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많은 해바라기는 할머니의 존엄이었습니다
[김지원 기자]
직장 생활을 하면서부터 친한 이와 잘 모르는 이의 장례식에 종종 간다. 수많은 장례식을 방문하지만 내가 '임종'을 마주할 기회는 흔치 않다. 죽음 이후의 단계를 방문하는 장례와 달리 임종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죽음에 닿기까지 그 순간을 함께 하는 것. 마지막 거친 숨들이 다 내뱉어지고 편안한 상태에 접어들기까지, 누군가의 임종을 함께 한 사람에게 죽음은 더 이상 형용사나 명사가 아니다.
아흔 다섯에 처음으로 받은 돌봄
할머니는 작년 11월, 담낭암 말기로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할머니의 인지력은 좋았기에 본인 의지대로 생활할 수 없는 요양원은 절대 가지 않겠다고 하셨다. 엄마께서도 할머니가 최대한 병원 생활을 짧게 하실 수 있게 제주 깡촌의 작은 집으로 내려가 24시간 함께 생활하셨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9년간 본인의 끼니를 대충 때우고 사셨던 할머니께서는 엄마께서 매일 세끼 다른 음식을 해드리자 인생 늘그막에 호강한다며 좋아하셨다. 푸아그라 같은 요상한 음식도 드셔보시면서 이 생에서의 다양한 맛을 압축적으로 경험하셨다. 덕분에 할머니께서는 병원에 들어가시기 전까지 적정 체중을 유지하며 딱 보기 좋으셨다고 한다.
다행히 치매는 없으셨다. 그래서 엄마와 소통이 잘 됐고, 잘 먹고 마사지도 받으시며 처음으로 누군가의 돌봄을 받으셨다. 처음에는 자기 주장이 강한 두 사람이 만나 투닥투닥했다. 아무리 모녀라도 본인의 똥오줌을 보게 하는 것이 민망했던 할머니는 오줌통을 직접 옮기다가 사고를 치셨고... 그런 사소한 일들로 모녀는 감정이 상했다.
시간이 흘러 점점 서로에게 맞춰져 갔고 할머니도 엄마께 많이 의지하게 됐다. 본인 때문에 고생하는 딸이 보기 싫어서 그만 서울로 올라가라고 하셨던 할머니도 어느새 엄마가 옆에 있기를 바라셨다. 아흔 넘게 본인 스스로를 돌봐야 했던 할머니는 그렇게 처음으로 돌봄을 받아보셨다.
그러던 가운데 지난 5월, 할머니께서 호스피스 전문 복지병원으로 옮기셨다. 비행기를 타야지만 할머니를 뵈러 갈 수 있었기에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나는 언제 제주로 내려갈지 매주 비행기표를 확인하며 고민했다.
엄마께서는 항상 바쁘다고 하는 내게 '지금쯤 한번 내려오면 좋을 것 같다' 하시다가도 어차피 내려와도 할머니를 유리창 밖에서만 볼 수 있으니 나중에 장례식 때 오라고, 그냥 내 삶에 집중하라고 말을 바꾸셨다.
다시 6월 회사 일이 가장 바빴던 그 시기에 제주행 비행기표를 사야 할 것만 같았다. 중요한 회사 일정을 앞두고 있었지만 화요일까지 연차를 내고 곧장 제주로 내려갔다. 그때만 해도 3일 정도 할머니를 뵙고 서울로 올라갈 생각이었다. 더 오래 제주에 있을 수도 있단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할머니의 상태가 안 좋아져 임종을 보고 서울로 가게 될지 모른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소설책에서 보던 아름다운 이별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 마주해 보니 임종을 지키는 일에는 현실적인 고민들이 따랐다. 특히나 생계가 그곳에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토일월, 할머니를 뵙기 위해 매일 아침 8시 동네 의원에 가서 신속항원검사를 받고 비바람과 안개를 헤치며 병원에 갔다. 월요일까지 할머니는 의식이 없으셨고 눈을 감지 못해 손수건으로 눈을 가리고 계셨다. 노력한 것에 비해 5분이라는 비대면 병문안은 허무하기만 했다.
그래도 들으실 수 있다고 하여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스피커폰을 통해 할머니께 손녀가 왔다는 말을 전했다. 그리고 언제 임종의 순간이 올지 몰라 병원을 떠나지 못하고 차 안에서 하염없이 앉아 있었다.
월요일 오후, 할머니의 혈압이 급격하게 떨어져 임종실로 옮겨졌다. 화요일까지 연차였기에 서울로 올라가야 하는 상황에서 고민이 되었다. 게다가 목요일에는 중요한 회사 일정이 있다. 쓸 수 있는 연차도 남지 않았다. 화요일에 올라갔다가 바로 다시 내려오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
할머니의 마지막이 언제가 될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회사에 언제까지 연차를 내야할지 고민하는 상황이 이상했다. 임종을 지키려다 임종을 기다리게 되는 아이러니라니. 감사하게도 내 곁엔 좋은 사람들이 있었다.
상사는 연차가 없어 서울로 올라가겠단 내게 걱정 말고 할머니 옆을 지켜드리라고, 임종은 기다리는 게 아니라 위독한 상황이니 옆에 있어 드리는 거라고 따끔한 일침과 따스한 위로를 전해주셨다. 지쳐 혼미해졌던 정신을 되찾았다. 그렇다. 임종을 지킨다는 건 지나치게 미화되었다. 실상을 알면 감히 할 수 없는 일이다. 벌써 엄마가 제주에 내려오신 지 8개월이 넘었고 병원 생활도 1.5개월이 됐다.
▲ 할머니의 마당 할머니의 존엄, 해바라기 |
ⓒ 김지원 |
7월을 맞이 하지 못하고 할머니께서 소천하셨다. 돌아가시기 2분 전, 엄마께서는 가족들에게 전화를 돌려 스피커폰으로 20초씩 마지막 인사를 하게 하셨다. 그렇게 할머니께서는 가족들의 사랑 속에서 편안하게 눈을 감으셨다.
제주에서 일주일을 지내며 할머니가 호스피스 전문병원에 오셔서 만난 많은 감사한 사람들과 순간들을 나도 만났다. 엄마를 통해 듣고, 이곳에 와서 직접 보니 더 감사한 마음이다. 세상은 이렇게 마음을 더해주는 은혜들이 모여서 기적적으로 살아감을 느꼈다.
장례식을 마치고 할머니 집에서 열린 가족회의, 어디에 기부를 하고 어떤 분들께 감사인사를 드려야 할지를 논의했다. 모두가 같은 마음이었다. 어느 누구도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감사와 사랑뿐이었다. 할머니께서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이리라.
혹자가 말하듯, 장례는 남은 자들을 위한 의식일지 모른다. 그래서 생전에 최대한 사랑하라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할머니와 꽤 오랜 시간 이별을 준비했다. 최대한 자주 찾아뵙고 통화하고 표현하고 사진으로 담았다. 그래서 아흔 다섯 우리 할망과의 이별이 슬픔보다는 감사와 사랑으로 남았다.
▲ 해바라기가 만개한 할머니의 마당 |
ⓒ 김지원 |
해바라기는 할머니의 자존이고 존엄이었다. 할머니의 마당은 할머니에게는 존재 그 자체였다. 그래서 움직일 힘이 있을 때까지, 마지막까지 할머니는 마당을 가꾸셨다. 엄마와 함께 샐러리도 심고 깻잎과 오이, 방울토마토도 심으셨다. 그러나 기력이 쇠해지고 몸을 가눌 수 없게 되자 할머니의 마당은 주인을 잃은 강아지마냥 지저분해졌다.
생전에 할머니는 마당이 관리가 안 되는 게 너무 괴롭다고 하셨단다. 사람들이 집을 지나가며 이 마당을 보고는 당신이 죽어가고 있음을 다 알 것이라고, 그게 너무 싫다고 하셨다. 그래서 엄마는 해바라기를 심기로 했다. 해바라기가 할머니의 마당에 생명력을 가져올 거라고 믿으며. 할머니에게 해바라기라는 희망이 심어졌다.
할머니는 직접 활짝 핀 해바라기를 보지는 못하셨다. 그러나 우리 가족과 그 마당을 지나는 많은 사람들은 해바라기를 보고 행복해한다. 차를 세워 마당으로 걸어와 카메라를 들고 활짝 웃는다.
할머니는 그런 분이셨다. 본인이 손해를 보고 고생해도 남에게 민폐 끼치는 것을 너무 싫어하셨던 분, 끝까지 본인의 존엄을 지키고 싶어 하셨던 분. 그렇게 할머니는 우리에게 해바라기를 남기고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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