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일민 선생을 알리기 위한 노력... 결실로 이어졌다
20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계기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연구와 선양이 활발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역사의 그림자로 남은 채,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힌 인물들이 많습니다. 무강(武剛) 문일민(文一民 1894~1968)이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평남도청 투탄 의거·이승만 탄핵 주도·프랑스 영사 암살 시도·중앙청 할복 의거 등 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문일민의 삶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독립운동가들이 여전히 많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문일민이라는 또 한 명의 독립운동가를 기억하기 위해 <무강 문일민 평전>을 연재합니다. <편집자말>
[김경준 기자]
(*에필로그 ④ <백범 김구 선생 기일에 맞춰 완성한 논문>에서 이어집니다.)
시민들과 함께 한 '중앙청 할복 의거 기념식'
작년 10월 25일은 문일민 선생이 조국 독립을 호소하며 중앙청(미군정)에서 할복 자결을 시도한 '중앙청 할복 의거' 75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75주년이라는 상징성 때문에라도 이날을 그냥 넘기고 싶지 않았다. 평소 현충원 투어 가이드로 활동하고 있던 오마이뉴스 김종훈 기자에게 "중앙청 할복 의거 기념식을 열자"고 제안했다. 김종훈 기자가 흔쾌히 동의하면서 급하게 행사가 잡혔다.
기념식은 10월 22일 토요일에 열렸다. 25일에 하는 게 맞지만 그날은 평일인 탓에 앞당겨 주말에 진행한 것이다. 김종훈 기자가 먼저 투어 참가자들을 데리고 현충원을 한 바퀴 돌고 오면, 마지막으로 독립유공자 묘역 내 문일민 선생 묘 앞에서 기념식을 거행하기로 했다.
이윽고 현충원 투어 참가자들이 문일민 선생 묘역 앞에 모였다. 김종훈 기자로부터 마이크를 넘겨 받은 나는 참가자들 앞에서 문일민 선생의 삶과 중앙청 할복 의거에 대해 20분 정도의 약식 강의를 진행했다(* 강의 다시보기: https://youtu.be/WkCPQT2Ls7I).
▲ 2022년 10월 22일 국립서울현충원 문일민 선생 묘역 앞에서 강연을 하고 있는 기자의 모습 |
ⓒ 권택상 |
"문일민이 스스로 배를 가르며 통일정부 수립을 호소한 지 75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남과 북으로 나뉘어 살고 있습니다. 과연 이것이 독립운동가들이 바라던 세상이었을까요.
저는 우리 모두가 중앙청 할복 의거를 기억하면서 한반도의 미래를 고민하고 또 통일에 대한 꿈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어딜 가나 누차 강조합니다. 진정한 광복은 통일의 완성이라고. 우리 민족이 통일을 이룰 때까지 독립운동은 끝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 문일민 선생 묘역에 문배술을 올리는 시민들의 모습 |
ⓒ 권택상 |
뒤늦게 참가자 중 한 분이 찍어준 사진을 받아보았다. 갈 때마다 찾는 이 없어 쓸쓸하기만 하던 문일민 선생 묘역에 이토록 많은 시민들이 모여 인사하는 모습을 보니 코끝이 찡했다. 여기에 온 이들 중 단 한 사람이라도 문일민이라는 이름 석 자를 기억해준다면 그것만으로도 큰 보람이라고 생각했다.
▲ 문일민 선생 묘역에 참배하는 현충원 투어 참가자들 |
ⓒ 김경준 |
역사 속에서 걸어나오기 시작한 그 이름
▲ 2022년 9월 17일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에서 열린 한국민족운동사학회 월례발표회에서 '무강 문일민의 의열투쟁'으로 발표하는 기자의 모습 |
ⓒ 김경준 |
작년 12월에는 동작문화재단에서 주최한 '2022 동작 우리동네이야기' 공모전에 문일민 선생의 논문을 쓰게 된 사연으로 응모했다가 선정되는 덕분에 구립김영삼도서관에서 관련 사진 및 영상이 전시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 문일민 선생 묘역 앞에서 (2022 동작 우리동네이야기 전시 작품) |
ⓒ 동작문화재단 |
올해 5월에는 2030 청년들을 이끌고 현충원 투어를 진행하면서 문일민 선생 묘에 참배하고 그의 삶을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청년들은 '이런 독립운동가도 있었어?' 하며 놀라고 신기해하는 반응이었다. 이처럼 그의 삶을 알리기 위한 현충원 투어 및 강연 등에 적극적으로 나서왔다.
▲ 독립운동가 초상화 전문 작가인 주환선 작가가 그린 '무강 문일민' |
ⓒ 주환선 |
주환선 작가의 초상화를 보며 문득 '유방백세(遺芳百世)'란 말이 떠올랐다. 꽃다운 향기가 백세에 전한다는 뜻이다. 백범 김구 선생이 효창공원(효창원)에 안중근,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의 묘역을 조성하며 기단에 새긴 글자다. 영웅들의 명성(꽃다운 향기)이 후세에 길이길이 남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말이다.
문일민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들이 한 사람, 한 사람 늘어나고 또 이렇게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그를 알리려는 움직임이 이어지니 이것이 곧 유방백세가 아니겠는가. 역사는 이렇게 진보한다.
물론 아쉬움도 있다. 현재 문일민·안혜순 부부는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나란히 잠들어 있다. 다만 안혜순 선생이 서훈되기 전에 조성된 묘역이라 묘비에는 '애국지사 문일민의 묘(배위 안혜순)'라고 새겨져 있다.
최근 한 시민단체의 노력으로 부부가 모두 독립운동가인 경우 배위라는 표현 대신 남편과 부인을 나란히 애국지사 및 순국선열 등으로 표기하는 방식으로 현충원 내의 묘비 교체가 이뤄졌다. 이회영·이은숙 선생의 묘가 대표적이다.
▲ 문일민·안혜순 선생의 묘비 |
ⓒ 김경준 |
후손들의 주장도 일리가 있고, 또 묘비 교체는 전적으로 후손들의 권한이기에 한 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다만 안혜순 선생 역시 누군가의 부인으로서가 아니라 당당한 독립운동가로서 남편 문일민 선생과 나란히 자리해야 한다는 나의 입장엔 변함이 없다. 그것이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온당한 예우일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이 일은 언젠가 꼭 성사시키고 싶은 나의 숙원이다.
평양 소주를 제단에 올릴 날을 고대하며
"돌이켜 남한의 형편을 보면 그것도 아름답지 못하니 친일파의 블럭은 곳곳에 발호하고 있다. 민족반역자의 세력은 군부 방면에까지 벌써 뿌리를 깊이 박혔다. 그들은 표창까지 받는다. (…중략…) 비록 노둔(魯鈍)한 일민이라도 생명을 홍모(鴻毛)로 생각한지는 오랜지라. 감히 민충정공과 같이 자문(自刎)함으로써 애국동포의 정신을 환기하려 하며 할복까지 하였던 것이다." - <동지동포께 일언함>, 《독립신문》, 1947.12.20.
문일민 선생이 직접 밝힌 중앙청 할복 의거의 결행 동기다.
그가 비판했던 1947년 당시 남한의 상황과 2023년 현재의 대한민국 사회가 놀라우리만치 닮아있음을 느낀다.
친일반민족행위자와 그 후손들이 당당하게 애국자 행세를 하고, 대한민국 국가보훈부는 이들에게서 친일파라는 꼬리표를 떼고 영웅으로 둔갑시키려는 행보를 거침 없이 이어가고 있다. 2018년 남북정상회담으로 잠시나마 봄이 오는 듯했던 남북관계는 다시 추운 겨울로 접어들었다. 우리는 여전히 독립운동가들이 만들고자 했던 세상과는 거리가 먼 세상에서 살고 있다.
선열들의 유지를 받들기는커녕 오히려 반역사적 행보를 밟고 있는 못난 후손들을 본다면 문일민 선생은 과연 뭐라 말씀하실까. 아마 지하에서 통곡하고 계시지는 않을까. 그의 무덤 앞에 설 때마다 민망해서 고개를 들기 어렵다.
이러한 현실이 과연 온당한 것인지, 이대로 앉아서 지켜만 보는 것이 맞는지 그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묻고 있다.
해방을 맞아 환국을 앞둔 문일민은 무실역행(務實力行: 실제에 힘쓰고 온 힘을 다해 행한다는 뜻으로 행동과 실천을 강조하는 말) 네 글자를 남겼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실천해야 함을 동지들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남긴 당부였으리라.
▲ 1945년 11월 중국 충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을 앞두고 작성한 '환국기념 서명포'. 빨간 네모 박스 안의 무실역행(務實力行)이 문일민의 친필이다.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에서 촬영) |
ⓒ 김경준 |
그가 남긴 무실역행이라는 네 글자를 이제는 우리가 실천해야 할 때가 아닐까. 나 역시도 그의 삶을 널리 알리고, 그가 바랐던 세상을 만들기 위해 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언젠가 남북통일이 완성되고 그가 바랐던 세상이 오면 가장 먼저 평양으로 달려갈 것이다. 그리고 대동강물로 만든 평양 소주 한 병을 가져와 그의 무덤 앞에 올리고자 한다. 그날이 어서 오기만을 바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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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무강 문일민 평전>의 연재를 마칩니다. 지금까지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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