. 실제 배경이 되는 장소에 가서 실제 노동자 계급의 배우들이 영상에 등장할 수 있도록 했던 이유다. 켄 로치 감독은 자신의 이런 변화를 통해 노동자 사회와 그 계급의 사람들도 상류층의 사람들처럼 같은 감정을 느끼고 사랑을 나눌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지금으로 보자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1960년대 당시에는 이조차 굉장히 충격적인 시도였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캐시 컴 홈>(1966, TV)은 BBC로부터 두 번이나 거절당했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의 영국 사회가 안고 있던 주택 문제와 노숙자들의 삶이 적나라하게 투영되어 있어 너무 정치적으로 보인다는 이유로 말이다. 켄 로치 감독은 끄떡하지 않았다. 대중은 다큐멘터리를 보고 그것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라고 믿을 것이니 그가 몰두했던 것은 어떻게 하면 사실적으로 찍을 수 있는지 단 하나뿐이었다. 영화를 시간 순서대로 촬영해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벌써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래야만 배우들이 자연스럽게 극 중 캐릭터를 연구할 시간이 생기고 그 상황에서 어떤 기분일지 상상해 연기할 필요가 없어질 테니까. 그에게 진실이란 무엇보다 중요했다.
 
 영화 <켄 로치의 삶과 영화> 스틸컷
ⓒ EBS
03.
위에서 언급했던 이유들로 켄 로치 감독의 영화들은 관찰자 시점에서 촬영되면서도 현실적으로 진정성 있게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게 된다. 당시 함께 작업했던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모든 것이 통제된 스튜디오 내의 촬영과는 달리 너무 깔끔하지 않아서 더 효과적이었다고도 한다. 하지만 이 시기를 지나며 감독과 그의 작품에 대한 논란은 더욱 거세지기 시작했다. 그를 향한 대중의 시선이 좌파와 우파 두 정치 논리에 따라 극명하게 갈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위대한 정치 영화로 보는 쪽과 보잘것없는 불쾌한 영화로 보는 쪽. 리얼리즘의 거장으로 보는 쪽과 정신 나간 마르크스의 신봉자로 보는 쪽. 천재적 재능을 가진 감독과 문제적 인물로 평가하는 쪽.

이런 상황이 지속되자 그에게 작업을 맡겨왔던 BBC 측에서도 이제 더 이상 정치색 강한 그의 작품을 원하지 않게 된다. 영화 시장에서의 단일 작품으로 성공하는 일 역시 쉽지 않았다. 이처럼 투자자를 찾기 어렵거나 작품 활동이 중단될 경우 할리우드로 넘어가 그들의 입맛에 맞는 상업 영화를 만들기도 했지만, 성향상 켄 로치 감독의 경우에는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었다. 그의 작품이 상영되고 있는지도 알 수 없고, 직원들의 급여도 줄 수 없는 상황이 1970년대 중후반부터 이어지기 시작한다. 그때를 두고 감독은 이렇게 회상한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이 모두 끝났다고 생각했죠."

04.
켄 로치 감독의 정치적 성향에 큰 영향을 준 부분이 있다. 어린 시절에 봤던 아버지의 모습과 옥스퍼드 대학을 다니던 때의 기억이다. 먼저, 광산에서 전기공 수련을 받은 후 기계 장비 공장에 취업했던 그의 아버지는 전형적인 블루 컬러였다. 하루에 12시간씩 일주일 내내 공장일을 해야만 했던 아버지는 기술직 인부들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지만 보수당에 가까운 성향을 갖고 있었다. 노동자들의 가난과 어려움을 희화화한 연극을 보러 다녔던 기억도 있다. 옥스퍼드 대학에서는 상류층의 본모습에 대해 알게 된다. 그들은 세상을 물려받아 자신들이 지배하게 될 것이라 생각했고 실제로 그럴 능력과 자본도 갖고 있었다. 20대 초반까지의 이런 경험들이 그에게 자연스러운 이후의 행보를 가져다줬는지도 모른다.

사회적인 배경도 있다. 당시 구조개혁을 실시했던 마가렛 대처 정부의 정책으로 인해 영국에서는 매일 공장이 문을 닫았고 실업률이 치솟는 상황이었다. 대공황 이후 최악의 상황이었다. (비슷한 시기 프랑스에서는 5월 혁명이 일어났고, 아시아에서는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었을 정도로 국제 정세도 불안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생산직 노동자들은 정부와 싸울 각오를 했지만 노동조합의 간부들은 거래에 나서며 노동자들을 팔아먹을 궁리만 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사회 문제에 뛰어들게 된 것은 이와 관련된 영국 노동조합 운동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부터다. 물론 방송가에서는 그의 작품들이 예술이 아닌 사회 운동과 관련한 프로파간다나 다름없다며 방영권을 빼앗는 압력을 가해왔고,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 부딪힐수록 켄 로치 감독의 성향은 점점 더 강해지고 확실해져 갔다.

1980년대 후반이 지나면서 사회적으로 정치와 관련된 이념 다툼이 다소 누그러지고 과거와 달리 외력에 의한 탄압이나 압력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지난 2014년 자신의 50년 영화 인생에 종지부를 찍은 이후에도 영국 보수당이 복귀해 다시 집권당에 오르자 79세의 나이로 작업을 재개한 것만 보더라도 자신의 자리에 대한 켄 로치 감독의 굳건한 믿음과 걸음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당시의 이유 역시 집권당이 사회 복지와 관련된 예산과 정책을 축소하고 제재를 가한다는 것이었다.
 
 영화 <켄 로치의 삶과 영화> 스틸컷
ⓒ EBS
05.
감독이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쌓아가는 내내 영화의 바깥에서는 이야기가 너무 정치적이라는 이유로 투자를 꺼리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켄 로치 감독은 그럴수록 영화의 내부인 촬영 과정에서 문제점을 노출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이야기를 제대로 다루기 위해서다.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들은 다음과 같다. 이야기의 핵심은 무엇인지, 이 이야기가 사실에 기초한 이야기인지, 그리고 자신이 다룰 만한 사회적 가치가 있는 것인지. 여기에 투자자나 대중의 입맛에 맞게 만들겠다거나 상업적인 성공을 바라며 만들겠다는 식의 생각이 놓일 공간은 조금도 없어 보인다. 자신만의 이런 확고한 기준이 있었기에 그가 만들어 온 작품들이 모두 하나같이 어떤 메시지를 담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배우들을 캐스팅할 때도 켄 로치 감독은 자신만의 기준을 오롯이 세웠다. 궁극적인 목적은 카메라 자체가 현실을 관찰하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꾸미지 않은 자연스러운 연기를 하는 배우들을 찾다가 나중에는 연기 경험이 없는 사람을 찾기에 이르게 되는데, 이 또한 너무 정확한 연기보다는 해당 장면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만 전달할 수 있어도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카메라 속에 담겠다는 그의 연출 철학과도 맞닿아있다. 다만 현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구현하기 위해 냉정한 태도를 유지할 때도 많았다. 영화 <케스>(1969)에서 교장 선생님이 아이들을 체벌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 장면은 영화적 편집으로 아이들을 직접 때리지 않고도 연출이 가능했으나, 감독은 카메라를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이와 같은 감독의 철학은 다큐멘터리 내용상 가장 최근의 작품이 되는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를 찍을 때도 바뀌지 않는다. 다니엘 역의 데이브 존스 배우는 실제로 극 중 배역과 나이도 비슷하고 작품의 배경이 되는 뉴캐슬 출신의 노동자 계층에 속한 인물이다.
 
 영화 <켄 로치의 삶과 영화> 스틸컷
ⓒ EBS
06.
켄 로치 감독이 혼자 있을 때의 모습에 대해 가족들은 그가 조용하고 말수가 없고 생각만 많은 사람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현장에서 함께 촬영을 했던 사람들에 의하면 그는 두려움이 없고 꼿꼿하면서도 매우 성실하고 의욕이 넘치는 사람으로 기억된다. 한 인물에 대해 이처럼 상반된 평가가 내려질 수 있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 작품 속에서 딱 한 번, 켄 로치 감독은 자신의 과거의 한 부분에 대해 후회의 말을 남긴다. 아무도 자신의 작품에 투자를 하려고 나서지 않았던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 사이에 상업 광고를 잠깐 찍었던 날들이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하긴 했지만 당시 자신이 비판했던 사람들과 똑같은 일을 했다면 그는 자책한다. 일상과 현장에서의 상반된 평가, 생계를 위한 행동에도 엄격한 잣대를 들이미는 모습. 이 두 가지만 놓고 보더라도 그간의 켄 로치 감독 작품에서 느꼈던 정확한 메시지와 어법이 어떻게 보존되고 새겨질 수 있었을지 충분히 가늠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켄 로치 감독은 <나, 다니엘 블레이크>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후 "우리는 희망의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보여줘야 한다.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고 말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제 시대는 그를 칸 영화제의 황금종려상을 2번이나 받은 9인의 거장 감독 중 한 명으로 기억하겠지만, 이 역시도 그에게는 중요한 것이 아닐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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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작품은 2017 EBS 국제다큐영화제에 출품된 바 있는 작품입니다. 현재 EBS 다큐멘터리 전용 플랫폼인 D-Box를 통해 유료로 관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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