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은 항일전쟁인 까닭은
박길수 2023. 7. 24. 11:24
1894년 7월, 일본군의 경복궁 침탈-점령 사건을 되새기다
1894년 갑오년 12월, 끝내 관군에 피체돼 나주를 거쳐 한양으로 압송된 전봉준은 갑오개혁 이후 '개화'된 조선의 신식 법정에서 재판을 받게 됐다. 그가 쫓아냈던 탐관오리 조병갑이 배심판사로 활동하는 법정 말이다. 그러나 전봉준에게 그보다 참기 어려웠던 것은 조선인도 아닌, 수많은 동학군들을 살육한 일본의 관리들로부터도 심문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었을지도 모른다.
전봉준이 "야반에 왕궁을 격파하여 주상을 경동케 하였다"고 한 사건은 1894년 7월 23일(음6.21), 일본군의 경복궁 침탈-점령 사건을 말한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사건이 있은 지 129년이 되는 2023년 7월 23일, (사)동학농민혁명유족회(이사장 주영채), 서울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이사장 채길순), 천도교서울교구(교구장 윤태원) 등 3개 단체는 이날 오후 2시부터 '경복궁 점령사건을 기억하는 모임'을 갖고, 경복궁 일대의, 관련 사적을 탐방하는 행사를 진행했다.
참석자들은 광화문 정문을 출발하여 근정전을 거쳐,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할 당시 가장 먼저 돌파했던 경복궁의 서문, 영추문 앞에서 1차 설명회를 갖고, 이어 고종이 피신했다가 볼모로 잡힌 '함화당'으로 이동했다.
함화당 앞에서는 '경복궁 점령사건을 기억하는 행사'가 진행됐다. 행사는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의 시발점으로서, 그리고 17명 이상의 조선군이 전사한 '격전의 현장'으로서의 경복궁의 역사성과 전사자들의 넋을 위로하는 의식으로 '동학의례(청수봉전과 묵념)', 채길순 이사장과 주영채 이사장의 기억을 위한 말씀 등으로 진행되었다.
한편, 이날 행사에 함께한 박용규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은 다음과 같이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사건의 의의를 '항일 독립운동으로서의 동학농민혁명'의 의의라는 관점으로 설명했다.
서울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는 일반적으로 전라도나 충청도 일대의 사건으로 기억되고 이해되는 동학농민혁명이 서울지역에서도 활발한 사건의 흔적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서울을 기점으로 동학농민혁명을 이해할 때, 그 역사적인 확장성, 그 동아시아-세계사적인 의의가 분명히 드러난다는 취지로, 서울지역동학농민혁명 및 동학(천도교)의 사적 발굴과 역사 및 사상 연구 등을 위하여 올해 4월 23일 창립식을 갖고 활동을 시작했다.
[박길수 기자]
▲ 동학농민혁명은 항일전쟁이다 갑오년(1894)에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탈하였을 때, 고종이 피신하였던 함화당 앞에서 행사 참석자들이 '역사를 기억하는 행사'를 마치고 기념촬영을 하였다. |
ⓒ 박길수 |
1894년 갑오년 12월, 끝내 관군에 피체돼 나주를 거쳐 한양으로 압송된 전봉준은 갑오개혁 이후 '개화'된 조선의 신식 법정에서 재판을 받게 됐다. 그가 쫓아냈던 탐관오리 조병갑이 배심판사로 활동하는 법정 말이다. 그러나 전봉준에게 그보다 참기 어려웠던 것은 조선인도 아닌, 수많은 동학군들을 살육한 일본의 관리들로부터도 심문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었을지도 모른다.
일본 관리는 전주화약 이후 해산하였던 동학농민군이 왜 다시 기포해 공주성을 공격했는지 물었다. 전봉준의 대답은 이러했다(괄호 안은 모두 필자 주).
그 후(해산 이후 ) 들으니, 귀국(일본)이 개화(開化; 내정개혁)를 한답시고, 처음부터 민간에게 일언반구 알리는 일도 없고 또 격서(激書; 선전포고)도 없이 군대를 거느리고 도성(都城; 한양성)으로 쳐들어와 야반에 왕궁(王宮; 경복궁)을 격파하여 주상(主上; 고종)을 경동(驚動; 놀람)케 하였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나와 같은 시골선비들과 일반 백성들은 충군애국의 마음으로 분개를 이기지 못하여 의병(義兵)을 규합하여 일본군과 싸우고자 했던 것이다. (「전봉준공초」, 『동학란기록』 하, 국사편찬위원회, 529쪽)
전봉준이 "야반에 왕궁을 격파하여 주상을 경동케 하였다"고 한 사건은 1894년 7월 23일(음6.21), 일본군의 경복궁 침탈-점령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은 일본군이 텐진조약을 빌미로 한반도에 대규모 병력을 출동시켰다가, 전주화약으로 말미암아 철수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자, 경복궁을 침탈해 임금을 볼모로 삼고, '청일전쟁의 개전(청국군의 한반도에서의 퇴거)'을 위한 명분을 만들기 위한, 명백한 침략행위였다.
전주화약 이후 집강소를 통한 자치 활동을 전개하던 동학농민군은 '일본군의 침략'에 대응해 재차 봉기를 단행했다. 이것이 이른바 '제2차 동학농민혁명'이다. 이것만 봐도, 적어도 동학농민혁명 2차 기포는 명백한 '항일전쟁'이며 '반제국주의 전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위의 '전봉준'의 발언은 이 점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 경복궁의 서문인 영추문 앞에서 일본군이 1894년 갑오년에 경복궁을 침탈할 때 이곳 영추문을 주 공격로로 삼아서 경복궁의 모든 문을 통해 일제히 진입하여 치열한 교전 끝에 고종을 볼모로 삼아 궁궐을 장악하고 조선군의 무장을 해제하였다. |
ⓒ 박길수 |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사건이 있은 지 129년이 되는 2023년 7월 23일, (사)동학농민혁명유족회(이사장 주영채), 서울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이사장 채길순), 천도교서울교구(교구장 윤태원) 등 3개 단체는 이날 오후 2시부터 '경복궁 점령사건을 기억하는 모임'을 갖고, 경복궁 일대의, 관련 사적을 탐방하는 행사를 진행했다.
채길순 서울동학기념사업회 채길순 이사장은 역사 탐방 안내에서 이렇게 말했다.
일본군은 불법적으로 경복궁을 침범하여 국왕을 볼모로 잡고 청일전쟁의 알리바이를 만들고, 또한 동학농민군 토벌을 위한 명분을 강제로 만들어 냈다. 우리가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사건을 기억하고자 하는 것은 이 사건이야말로 일본의 한반도 침략의 본격적인 서막이고, 동학농민혁명이 항일전쟁이라는 사실을 가장 뚜렷이 보여주는 핵심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129년 전 오늘의 사건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은 물론이고, 학계에서도 그 성격을 뚜렷이 자각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오늘 세 개 단체가 공동으로 이 행사를 갖는 것의 의의는 비로소 중대한 역사적 진실 규명을 위한 새로운 출발점을 구축했다는 데 있다. 일본의 역사은폐의 출발점이 바로 이날의 사건이다. 이것을 제대로 규명하는 것이 훗날 식민지 말기에까지 이어지는 일본의 침탈과 사죄하지 않음의 악순환의 역사를 바로잡는 시발점이 될 것이다.
참석자들은 광화문 정문을 출발하여 근정전을 거쳐,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할 당시 가장 먼저 돌파했던 경복궁의 서문, 영추문 앞에서 1차 설명회를 갖고, 이어 고종이 피신했다가 볼모로 잡힌 '함화당'으로 이동했다.
함화당 앞에서는 '경복궁 점령사건을 기억하는 행사'가 진행됐다. 행사는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의 시발점으로서, 그리고 17명 이상의 조선군이 전사한 '격전의 현장'으로서의 경복궁의 역사성과 전사자들의 넋을 위로하는 의식으로 '동학의례(청수봉전과 묵념)', 채길순 이사장과 주영채 이사장의 기억을 위한 말씀 등으로 진행되었다.
▲ 서울은 동학농민혁명 역사의 최종 종착점이다 일본군의 경복궁 침탈-점령사건의 경위와 그것을 기억하는 모임의 의의를 설명하는 주영채 (사)동학농민혁명유족회 이사장과 참석자 일동 |
ⓒ 박길수 |
다음은 주영채 이사장은 기억의 말씀에서 한 말이다.
이곳은 일본군의 조선침략 그리고 실질적으로 조선을 점령하게 된 시작점이다. 이날 이후 조선은 실질적으로 일본의 예속 치하에 접어들었다. 1905년의 을사늑약과 1910년의 경술국치의 시발점이 바로 129년 전 갑오년 바로 이날이다.
이날을 온전히 기억하는 것은 역사의 악연을 뿌리끝에서부터 뽑아내 버리고 새롭게 써 나가기 위한 각오를 다지는 일이다. 이곳 경복궁을 위시하여 서울 전역에는 동학과 관련된 사적들이 매우 많다.
그것을 찾아내고 시민들 속에 알리는 것은 동학농민혁명이 과거사가 아니라 현재의 역사이고, 한반도 내의 역사가 아니라 동아시아의 삼국에 걸친 국제적인 사건이고, 나아가 일본 제국주의가 대변하고 있던 세계 제국주의의 식민지 쟁탈전을 폭로하는 시발점이다. 앞으로 서울 지역 동학 역사 탐방에 계속적인 관심과 참여를 요청한다.
한편, 이날 행사에 함께한 박용규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은 다음과 같이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사건의 의의를 '항일 독립운동으로서의 동학농민혁명'의 의의라는 관점으로 설명했다.
일본군의 경복궁 침탈사건 당시 치열한 교전이 있었다. 조선군이 17명 전사, 일본군이 2명 전사한 규모는 이듬해 을미사변 당시 민비가 살해당할 때보다 그 규모가 훨씬 크다. 그리고 이것이 촉발한 동학농민혁명 2차 기포 당시 동학농민군의 전사자는 일본인 연구자인 나카츠가 아키라 교수의 연구에 따르더라도 최소 3만 명, 최대 5만 명에 달한다.
이 숫자는 을미의병 당시 의병들의 희생자 3백 명 안팎과 비교해 보면 엄청난 것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동학농민혁명 2차 기포는 조선의 독립운동일 뿐 아니라 동아시아의 독립운동이라고 평가하고, 청일전쟁은 명백하게 조-청-일의 삼국 전쟁이었다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들은 독립유공자로서 서훈되어야 한다는 당위성도 확보된다고 할 수 있다.
서울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는 일반적으로 전라도나 충청도 일대의 사건으로 기억되고 이해되는 동학농민혁명이 서울지역에서도 활발한 사건의 흔적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서울을 기점으로 동학농민혁명을 이해할 때, 그 역사적인 확장성, 그 동아시아-세계사적인 의의가 분명히 드러난다는 취지로, 서울지역동학농민혁명 및 동학(천도교)의 사적 발굴과 역사 및 사상 연구 등을 위하여 올해 4월 23일 창립식을 갖고 활동을 시작했다.
서울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는 앞으로도 정기적으로 서울지역 동학사적을 발굴하여 시민들에게 알려 나가고, "서울 동학의 길"을 조성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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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서울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는 앞으로도 서울 지역의 동학농민혁명 및 동학(천도교) 관련 사적을 발굴, 탐방하고 연구하며, 이를 시민들에게 알리고, 동학농민혁명의 전국화, 세계화, 미래화라는 과업을 위한 노력을 계속해 나가고자 한다. 이 기사는 필자의 블로그(브런치)에 일부 수정하여 게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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